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김욱동-광장]심리주의 비평 방법summary

prajna_ 2015. 2. 22. 14:44

 

<심리주의 비평 방법의 성립>

형식주의 비평 방법이 역사 비평 방법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면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바로 형식주의 비평 방법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의 자기 목적성과 유기적 통일성을 주장하는 형식주의 비평가들은 문학 작품에서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고 하거나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를 밝혀내려고 하는 비평 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심리주의 비평 방법을 사용하는 비평가들은 바로 이러한 오류를 오히려 비평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문학 작품의 심리적 측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발달한 학문 분야라고 할 수 잇는 현대 심리학의 원칙과 이론을 문학에 적용함으로써 그들은 문학 연구 방법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심리주의 비평 방법의 역사>

심리학이 최근에 발달한 학문 분야인 만큼 엄밀한 의미에서의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그 역사가 그렇게 오래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 의미에서의 심리주의 비평은 다른 비평 방법에 못지않게 그 역사가 꽤 오래다. 거의 모든 문학 연구 방법이 그러하듯이 심리주의 비평 방법도 까마득히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을 일종의 미치광이로 여긴 플라톤은 일찍이 문학 작품의 심리적 효과를 중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문학 작품이란 독자들에게 삶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감정을 흥분시키고 부추긴다. 그 유명한 시인 추방론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태도에 근거를 둔다. 시민들의 도덕을 타락시키고 삶의 실재를 왜곡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그는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인 도시 국가에서 시인들을 모두 내쫓아버릴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심리적 효과의 긍정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시학의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비극 이론에서 그는 문학 작품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의 심리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문학 작품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독자들에게 감정의 정화 작용을 가져다 준다. 그가 말하는 카타르시스의 개념은 다름아닌 이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학 작품이 독자의 심리를 고양시킨다고 본 점에서는 로마 시대의 문학 이론가 롱기누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의 이론가들이 처음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문학의 심리주의 이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큰 설득력을 얻는다. 가령「시의 옹호」에서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필립 시드니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선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 철학보다는 문학이 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까닭을 철학과는 달리 문학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18세기의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고통을 묘사하는 비극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쾌락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초엽 낭만주의자들한테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심리주의 비평 방법의 영역과 한계>

그런데 문학 작품을 연구하는 모든 방법론 가운데에서 심리주의 비평 방법만큼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사용해온 접근 방법도 아마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비평이 심리 문제와 조금이라도 맥이 닿아 있으면 심리주의 비평 방법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어떤 이론가들은 아예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아주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일반적 의미의 심리학의 관점에서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은 물론이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라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것도 이 비평 방법에 속한다. 전통적인 정신분석 이론 말고도 최근에 들어와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나, 예일 학파의 한 사람인 해럴드 블룸의 영향의 불안이론도 심리주의 비평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신화 비평 또는 원형 비평이라고 부르는 비평 방법까지도 넓은 의미에서는 심리주의 비평 방법의 테두리에 넣기도 한다. 그러니까 작가나 독자 또는 문학 작품의 심리적 측면을 중시하는 이론은 일단 이 비평 방법에 포섭되는 셈이다. 적어도 문학 텍스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심리주의 비평가들이거나 프로이트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모든 연구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절충적인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심리학적 접근 방법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른 비평 방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포괄적인 비평 방법은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써는 이렇다 할 만하게 쓸모가 없게 마련이다. 연구 방법으로써 유용하기 위하여서는 그 범위를 좀 더 좁게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리주의 비평 방법의 갈래와 방법>

일반적으로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크게 셋 또는 네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되다시피 한 저서『문학의 이론』에서 르네 웰렉과 오스틴 워런은 이 비평 방법의 영역을 1)유형이나 개인으로서 작가의 심리학적 연구, 2)창작 과정의 성격 규명, 3)문학 작품에 나타나 있는 심리적 유형이나 법칙의 연구, 4)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 등으로 나눈 바 있다.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문학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작가를 연구하는 데에 그 첫 번째 목표를 둔다. 이 방법은 문학 작품이란 그것을 만들어낸 창조자의 정신을 반영하거나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작가의 삶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이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이 비평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의 한 갈래인 전기 비평과 아주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작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되 심리주의 비평가들은 역사적 맥락보다는 오히려 심리적 맥락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다시 말해서 심리주의 비평가들의 임무는 작가의 무의식적인 의도를 추적하는 데에 있다. 그들은 이른바 심리 전기를 기술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가진다. 서구 문학사에서 마리 보나파르트가 쓴 에드거 앨런 포 전기를 이러한 비평을 보여주는 아마 가장 유명한 본보기일 것이다.

더욱이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문학 작품이 창작되는 과정 그 자체를 연구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가의 경험이나 성격이 주제 선택이나 작중인문의 설정 또는 문체 따위를 결정하는 데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작가는 하필이면 왜 특정한 작품을 창작하는가? 무엇보다도 작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작품을 창작하는가? 심리주의 비평가들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데에 있어 그들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무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문학 작품이란 궁극적으로 작가가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감정을 언어로 표현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문학 작품 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작품에 나타난 작중인물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그 성격에 따라서 그들을 유형별로 나눈다. 또한 이 비평 방법은 작중인물들의 동기에 대하여서도 큰 관심을 갖는다. 특히 최근에 들어와서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정신분석 방법을 도입하여 문학 작품에 나타난 상징이나 이미지를 연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정신분석 이론가들은 상징을 꿈과 동일한 차원에서 간주하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상징은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인 공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산물로써 애매호모하고 심지어 모순되는 여러 요소가 위장된 형태로 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문학 작품은 마치 꿈과 같아서 명시적내용과 묵시적내용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 곧 작품이 말하는 것과 그 것이 의미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에 심리주의 비평 방법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 정신분석가들이 꿈의 명시적 내용에서 숨겨져 있는 묵시적 내용을 찾아내듯이, 심리주의 비평가들은 문학 작품 속에 숨겨져 잇는 묵시적 의미를 파헤치는 일에 주력한다. 이 점에 대하여 미국의 이론가 노먼 홀랜드는 우리가 시를 정신분석적으로 파악할 때에 우리는 시를 마치 꿈인 것처럼, 또는 어떤 이상적인 환자가 소파 앉아 오보약강격(五步弱强格)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독자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들어와 대두된 이 방법은 독자가 어떻게 문학작품에 반응을 보이는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문학 작품이 개별적 독자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가? 문학은 억압 되어 있던 독자의 심리적 갈등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완 기제로써의 문학은 독자의 긴장과 불안을 어떻게 막아주고 풀어주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는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여러 면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독자 반응 비평을 떠올리게 한다. 독자 반응 비평가들은 한 독자의 경험은 결코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살고 있는 시대, 그가 속하여 있는 사회의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는 심리주의 비평은 사회학적 비평 방법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

창작 과정, 작가, 작품, 또는 독자 가운데에서 어느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든 간에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한결같이 현대 심리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은 심리주의 비평 방법에서 그야말로 주춧돌과 같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프로이트 비평 이론은 심리주의 비평 방법과 동일하지는 않다. 프로이트 비평은 어디까지나 심리주의 비평 방법에 속한 한 갈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주의 비평 방법 하면 곧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될 만큼 이 두 비평 방법은 서로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심리주의 비평이라고 하면 곧 정신분석적 비평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정신분석에 기초한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에게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라이어널 트릴링의 지적대로 프로이트가 문학에 끼친 영향은 방법론에 있다기보다는 전반적인 인간 정신에 대한 태도에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인간 의식에 관하여 그야말로 혁명적인 이론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미셸 푸코는 칼 마르크스와 더불어 그를 두고 언술성의 창시자로 부른다. 그들은『자본론』이나『꿈의 해석』을 쓴 저자 이상으로 서구 지성사에서 굵다란 획을 그은 사상가들이라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프랑스 이론가는 전통적인 사고에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와 마르크스와 함께 프로이트를 회의(懷疑)의 세 대가(大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제1차 정신의 지형학>

정신분석 이론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잠시 프로이트의 이론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크게 1)무의식, 2)()의식, 3)의식의 세 갈래로 나눈다. 이 세 갈래는 얼핏 서로 제각기 다른 영역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세 갈래는 서로 다른 정신 영역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정신의 서로 다른 층위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프로이트는 전의식을 무의식의 일부로 파악하여 정신 활동이나 영역을 무의식과 의식의 두 갈래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흔히 정신의 지형학이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에 견준다. 팔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고 팔분의 칠에 해당하는 부분이 물 밑에 잠겨 있는 빙산처럼 무의식도 인간 정신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고 그 밑에 깊숙이 숨어 있다는 말이다. 독일어를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무의식이라는 용어로 굳어져버렸지만 프로이트는 본디 운베부스테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원래 알려지지 않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원 그대로 풀이한다면 무의식은 심지어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정신 활동이나 정신 영역을 가리킨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정신의 지형학을 이루는 체계 가운데 하나인 이 무의식이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태어날 때에 타고난 본능적인 충동이 그 가운데 하나이고 전의식과 의식에 의하여 억압되어 있는 자료들이 다른 하나이다. 그는 인간 행동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은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며 느끼는 데에 있어 아주 큰 구실을 한다.

그런데 무의식은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과 활동을 찾으려면 꿈 · 말 · 실수 · 농담 따위를 통하는 길 밖에는 없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충동에서 생겨나는 꿈은 무의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 프로이트는 한마디로 꿈의 해석은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을 알아내는 데에 왕도가 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나중에 그의 제자 칼 융이 집단 무의식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큰 영향을 받은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꿈이 표현되는 메커니즘인 응축과 전위를 은유와 환유의 수사적 비유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한편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부분에 속하여 있는 전의식은 오직 의지에 의하여서만 의식 상태로 옮겨올 수 있는 부분이다. 전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자료들은 기억의 형태로만 남아 있을 뿐 좀처럼 의식의 표면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흔히 전의식은 무의식과 이렇다 할 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의식이란 외부 세계를 느끼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식 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의식 과정조차도 오지 그 짧은 순간에만 그러한 상태로 남아 있고 곧 전의식이나 무의식 상태로 다시 바뀌기 일쑤이다.

<프로이트의 제2차 정신의 지형학>

1923년에 이르러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이론을 조금 수정하였다. 흔히 2차 정신의 지형학으로 잘 알려진 이 이론에서 그는 인간 정신 영역을 크게 이드’ ‘에고’ ‘슈퍼에고의 세 갈래로 파악한다. 이렇게 정신 영역을 세 갈래로 분명하게 구분 짓는 것은 흔히 구조적 모델이라고 부르는데 이고 심리학자들이 주로 이 모델에 의존한다. 그리고 지형학이라는 용어에서도 드러나듯이 프로이트는 이 세 갈래를 공간 개념으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전적으로 무의식에 속하여 있는 이드는 원시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인 정신 영역이다. 그것은 육체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본능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쾌락 원칙을 충족시키려는 데에 이드의 목적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프로이트는 논리의 법칙—무엇보다도 모순의 법칙—이 이드의 과정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모순적인 충동은 상대방을 화해시키지 않고 나란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드는 가치나 선악, 도덕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드는 리비도가 저장되어 있는 곳이며 모든 심리적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드는 신학자들이 흔히 악마라고 정의하는 속성과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에고는 이드의 본능을 파괴적인 행동 양식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규제하고 대항하는 구실을 한다.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에고가 전적으로 전의식과 의식에 속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나중에는 무의식의 본능적 에너지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쾌락 원칙을 따르는 이드와는 달리 에고는 현실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은 흔히 이드의 본능적 욕구와 슈퍼에고의 사회적 압력 요구 사이에서 중재자로써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드에서 발전한 에고는 이드를 통제하는 것만큼이나 그것과 서로 내통하고 있게 마련이다. “이드가 있었던 곳에 에고가 있을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그 유명한 명제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드와 에고의 관계를 말과 승마자의 관계에 견준 적이 있다. 더욱이 자아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에고는 자기 보존과 타인과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흔히 초자아라고 부르는 슈퍼에고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에고를 통하여 사회적 압력에 비추어 도덕적 검열자로써의 역할을 한다. 이드의 본능을 억압하거나 금지하고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쾌락에 대한 충동을 무의식 속으로 몰아넣는다. 쾌락 원칙의 지배를 받는 이드나 현실 원칙의 지배를 받는 에고와는 달리 슈퍼에고는 도덕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다면 슈퍼에고는 곧 양심과 규율의 보고와 같은 구실을 하는 셈이다. 방금 앞에서 이드를 악마에 비유하였거니와 슈퍼에고는 천사에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악마와 천사의 두 극단적 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에고는 말하자면 인간의 위치에 해당한다. 흔히 슈퍼에고는 부모, 특히 아버지의 권위나 사회의 제약이나 금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에고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무의식에 속하여 있는 슈퍼에고는 외부에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드나 에고가 변형된 형태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정신의 지형학에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은 곧 성의 이론이라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만큼 성은 그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칼 융이나 아프레드 아들러와 같은 제자들이나 동료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프로이트가 성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데에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인간의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 성에 의하여 그 동기가 유발된다. 이렇듯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성과는 깊은 관계가 있다. ‘본능심리학이나 이드심리학으로 부르는 심리학에서는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써 무엇보다도 성 본능의 역할을 유난히 강조한다.

인간의 정신 생활에서 성적 본능의 표현과 관련한 모든 에너지를 프로이트는 리비도라고 부른다. 물론 리비도는 반드시 성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지만 성과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리비도는 인간의 모든 본능적인 활동의 근저를 이루는 것은 아니고 오직 프로이트가 삶의 본능이라고 부르는 본능의 근저를 이룰 다름이다. 그는 본디 인간의 본능을 리비도로 대변되는 삶의 본능과 기아(飢餓)로 대변되는 자아 보존 본능의 두 갈래로 나누었다. 그러나 나중에 자아 보존 본능을 삶의 본능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그 대신 삶의 본능을 죽음의 본능과 나란히 놓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과 문학연구>

이렇듯 성적 본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성적 본능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에고와 이드」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구강 단계와 항문 단계를 거쳐 성기 단계 그러니까 대략 세 살에서 네 살 사이에 처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어머니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성적 욕망을 느끼는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적대자로 간주하기 일쑤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다음 어머니를 차지하는 환상을 갖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이 보이는 모든 반항은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부모, 특히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거부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아버지한테 성기를 거세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그 결과 점차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비로소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사랑의 삼각 관계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개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적잖이 악명 높은개념이기도 하다. 가령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멜러니 클라인,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자 펠릭스 가타리와 쥘 들뢰즈, 그리고 폴란드 태생의 영국 문화 인류학자 브로니슬로 말리노프스키와 같은 이론가들은 그 동안 이 이론을 신랄히 비판해왔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감정이 인간이 인성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큰 영향을 받는다. 정신분석의 존재 이유가 되는 신경 질환은 바로 이 감정을 잘못 다스린 탓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은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문학 연구에도 큰 영향을 끼쳐왔다. 문학 연구 방법론은 이 이론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문학 작품은 꿈과 같아서 명시적 내용과 함께 묵시적 내용을 지닌다. 바꾸어 말해서 문학 작품에는 꿈이 그러하듯이 표층 구조 밑에는 심층 구조가 깊이 숨어있다. 또한 문학 작품은 꿈처럼 작가와 독자의 정신이나 심리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작품의 심층 구조와 묵시적 내용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비평가는 마치 정신분석학적 기교를 가지고 신경 질환을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자처럼 수준 높은 감식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심리주의 비평가들이나 정신부석 비평가들을 흔히 정신분석학자에 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숨겨진 욕망, 특히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유아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술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의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예술을 꿈과는 다르지만 예술이 숨겨진 욕망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큰 설득력을 갖는 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러한 예술가상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플라톤은 일찍이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를 일종의 귀신들린 미치광이로 간주하였다. 그가 예술가들을 그렇게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