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동-광장]형식주의 비평 방법summary
<역사 비평 vs 형식주의 비평>
형식주의 비평 방법은 바로 역사 비평 방법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 비평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써 처음 생겨났기 때문이다. 역사 비평 방법이 문학의 원심성을 강조한다면 형식주의 비평 방법은 문학의 구심성을 강조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가의 생애나 역사적 맥락을 규명함으로써 문학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의도를 밝혀내려는 것이 역사 비평 방법의 중요한 임무인 반면, 문학 작품의 형식적 구조를 밝혀내려는 것이 형식주의 비평 방법의 임무이다. 역사 비평가들에게 있어서 문학 작품의 의미를 캐는 것은 곧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거나 작품의 주변 환경을 연구하는 것과 크게 다름없다. 그러나 형식주의 비평가들은 역사주의 비평가들의 이러한 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형식주의의 역사>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써의 형식주의는 1930년대부터 크게 세력을 얻으면서 발전하였지만 사실 그 역사는 까마득히 고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문학 작품의 내용과 사회적 · 도덕적 효과를 중시한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에서 형식과 구조 그리고 스타일을 중시하였고 로마 시대의 문학 이론가 호라티우스는 작가들에게 무엇보다도 단순하면서도 통일성 있는 글을 쓸 것을 권고하였다.
<형식주의의 역사—관념 철학과 낭만주의에 마련된 기틀>
이러한 태도는 서양에서 고대뿐만 아니라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독일의 관념 철학과 낭만주의는 형식주의 문학 이론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예술을 특별한 형태의 인식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낭만주의자들은 역동적인 예술적 상상력에서 생겨난 문학 작품이 그 나름대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써 독립된 실체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낭만주의자들은 만약 문학 작품이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모든 부분은 마땅히 전체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문학 작품에서 전체와 부분의 상호 관계는 사실 모든 낭만주의자들의 최대 관심사와 다름없었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 비평가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렇게 강조하는 문학의 ‘유기적 통일성’이다.
<형식주의의 역사—형식주의=모더니즘의 비평 방법>
이렇게 낭만주의자들이 이론적 기틀을 마련해준 형식주의 비평 방법은 20세기 초엽 서구를 중심으로 풍미한 모더니즘에 이르러 다시 한번 이론적 뒷받침을 받는다. 신비평과 모더니즘은 일종의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형식주의는 곧 모더니즘의 비평 방법이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는다. 문학 작품에서 형식적 특성을 중시하는 입장은 비단 서양 문화권에만 그치지 않았고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동양 문화권에서도 문학의 형식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형식주의는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 비평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온 비평 방법이다. 이 비평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이 시들기 시작한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195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한 다음 1960년대 이후로는 도전을 받으면서 점차 쇠퇴 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연구 방법론으로써 형식주의는 아직도 그 유용성을 잃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 학계가 보고한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미국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방법론 가운데에서 신비평은 해체주의나 페미니즘 이론과 같은 갖가지 최근 이론을 제쳐놓고 ‘비평의 황제’로써 그 힘을 여전히 떨치고 있다.
<형식주의의 역사—러시아 형식주의와 미국의 신비평>
그 역사는 비록 짧지만 형식주의 비평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만큼이나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비롯하여 미국의 신비평, 시카고 대학의 신(新) 아리스톨레스 학파 비평, 리비스로 대표되는 영국의『스크루티니』비평 등이 모두 형식주의의 넓은 우산 안에 들어간다. 이 밖에도 블랙머나 아이보 원터스 또는 마크 쇼러처럼 어느 특정한 비평 유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형식주의적 문학 이론을 펼치는 사람들까지 넣는다면 그 범위는 이보다 훨씬 더 넓어진다. 그러나 형식주의 비평 방법이라고 할 때에는 러시아 형식주의와 미국의 신비평 두 유형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좀 더 꼼꼼히 따져보면 러시아 형식주의와 신비평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좀 더 방법론에 관심이 있는 러시아 형식주의는 문학 이론을 위한 과학적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는 한 반면, 실제 비평 쪽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신비평은 인문주의적 특성을 중시하였다. 그런데도 여러 면에서 이 두 비평은 서로 입장을 같이한다. 그러므로 신비평은 러시아 형식주의가 논리적으로 발전한 비평 방법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형식주의의 역사—러시아 형식주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러시아 형식주의는 1915년에 창설한 모스크바언어학회와 그 이듬해 창설한 ‘오포야즈’(시어연구회)에서 시작되었다. 로만 야콥슨과 페트르 보가티레프는 모스크바언어학회에서 그리고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와 유리 티니야노프와 보리스 아이헨바움은 시어연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결같이 그들은 문학 작품이란 특수한 방법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특수한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문학 작품에서 쓰는 언어는 일상 생활에서 의사 소통이나 정보 교환을 위하여 쓰는 일상어와는 변별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문학을 ‘스타일적 기교의 총화’로 보는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이란 한 대상의 기교성을 경험하는 방법일 뿐 그 대상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어를 두고 ‘일상어에 저지른 조직 범죄’라고 부른 야콥슨한테서 훨씬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형식주의’라는 말은 본디 쉬클로프스키나 야콥슨과 같은 이론가들이 문학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를 무시한 채 지나치게 형식이나 기교에만 치중하려는 태도를 비꼬아 부른 용어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중시하는 기교 가운데에서도 ‘낯설기 하기’와 ‘드러내기’는 가장 눈여겨볼 만한 기법이다. ‘낯설게 하기’나 ‘드러내기’하면 곧 러시아 형식주의를 떠올릴 만큼 이 두 용어는 이제 러시아 형식주의를 가리키는 꼬리표가 되다시피 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일상어와 문학어를 엄격히 구분하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존재 이유를 언어가 실용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쓰인다는 데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아무런 실용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은 문학어는 사물을 보통과는 다르게 느끼도록 해준다. 가령 어느 누구도 일상 대화에서 “다시는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하고 말한다든지 “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같이 생긴 꽃이여”하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문학가들은 일상어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일상성 속에서 습관화된 인식을 새롭게 해준다. 한마디로 문학의 구성적 특성에 관심을 가지는 그들은 문학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문학성에 한결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에서 형식과 기교를 높이 여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태도는 미국의 신비평가들에 이르러 훨씬 극단적으로 발전한다.
<형식주의의 역사—미국의 신비평>
신비평가들은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채 문학 작품에 자기 목적성을 부여한다. 만약 문학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가나 독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홀로 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클렌스 브룩스는 신비평을 한마디로 “시인이나 독자보다는 오히려 시에 관심을 두려는 노력”이라고 정의 내린 적이 있다. 신비평가들이 문학 작품을 ‘잘 빚어진 항아리’(브룩스)나 ‘언어적 형상’(윌리엄 윔저트)으로 보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 시대의 항아리나 고려 청자와 이조 백자를 구태여 어떠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듯이 문학도 어떠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 비평가들에게 ‘신(新)’이라는 접두어가 붙게 된 것도 그들의 태도가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비평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의 자기 목적성을 강조하는 신비평가들은 무엇보다도 저자의 의도에 강한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저자의 의도만이 문학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굳건한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 역사 비평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저자의 의도를 배제한 채 작품 안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신비평가들에 따르면 문학 작품에서 저자의 의도를 밝혀내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말하기를 꺼려하며 그것을 말하는 때에도 대개는 거짓 진술을 하기 일쑤이다. 더욱이 작품을 창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의도하였던 바를 작가들 자신도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이미 사망한 작가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설령 이러한 의도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는 형식주의 비평가들에게는 이렇다 할 만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작품의 실제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의미와는 다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비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윌리엄 윔저트와 먼로 비어즐리는 “저자의 계획이나 의도는 문학 작품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못박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 비평가들이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는 태도를 두고 그들은 ‘의도의 오류’라는 낙인을 찍는다.
신비평가들은 저자의 의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독자의 영향에 대하여서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결과나 영향을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려는 것은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고 하는 것에 못지않게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윔저트와 비어즐리에 따르면 “의도의 오류가 시와 그 기원을 혼동한다면 영향의 오류는 시와 그 결과를 혼동한다.” 문학작품의 심리적 결과를 비평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인상주의와 상대주의를 가져올 따름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렇게 작품의 결과에 따라 작품을 평가하려는 태도를 두고 그들은 이번에는 ‘영향의 오류’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렇다면 신비평가들이 문학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은 다름아닌 구성이다. 역시 신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펜 워런은 “시는 어떤 특정한 요소에 존재하지 않고 일련의 관계, 곧 우리가 시라고 부르는 구성에 의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클렌스 브룩스가 문학 작품을 유명한 건축물이나 명화와 같은 그림에 견주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구성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 신비평가들에 따르면 문학 작품이란 어디까지나 ‘극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각의 요소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작품 전체의 맥락 안에서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신비평가들이 왜 문학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을 서로 따로 떼어 놓으려고 하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이제 알 만하다. 그들은 이 두 가지를 떼어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보기 일쑤이다. 예술적 형식이 없이는 어떠한 예술 작품도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곧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몇몇 신비평가들은 이 이론을 끝까지 밀고 나가 형식이 곧 주제를 구현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문학 작품의 이미지나 상징, 모티프나 패턴 따위는 신비평가들이 중시하는 기교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요소들을 찾아내어 작품의 주제를 밝히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문학 작품에서 주제란 화자나 작중인물을 통하여 작가가 내뱉는 어떤 그럴듯한 추상적인 진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지 · 상징 · 모티프 · 패턴 · 구성 등을 결합하여 작가가 자연스럽게 작품 안에 드러내는 삶에 대한 태도이다. 더욱이 신비평가들은 훌륭한 작품에서는 으레 형식과 주제, 기교와 내용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 작품은 유기적 통일성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