일상 끄적끄적2019. 6. 29. 03:26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타 연극이었고 연출이 남성2인극에 과감하게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대사 수정 없이 그대로 남자 대사를 읊게 한 게 신의 한수였네요.

 

이거 남자배우가 하는 연극으로 봤으면 진부한 거 왜 하냐, 시간낭비 돈낭비 했다, 했을 텐데, 연출이 여배우를 쓰면서 내러티브의 초점이 극중극의 여배우로 옮겨가면서 극 전체가 재전유 되는 부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비평가>는 2인극이라는 형식과 두 등장인물의 치열한 논쟁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꽤 여러가지 토픽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처럼 픽션과, 픽션의 재현, 비평의 본령을 비롯해서 시선의 권력이라든가 하는 정말 여러가지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발되는 키워드들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상 이번 연출의 주제랄지 최심부에 있는 토픽은 바로 "진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연극의 중반부까지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중반부 이후까지도 메타연극답게 연극의 본령이니 비평의 본령이니 하는 진부한 논쟁으로 가득하죠. 한 두 세살만 더 어렸어도 따분하지는 않았을텐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걸 연출한 연출가도 작가도 <비평가>의 내용이 이미 오래 전에 "한물간" 소위 쉰떡밥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연극 속 두 인물 간의 대사에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어느 부분이냐하면 초반부에 볼로디아가 방에 놓여진 <리어왕>의 책을 들고 대충 "연극에 대한 연극은 꽤 오래된 것이고, 셰익스피어도 그러한 작품을 몇 개인가 남겼지만 주목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 이런 대사를 치는 부분입니다. <비평가>가 극중극의 형식을 하고 있는 메타 연극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런 대사는 일종의 위트예요. 자조적인 위트죠.

 

여하튼 이런 식으로 <비평가>는 메타 연극이라는 스스로의 입장을 자조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남성2인극에 여배우를 캐스팅한 과감한 연출의 의도성은 더 부각됩니다. 이러한 의도성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면 꽤 훌륭한 연출전략이고, 또 아주 영리한 마케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평가하건데 이걸 쓴 스페인 작가놈보다 대사 수정 없이(중요합니다) 여배우에게 남배우 대사를 그대로 읊게한 한국 연출가가 시류에 부응하는 감수성은 훨씬 더 뛰어나고 연출 감각도 한 수 위라고 하겠습니다. (뭐 애초에 스페인과 한국의 페미감수성은 비교할 바가 못 되겠지만요)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이 연극의 배우 캐스팅이 신의 한수였는가, 입니다.

 

이 연극에는 후반부에 볼로디아(비평가)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금자탑을 스카르파(작가)가 허물어버리는 반전이 장치되어 있습니다. 볼로디아는 시종 '스카르파의 여배우에는 리얼리티가 없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런 여자를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그런 것은 진짜 여자가 아니다' 라고 혹평하는데 알고보니 그게 볼로디아의 애인을 모델로 한, 대사까지도 볼로디아의 애인이 했던 말 그대로를 대사로 적은 것이었다는 부분이죠. 한마디로 여자는 "진짜"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볼로디아가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논쟁은 스카르파가 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스카르파가 이긴 것처럼 보인다고 적은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르파가 수화기를 들고 신문사 편집부에 들려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이 그 길고 치열했던 논쟁의 종지부를 '스카르파 완승'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견 그것은 끝내 볼로디아에게 호평을 얻어내지 못한 스카르파의 도덕적 양심이라든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마지막 대사들이 작가가 내린 일종의 결론인 거겠죠.

 

그리고 그 결론이라는 건 주지의 진부한 너도 옳다, 그리고 나도 옳다,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인데 이게 글쓰기와 비평의 본령 같은 쉰떡밥에 대한 답으로는 형편없지만 그래서 "진짜 여자"라는 건 뭐였어? 라는 대답에는 꽤 유효하거든요. 이 부분이 중요한 거예요. 극중극의 여자는 거짓이었나 진짜였나 하는 프레임이 실제 남성2인극이었던 연극을 하고 있는 여배우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옵니다.

 

여기까지 오면 일단 연출이 지시한 큰 길 끝에는 모두 도달한 셈이죠.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아마 연출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확장된 프레임>이 꼭 페미적으로만 전유될 이유는 없다는 게 제 사견이 되겠네요. 그렇죠. 연출이 의도한대로 "진짜 여자"라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여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죠. 마치 남자 옷을 입고, 남자 대사를 읊는 (여)배우들처럼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여자라는 건 뭐고, 남자라는 건 또 뭔가 하고요. 앞서 언급해뒀지만 아마 연출은 논바이너리라든가 퀘스쳐너리와 같은 성소수자 이슈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스카르파의 대본이 연출에 의해, 또 배우에 의해 '오염'되듯이 2019년의 <비평가>의 연출 또한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는거니까요.

 

극중극이 복싱 얘기고 복싱의 링 처럼 책 네 권을 무대 네 귀퉁이에 올려놓고 복싱선수처럼 격렬하게 논쟁하는 모양새라든가 극중극의 복싱 스승을 이겨서 뛰어넘는 제자처럼 볼로디아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는 스카르파 등등은 전부 부차적인 장치들이죠.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9. 6. 29. 02:45

 

일단 이 뮤지컬의 이름은 다시 명명될 필요가 있겠네요.

 

이 뮤지컬의 진짜 이름은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이하, 오첨뮤)이 아니라 <오늘 처음 만드는 것 같은 뮤지컬>입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적어두지만, 배우와 스탭들이 미리 짜고 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오첨뮤는 그날그날 그때그때 공연에 맞춰 객석에서 공연될 장르와, 시작장소, 주요인물, 명대사, 후렴구, PPL등을 관객으로부터 받아서 연출가와 배우들이 매회 새로운 내용을 선보인다는 다소 파격적이고 신선한 형식의 공연입니다.

 

당연히 공연을 보기 전까지 관객들은 그날 어떤 공연을 보게 될 지 모르고 '오늘은 어떤 내용을 보게 될까?' 또는 '오늘 내가 직접 낸 디렉팅 아이디어로 공연을 보고싶다'는 기대와 바람이 사실상 이 공연을 추동하는 에너지인 동시에 꽤 전략적인 세일즈까지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오첨뮤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죠.

 

즉흥극이라는 형식의 공연이 과연 수익을 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오첨뮤는 그것은 결국 세일즈하기 나름이라는 답을 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인터미션에는 꽤 자주 '개천재다'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이걸 듣고 시장조사만 잘해도 본전을 칠 수 있는 공연을 올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첨뮤를 처음 기획한 사람도 이미 시장의 니즈가 무엇인지 잘 알고 이 공연을 기획한 거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 공연은 사실 획기적이지도 파격적이지도 실험적이지도 전위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을 뿐이죠. 다만 그런 <위장>이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게 어떻게 굴러가?' '오늘 공연 망하면 어떡해' 하는 모종의 불안마저 유발하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안 또는 미지의 공연에 대한 설렘이 마치 이 공연은 파격적이다, 신선하다, 획기적이다, 같은 인상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상 무엇인가를 팔려고 할 때는 타상품에 대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에 대해 오첨뮤가 선택한 차별화 전략은 일견 '스토리텔링' 쪽인 것 같지만 스토리텔링에 대한 차별화는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오첨뮤고, 오첨뮤가 어떻게든 굴러간다는 의미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첨뮤는 결코 통속극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클리셰>라고 불리는 것들을 십분 활용합니다.

 

즉흥극이라는 형식을 생각하면 클리셰는 활용하면 할수록 다방면에서 이득이죠.

 

첫사랑은 실패한다든가, 진짜 사랑은 네 주변 아주 가까이에 있다든가 하는 <통속적인 주제>와 킬러가 얼떨결에 목표대상의 아이를 떠맡게 되는 설정 같은 걸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차마 아이는 죽이지 못했다' 같은 <클리셰>의 <마구잡이식 짜깁기>가 오첨뮤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관객들이 정하는 장르니, 제목이니, 등장인물, 시작장소, 명대사, PPL 같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어도, 누구여도, 어디여도 상관없는 더미들이죠. 청춘로맨스면 청춘로맨스, 느와르면 느와르에 부합하는 스토리텔링이 있을 것이고 사실상 메인스트림만 흐뜨러지지 않는다면 저런 단서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죠.

 

가령 영웅담이라고 하면 걔가 어느동네에서 태어났는지 같은 세부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죠. 주인공이 얼마나 비범한지, 또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해서, 칭송받게 되는지 같은 걸 기대하겠죠.

 

뮤지컬을 그렇게 많이 본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오첨뮤를 보고 다시 한 번 느낀건 소위 뮤덕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보고싶은 건 스토리텔링이라기 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서 존잘력을 뽐내는 배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연극이든지 공연이든지 스토리가 캐리하는 경우보다는 배우가 스토리든 연기든 노래든 소름 돋게 훌륭하면 대체로 만족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첨뮤는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의 캐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즉흥극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관객의 니즈를 잘 캐치하고 있죠.

 

정말이지 오첨뮤는 하나서부터 열까지 즉흥적인 '척'을 아주 잘 해내고 있습니다. 가령 노래같은 경우에는 코드를 배우신 분들은 훨씬 더 잘 알고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진행되는 코드의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 C코드로 시작하거나 D코드로 시작하거나 해도 상관없죠. 이미 그 뒤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어느정도 다 알고 있을테니까요.

 

오첨뮤에서는 스토리텔링도 음악도 대사도 전부 버튼 누르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 같은 거예요. 다만 어떻게 봉합하는지가 궁금한 것이고, 다른 극에서의 작가나 연출이 이야기의 조각들을 어떻게 봉합할지(개연성)를 궁리하는데 쏟는 노력이 오첨뮤에서는 배우의 센스로 커버되고, 그 부분은 곧 유머로 승화되죠.

 

봉합은 거칠지만 어쨌든 아무튼 관객은 양해하고 넘어갑니다. 왜냐면 즉흥극이라는 극에서도, 뮤덕들의 소비심리에서도 이미 그 부분은 진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오첨뮤가 관객들로부터 수집하는 더미들 중에서도 특히 '이름'에는 조금 흥미가 있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아니메라든지 만화와 같은 소위 서브컬처를 비롯해서 대중문화 전반에서 '이름'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이런 경향은 제2차세계대전이 갈무리되고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들 무렵(1960년대죠)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요새는 이런 경향이 좀 더 현저하게

증가하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적을 일이 있겠죠.

 

 

Posted by prajna_
summary2018. 6. 21. 21:42
짧은 요약 : 일본에는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여겨지는 오이디푸스 신화구조의 영웅탄생담이 '발단'단계까지만 존재한다. 이러한 부친 살해의 모티프를 가진 일본 지역의 성장소설이 유럽의 그것과 달리 부친의 살해를 기피하는 경향에 의해 어떤 다른 양상을 담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오쓰카는 일본의 성장소설의 구조는 우바카와 설화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성장소설이 '발단'단계까지만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의 전후문학이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과 같은 미성숙한 남성원리로서로 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번째로는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공공적인 문학이 부재했기 때문을 들고 있다. 특히 흔히 '세카이계'가 그러하듯이 주인공 '나'가 단숨에 '세계'라든가 '천황'이라든가 '순수천황'으로 상징되는 '어떤 강력한 힘'으로 비약하는 것은 부친살해담의 부재와 공공적인 문학이 부재하기 때문으로, 오쓰카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담지하고 있는 <세븐틴>의 후속작 <정치소년 죽다>가 봉인됨으로써 서브컬처적인 문학에서 비/비평적으로 계속 반복되고 포스트모던으로 오인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일본적 성장소설'은 '강력한 힘'인 부친을 살해하고 그를 계승하는 대신(서두에서 확인했듯이 일본이라는 지역에서 부친은 살해될 수 없다)<세븐틴>에서 그러하듯 '천황'과 결혼하여 황가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성숙'을 연기한다. 이러한 '성숙'은 여성의 속성을 담지하며 그마저도 종국에는 태내로 회귀되어 이야기되기 전으로 돌아가버린다. 오쓰카는 그 이유를 일본이 근대에서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미성숙한 남성원리로서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후문학과 나와 국가를 연결할 방법이 세카이계의 방법 외에 없었다고 하는 공공적인 문학의 부재등)를 할 기회가 없었으며 <정치소년 죽다>가 봉인됨으로써 '성숙하지 않는 '나'의 일본적 성장소설이 양산된다고 적고있다.   



<항목별 요약>


부친살해담의 부재

오쓰카 에이지는 애국소년론에서 일본에는 랭크가 제시한 여러문화권의 영웅들에게 공통되는 '서사 구조'가 없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여러문화권의 영웅들에게 공통되는 서사구조란 오이디푸스 신화구조로, 유기된 후에 하층민이나 들짐승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게 되고 종국에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아버지를 찾아가 죽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신화인 <고사기>를 보면 발단은 금기를 깨고 비범한 아이가 태어나지만 부친살해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쓰카는 그 이유를 일단 <고사기>의 편찬 목적에서 찾고 있다. 고사기는 천황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편찬되었는데 여기에 천황 살해의 신화를 기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귀종유리담'의 문화사

국문학자 오리구치 시노부는 랭크의 영웅 탄생 신화에 가까운 구조를 귀종유리담이라고 칭했는데, 이때 유리의 이유는 변경으로 떠내려간 당사자의 죄, 즉 부모가 아닌 본인에게 죄가 있어 유리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모노가타리라고 불리는 <다케토리모노가타리>에서도 가구야히메는 그 죄 때문에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이와 같이 발단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오쓰카는 일본에서 '부친 살해'를 전면적으로 기피해왔다고 단언하고자 함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다. <황금가지>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왕의 살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과 같은 문화의 깊숙한 층위에 왕의 살해에 관한 이야기가 묻혀있는 유럽과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오쓰카는 이야기를 <고사기>로부터 출발시킨 것은 지극히 안이한 비평이나, '패전으로 인해 강한 아버지라는 주체를 빼앗긴 일본'과 같은 뻔한 도식으로 귀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른바 '천황 살해 이야기의 불성립'이라는 문제를 일본문화사의 본질적인 문제로 해독하는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번 <고사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비약해보자는 전략임을 미리 주지시킨다.


무국적 '일본어'와 탈역사적 '나'

오쓰카가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1961)과 그 속편인 <정치소년 죽다>(1961)이다. 오쓰카는 <세븐틴>과 <정치소년 죽다>에 사용된 일인칭의 양상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집 <여학생>과의 대비를 통해 재고해보는 작업을 단행한다. 일찍이 가라타니 고진은 한국문학은 한글이 인공어이기 때문에 '뿌리'와 단절되어 있다고 한 바 있다.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역사와 거리를 둔다'는 문제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일본어는 '언문일치체'라는 인공언어로 이러한 인공어가 일인칭과 연관이 된다는 점은 일본근대사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오쓰카는 일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인칭으로 쓴 일본어가 도쿄 사람들에게는 위화감을 준다고 지적한 바 있고, 이것은 표준어에 내재된 인공성을 부각시킨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오쓰카는 다자이가 여성 일인칭을 취했던 이유가 전시라는 상황의 '위장' 때문이 아니라 다자이의 자기표현의 양태가 여성 일인칭으로 그려질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언문일치체에서 여성 일인칭은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한, 그렇기 때문에 보다 인공성이 짙은 문체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나'가 중성적인 문체라는 주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순수천황'을 욕망하는 '나'

오쓰카는 논지를 되돌려서 이러한 인공적이고 무국적적이며 비역사적이고 서브컬처적인 '나'가 희구하는 '강력한 힘'(다자이, <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다. 오쓰카는 다자이의 <12월 8일>을 경유하며 <세븐틴>에서 근대 일본의 포스트모던적인 '나'의 전후의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요약하자면 원래 일본에서 포스트모던하게 보이는 '나'라든가 '문화'는 근대적인 제도로서의 그것들에 대한 비판 내지 초극의 형태로 성립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세븐틴>에서의 '나'가 무관심하다는 것은 전술했듯 근거를 비판하거나 초극하는 '전략'으로 오해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이 쓰인 시점을 고려해서 구체적인 천황을 지정하거나 혹은 신화상의 천황과 동일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작중의 '천황' '순수천황'은 철저하게 단순화된 초월성의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주변국은 일본이라는 지역의 '천황'상이 엄연히 존재했을 역사와의 관계를 망각할 뿐 아니라 수정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서브컬처 영역의 '세카이 계열'과 마찬가지로 다자이의 <여학생>도 일본의 내셔널리즘도 말하자면 '세카이계'라는 게 오쓰카의 요지다.


'공공적인 문학'의 부재

필자인 오쓰카는 일본이라는 지역의 근대는 '세카이계'와 같은 방법 외에 '나'를 '국가'와 연결시키는 다른 절차를 구축할 기회를 잃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가 단번에 '천황' 내지 '세카이'로 연결되는 '세카이계열'적인 문제가 성립했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한가지는 '공공적인 문학'의 불성립, 또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일본에서의 성장소설의 불성립이라는 문제다. 원래 다자이의 '나'라든가 세카이계열의 '나'는 성장소설적인 이야기를 취하면서 주인공의 성숙을 그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단숨에 '세카이'로 비약해버리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가 자신의 소설의 규범으로 여기는 나쓰메 소세키의 <광부>와 같이 성장소설의 구조를 가지면서 그것이 도중에 포기된 소설이 일본에서는 하나의 형식이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성장소설을 모방하면서 그러나 최종적으로 성숙은 보류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이야기서사 구조에 대한 자기언급이다. 따라서 다른 말로 하면 '일본형 성장소설'이라는 구조의 성립으로 이해되고 비판되어야 할  문제다.


미성숙한 남성원리로서 전후문학

부친 살해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은 문화 속에서 그렇다면 성장소설이 일본이라는 지역의문화에서는 어떤 편차를 만들어냈고, 또 만들어낼 것인가. <세븐틴>과 그 속펴는 '나'의 자살로 끝이 나지만, 그러나 '나'가 실감하는 신체의 성장에 대한 의지가 오로지 자위뿐이라는 사실을 우선 눈여겨봐야 한다. 오쓰카가 주목하는 것은 패전 후 일본의 전후문학이 남성 원리를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과 같이 밖에 그리고 있지 않는 점이다. 남자의 성기가 뚫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장지문의 얇은 종이이며, 게다가 그것도 다음 장면에서는 장지문 너머에서 집어던진 책에 맞는 대상이 되고 만다. 고작 성기로 장지문을 뚫는 것을 '남자'로서의 자기실현이라고 바꿔치기 하는 착오에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기꺼이 속아왔다. 그러나 오에만은 남자의 성기 그것 자체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따라서 <세븐틴>의 '나'가 실감할 수 있는 성숙의 징조는 마스터베이션을 할 때만 채워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나'가 두려어하는 것은 '나'의 주위가 '제로'가 되는 것으로 '나'는 왜소한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적'을 찾아내는 것으로 '텅 빈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근거가 영원히 부재하다는 공포는 저주할 대상을 찾는 것 따위로는 해결될 수 없기에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한다. 그 때 '누군가'로서 호출되는 것이 바로 황태자비다. 여기서 '나'의 자기실현의 틀로서 '황태자비'와의 동일화, 천황가의 여자(신부)가 된다는 도착된 행동이 그려져 있는 것은 흥미롭다. 랭크가 제시한 영웅 탄생 신화에서는 아이는 자신이 성스러운 혈육의 왕자이기 때문에 왕을 대신한다. 그러나 일본문학에서 그것은 기피된다. 이렇게 <세븐틴>, <정치소년 죽다>에서 '나'의 '자기실현'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들'이 아니라 '신부'로 전환된다. 오에의 소설은 결국은 '나'가 신부가 되기 위한 도착된 성장소설로 그려진 것이다. <세븐틴>에서 '나'가 획득하는 '갑옷'이나 '일본남자'라는 명명은 자기실현의 달성이 아니라 주인공이 집에서 추방되고 산중에 있는 이계에서 초월자의 도움을 받는다는 구절에 상응한다.


'우바카와'의 설화 구조와 남녀치환

이 <세븐틴>의 이야기 구조를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일본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부친 살해를 기피하는 성장소설이 어떠한 이야기 구조를 채용했는가 라는 것이다. 오쓰카는 '우바카와'의 설화 구조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에서부터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근대에도 여전히 반복되었음을 지적해왔고 결국은 여기에서도 오에의 <세븐틴> 또한 이와 같은 구조의 '반복'을 들고 있다. '우바카와'형의 이야기를 채용하면 여성의 성장소설과 남성의 성장소설이 공통의 이야기 구조로서 치환가능하고 일본 근대의 서브컬처는 이 구조를 자주 원용하는데 그 중에서도 신카이 마코토는 <별을 쫓는 아이>(2011)가 우바카와 이야기 구조의 원용이라고 강연에서 밝힌 바까지 있다. 오쓰카는 부친 살해의 이야기 구조가 유보되고 그 대신 '우바카와'의 구조가-적어도 '주인공의 자기실현'이라는 주제를 내재시킨근대 이후의 이야기군 중에-쉽게 원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우바카와'의 구조에 따르면 <정치소년 죽다>의 우익소년인 '나'는 우바카와를 두르고 성숙해서 그 성숙을 이성이 인정하고 그리고 신부가 된다는 전개가 되어야 맞는데 사실 그렇게 되는 셈이다. 또한 '일을 한다'는 것은 이야기 서사 구조상 '성숙'의 프로세스에 해당되는데 <정치소년 죽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성숙'이란 여성으로서의 그것이다.


미래영겁, 순수천황

<세븐틴>에서의 '나'는 다시 '자위를 할 목적으로 성기를 만지작'대지만 이제는 '발기하여 남근의 영광'을 발하는 일은 없었고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여자'로서 성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시하라의 주인공보다 훨씬 솔직하게 '나'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황태자비, 즉 천황가의 신부가 되어, '남편'인 천황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마조히즘적인 꿈을 꾸기도 한다. 여기서 '천황'이 '남편'인지 '아버지'인지에 대한 해석은 의미가 없다. 이제 '나' 안에서는 '귀신과 메이지천황의 초상을 섞어놓은 듯한가공의 순수천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차 이 '순수천황'에 의해 '세계'와 '나'의 관계를 회복한다. '나'가 '황기이천육백이십년'이라고 쓰는 구절은 다자이의 <12월 8일>을 정확히 연상시키며 강력한 무언가에 의해 여학생인 '나'가 '황기'안으로 매우 간단하게 회수되는 것과 똑같다. <세븐틴>에서 '누구라도 상관없었습니다'라는 구절이 상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살인'이 자기실현의 방편으로 확실히 의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황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구체적인 천황이나 천황제 시스템이 아니다. 천황이라는 것은 '나'의 자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나'가 원하는 것은 '순수천황'과의 일체화이다. 일반적인 오이디푸스 서사에서는 그것이 '부친 살해'로 달성되지만 여기서는 '나'가 신의 신부로 분한다는 비틀어짐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성숙거부, 태내회귀

<정치소년 죽다>에서의 '나'는 천황이라는 '어머니'의 '모태'로 회귀하여 태아가 된다. 이야기의 이전으로 '나'는 회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장소설의서사 구조를 취하면서 동시에 성숙 거부를 한다는 구도는 가와바타의 <이즈의 무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본에서 서사의 하나의 정형으로 드러난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벼랑 위의 포뇨>에서 장대한 태내회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포뇨>에서 홍수가 그치지 않는 것은 '양수'에 가득 찬 세계가 하나의 결말의 형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븐틴>에서 떠도는 바이러스와 같은 '나'는 '히루코'에 다름 아니다. 오에의 <세븐틴>, <정치소년 죽다>는 이렇게 해서 일본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영원히 이야기될 기회를 놓친 이야기의 도입부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천황'이라는 문제를 '문학으로서의 천황'으로 생각했을 때 서사 구조그 자체를 어떻게 비평할 것인가는 어쨌든 중요하다. 일본 근대에 있어서 천황과 성숙 거부가 연결되고, 그리고 자의식과 세카이가 직결되고, 여성의 성장소설 구조까지 차용되고, 태내회귀에 의해 천황과 결합되고자 한다. 이런 '서사'의 존재 방식을 <세븐틴>은 정확히 그려냈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이자, 또 유일했던 오에의 <정치소년 죽다>가 봉인됨으로써 서브컬처적인 문학에서 비/비평적으로 계속 반복되고 게다가 이와 같은 비틀어진 서사 구조 그 자체가 심지어 포스트모던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가 일본 팝컬처의 산업권에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이 서사 구조를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이야기해 보면, 동아시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판할 수 없는 한 천황제의 '서사론'적인 비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