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언문일치」의 가장(仮装)
«1»
원래 언문일치라고 하는 것은「말(言)」을「글(文)」에 가깝게 만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글」을「말」에 가깝게 하기 위한 시도라고 한다. 규범성이 요구되는「글」과 시대의 부산물인「말」이 괴리하는 것은 숙명이라서 그 괴리가 임계점에 달했을 때「문」의 측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자기 개혁의 움직임을「언문일치」라고 칭해온 것이다. 설령「말하는 듯이 쓰는」것은 가능할지라도 구어 그 자체는 결코 문장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설에 있어서의「언문일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문체의 문제이고, 구어(話し言葉)인 것처럼 “가장 된” 문어(書き言葉)의 문제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말」과「글」이 일치한 예가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거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근접의 정도라고 말해도 좋다. 근대국가의 요청 하에 무엇을「일치」라고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교환된 암묵적 합의(의제)야 말로 바로 그 본질이었던 셈이다.
이 운동[1]이 일본어의 역사에서 공적으로 가장「말」과「글」의 괴리가 컸던 메이지 초기에, 일상회화가 갖는 대화적인 호흡을 문장에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특히)소설문체에 관련하는 이상, 사태는 반드시 그러한 방향으로 흐르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언표주체의 생생한 감성을 연출할 방도보다는 오히려 그 소거를 가장하고<「일찍이—거기에—있었다(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얼마나 재현(再現)적으로 나타낼까>라는 객관적인 세밀성을 표방한 제도로서 형성되어가게 됐던 것이다.
소설에 있어서 언문일치가 급속히 일반화 되어간 것은 메이지 30년대 후반[2] 무렵부터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자연주의 문학의 발흥(勃興)과도 거의 병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시기 이후, 언문일치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사실(写実)」과「묘사(描写)」의 두 단어가 키워드로써 얼굴을 내비치게 된다. 당시의 논의(議論)를 살펴보면, 언문일치체는 우선 일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고 평이(平明)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본래 구어는 대화 속에서 즉흥적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서술자의 판단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구어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논의 자체는 비정상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재현=표상(表象)」이라고 하는 환상을 토대로 하여 결과적으로는 “화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구어”를 이상(理想)으로 하는 매우 도착(倒錯)된 형태의 픽션적 이념이 소설에 강제되게 된 것이다.
이하부터는 구체적으로 언문일치체 소설에 있어서의 문말사(文末詞)「~た」에 주목하여 언문일치가 어떻게 정착해 갔는가 라는 관점[3]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た」의 정착을 생각하기 전에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 메이지 20년에 간행된 문부성편집국편찬『보통소학독본(尋常小学読本)』[4]이 달성한 역할이다. 전7권 중, 특히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제1권은 평이함을 염두에 두고 전편에 걸쳐 구어체가 사용되고 있다.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であります」조(調)이지만 여기에 더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た」로 끝맺는 형태가 부분적인 것을 포함하여 전34과 중 18과에나 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솝이야기를 모방한 제9과, 제17과와 옛날이야기(「桃太郎」)를 소재로 한 제26~28과이다. 예를 들어「桃太郎」는 <むかし、ぢゞ は、山 へ くさかり に ばゞ は、川 へ せんたく に 行きました。/ 川上 から 大き な 桃が 一つ、ながれて 来ました。> 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등장인물의 회화는「」로 구별된 현재시제, 다른 문(文)은 과거시제의「~た」로 통일되어있다.
오늘날에 비추어봤을 때 표준적으로 보이는 이 문체는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문학작품에 문말사「~た」를「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의 지표로써 의식적으로 사용한 대단히 이른 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야기 내용의 시간과 그것을 기술하는 현재가 확실히 구별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흐름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메이지20년대 이와야 사자나미(厳谷小波)[5]는『일본 옛날이야기(日本昔噺)』(전24편, 1894-1896, 博文館)을 통하여「むかしむかしあるところに~ました」라고 하는 이야기 형태(話形)를 문어로써 널리 정착 시켜 나갔던 것이다.
「첫머리에(はじめに)」에서도 밝혔듯이, 노구치 다케히코(野口武彦)[6]는 <いづれの御時にか>(『源氏物語』)[7], <今は昔>(『今昔物語』)등과 같은 모양새로 일본의 산문예술이 스스로 <作り物(虚構)>임을 가리키는 <허구기호>를—마치 악보 첫머리의 높은음자리표처럼—겸비해 온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근대소설은 작품세계를 일상적인 현실처럼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요청 때문에 직접 이러한 표식이 표면화 하는 일이 없지만, 노구치에 의하면 그 대신에 스스로 소설언어임을 나타내는 변별기호로써 문말사인「~た」를 기본시제로 내포(内蔵)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솝이야기나 옛날이야기처럼 전승성에 뒷받침 된 옛날이야기에 더 용이했을 허구성의 제시를 일상적 리얼리즘소설에 있어 얼마만큼 실현 가능할 것인지—이후 전개된 근대소설은 실로 이런 점을 둘러싼 시행착오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소설에 있어서「~た」의 정착에 크게 관여한 것이 이반 트루게네프의『사냥꾼의 수기』(1852)[8]를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번역한『あひゞき』(「国民之友」明21(1888) 7-8)[9]이다.
전편이 거의「~た」로 통일된 이 문체는 당시로는 아주 청신(清新)한[10] 것이었다. <일본어로 어떻게 저렇게 부드럽고 세심한 표현이 가능했을까>(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桜の実が熟する時』「世界文学」大3-7(1914-1918)), <세심한 서술법은 외국 문장의 특장점으로 일본 문장도 앞으로는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타야마 가타이(田山花袋)『東京の三十年』大6(1917), 博文館), <이런 문장도 쓰려고 하면 쓸 수 있구나. 이렇게나 세심하고 면밀히! 정확하게!>(타야마 가타이,『近代の小説』大12(1923), 「近代文明社」)등등, 후일 자연주의의「묘사」를 이끌어간 사람들은 젊은 날「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재현적으로 제시해 간 이 문체에 너나 할 것 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과 병행하여 이 시기에는 언문일치체 소설의 시도가 차례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야마다 비묘(山田美妙) 의『風琴調一節』(「いらつめ」明20(1887)),『武蔵野』(「読売新聞」明20(1887))을 비롯[11]하여 아직「~た」는 극히 부분적인 형태로밖에 쓰여지지 않았다.
당시 청신한 언문일치체 소설로 정평이 났던 야마다 비묘의『蝴蝶』(「国民之友」明22(1889))의 한 구절에 그려지는 풍경은 어느 한 지점—『あひゞき』의 경우에는 숲 속에 앉아 나뭇가지 끝을 보고 있는 지점—으로부터의 원근법이 아니라 파노라마식으로, 본 것을 순차적으로 실황중계 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나친(過剰な) 비유를 채택하고 있는 그 서술은 언문일치의 묘사 방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공연하게 비묘가 가진 한계라고 취급되는 일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사태는 늘 방패의 양면으로부터 성립된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です」「~ます」라는 경어체는「~た」「~である」보다도 회화체에 근접해 있고, <前回に見えた蝴蝶といふ少女です><実に~思ひましやう>라는 문어를 통해 봤을 때도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항상 수신자(受け手)에게 보내는 구체적인 응답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은 화자, 청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구어체에 의해 소설을 구성해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그 후에 전개된 언문일치체 소설은 항상 이 양방(両方)의 요청, 즉「~た」에 의해 완결된 세계를 구축해 가는 방향과 실황중계적인 현재형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가는 방향—「그리는 것(描く)」과「말하는 것(語る)」—과의 갈등 속에서 전개되게 된다. 문말사「~た」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는 방금 전에 언급했던 노구치 타케히코 외에 야나부 아키라(柳父章)[12],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13]과 같은 이들에 의해서도 논의가 축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야나부는 서양어의 과거형에 해당하는 번역에 완료의 조동사「~た」를 대응시킨 의미를 인정하는 한편, 기존(在来)의 의미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차이(ズレ)를 떠안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서술(話)은 화자(話し手)로부터 독립한 객관적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상황(事柄)에 대한 화자의 확인판단>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화자의 판단 유무는 이후에도 논의된 바가 있으나, 아무래도 이러한 논점에는『あひゞき』가 일인칭 회상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작나무 숲 속의 젊은 남녀가 밀회하는 모습을 목격한 체험담으로 서술되는(語られる) 이 소설은 집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여자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감개(感慨)를 시점으로 끝맺어지고 있다. 즉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던 실황중계적인 시점—밀회를 목격하고 있던 당시의<자신>—과 또다시 그것을 외부 프레임(外枠)으로부터 회상하고 있는「~た」의 세계—이야기(物語)를 통괄하는 시점—가 적어도『あひゞき』에서 만큼은 훌륭하게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얼굴이 보이는 일인칭회상형식을 취함으로써 비로소『あひゞき』는 스스로의 견문(見聞)을「~た」의 시공간 속으로 가둘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た」의 “발견”은 동시에 연작 중이던(書き継がれていた) 언문일치 소설의 시작(試作)인『浮雲』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전장에서 서술했듯이『浮雲』의 제3편(「都の花」明22(1889)7~8)에서는 제1편(明20(1887)6, 金捲堂)의 장면내재적인 시점, 또는 제2편(明21(1888)2, 金捲堂)[14]의 주인공 분조(文三)에 밀착한 시점으로부터 서서히 이탈하여 객관적, 전지적인 시점을 지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각 인물의 심리를 설명하며 <人事で無い。お勢も悪かッたが、文三もよろしく無かッた>(제16회) 라는 내래이션(物言い)이 상징하듯이 문말사「~た」가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이행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제3편에 이르는 과정에서 확실히「~た」의 사용빈도가 잦아졌으며 거기에는 분명히 동시에 번역되고 있던『あひゞき』의 영향이 있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あひゞき』의 성과가 반드시『浮雲』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인칭회상체였던『あひゞき』와는 달리, 전지적 객관성을 지향한『浮雲』제3편의 경우는 공교롭게도「~た」의 증가에 보조를 맞추듯, 장면내재적 감성이 그 정채(精彩)를 잃고 말았다.「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재현적으로 제시하려고 한 지향과, 장면에서「함께 호흡하려는(ともに―生きる)」것을 지향한 당사자의 시선(まなざし). 아마도 이 양자는 항상 서로를 배반할 숙명인 탓에『浮雲』는 결국 시행착오를 거듭한 채 중절되고 만 것이다.
「~た」에 관해서는 미타니 구니아키(三谷邦明)[15]와 노구치 다케히코가 이 문말을 인칭적세계와의 관계에서 논하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예를 들면, 미타니는「彼は~した」라는 표현은 본래 추정 없이는 사용할 리가 없다고 하며 일인칭에서 사용되어야 할「~た」를 삼인칭으로 사용한 점에서 근대소설의 성립요건을 평가하고 있다. 독자가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일인칭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た」를 삼인칭으로 사용했기 때문이고, 거기서는 삼인칭과 일인칭, 등장인물의 개념(노구치는 기존의 죠루리(浄瑠璃)에서의「초월적일인칭」등을 예시로 들었다)이 근대소설에 정착한「~た」를 기점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한편 이것과 별개로「~た」가 가지는 의의를 과거시제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후지이 사다카즈(藤井貞和)[16]다. 후지이는『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시점(はじめ)으로 하는 서술문학은 원래 <비과거>의 문체로부터 발생하는 임장감을 본지(本旨)로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근대소설이 언문일치에 의해서 비로소 과거시제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경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게다가 야나부와 미타니가 모두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17]의 설을 근거로「~た」에는「문제상황에 대한 화자의 인식판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점을 비판하며「~た」라는 과거 감각이 전국적으로 긴 시대에 걸쳐 자라났다는 경위를 검증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논의들로부터 부각되는 것은 언표주체의 감성이나 판단이 문말사「~た」가 과연 어디까지 관계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약간의 예측을 말해두자면, 근대소설은 그「재현=표상」이라는 환상에 의해 “화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구어”를 선택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서「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제시하는 데에 힘쓰면 쓸수록 반대로 ‘그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암묵적으로 유발되게 되는 역설을 떠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노구치 타케히코는 다니자키 쥰이치로(谷崎純一郎)의『近代口語文の欠点について』(「改造」昭4(1929) 11)을 예로「~た」는 <중립적인 언어공간을 존립시키기 위한「삼인칭」의 형태표시>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のである」[18]를 붙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유는 <언어공간에 있어서의 삼인칭성과 발화행위가 소거된 일인칭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미묘한, 이른바 위험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상술로 소개한 많은 논의들이 객관성을 나타내는 표식「~た」의 배후에 있는 모종의(種の) 주관 표출을 감지하는 것은 역시 거기에 삼인칭적인 세계와 일인치적인 세계가 서로 상충(せめぎ合い)—한쪽 편이 다른 한쪽 편을 끌어내고, 불러내는 갈등—하며 내재하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과연 객관성을 명확히 주장하며 장면에 내재하는 관점으로 실황중계를 해가는 것이 얼마나 가능했던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정보의 송신자(送り手)와 수신자(受け手)사이의 관계를 어디까지 서술에 표출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언문일치를 시도함에 있어 가장 고심했던 것 중 하나가 서술자(書き手)와 독자(読み手)사이의 대우관계로 그가 ‘경어 생략이 독자에 대한 결례는 아닐까’라는 걱정을 안고 있었던 것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余が言文一致の由来』「文章世界」明39(1906)·5). 일반적으로 소설의 문체에는 그곳에 상정된 청자(독자)의 존재—이인칭적인 세계—가 어디까지 서술에 현재화(顕在化)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수(指数)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오히려 이것을 제로에 가깝게 하는 것에「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의 재현적인 제시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면, 반대로 그 지수를 높여 독자에게 말을 걸며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려고 하는(現場を共に生きようとする) 언문일치 형태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그 편이 청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 대화에서 호흡을 살려가는 식의 보다「말」에 가까운 문체를 창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표주체의 감성이나 판단에 관해서는 스즈키 사다미(鈴木貞美)[19]의 논도 주목할만하다. 스즈키는 앞에 나온 후지이의 견해를 근거로 하면서 그 예로써 구니키타 돗포의『武蔵野』(「国民之友」明31(1898)1~2)에 나오는「~た」는 <눈 앞에 있는 광경의 변화를 신선한 것으로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을 나타내는 완료의「~た」였던>것은 아니었을까 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그 지적의 배경은 ’「~た」가 서양어의 과거시제에 반드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독자적 세계 개척에 말미암은 판단일 것이다.
돗포의『武蔵野』의 작중에는 사실『あひゞき』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길잡이(手引き)로 새로운 풍경을 획득해가는 프로세스가 1편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문이「~た」로 끝맺어지고 있는 곳은 극히 적다는 점에 주의하고자 한다.
돗포의 서술 속에는 화자로 상정된 <君>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한 <君>를 부르는 것을 통해 독자는 “武蔵野”라는 인위와 자연이 융합한 새로운 공통체에 갇히게 된다. 그 점에 대해 지적하자면, 이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삼인칭적 세계보다도 오히려 이인칭적세계—「君」에 대한 부름(呼びかけ)—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武蔵野』와 본보기로 쓰였을『あひゞき』사이의 거리는 사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あひゞき』를 인용하는 것으로 인해 일인칭에서나 보여줄 수 있는 원근법적 세계를 덧그리며 결과적으로는 대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화세계가 성립되어 버려진 결과에 대하여, 이러한 언표주체와 작중에 내포된 독자 사이에 교환되는 살아있는 ‘응답관계’에 그 뒤에 출현한 자연주의 이후 소설이 잃어버린 응당 있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가능성이 숨어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3»
<단순히 작자의 주관을 더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객관의 사실 및 현상(事象)에 대해서도 전혀 그 내부에 개입하지 않으며, 또한 인물의 내부정신에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다야마 가타이의「평면묘사」[20]의 주장(『「生」に於ける試み』「早稲田文学」明41(1908) 9)은 작자자신의 대담한 “고백”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지만, 실제로는 화자의 주관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었던 데다가, 문말사 또한「~た」를 중심으로 한 제삼자적 객관성으로 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억제하면 할수록 그 균열점(裂け目) 또한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인용문 끝부분부터는 화자가 도키오(時雄)를 암묵적으로 변호하려는 뉘앙스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독자는 이러한 판단을 상대화 해가는 작업 또한 가능해지는 것이다(제2부 제3장 참조). 이렇듯 어떤 식으로 객관적인 입장을 가장한다 하더라도 언표주체의 판단, 평가를 제로로 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연주의 진영의 묘사론에 있어서 몇 번씩이나 걸쳐「주관」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가타가미 덴겐(片上天弦)[21]이『자연주의의 주관적 요소』(「早稲田文学」明43(1910) 4)에서 <자연주의는 주관의 동요와 고민을 그 근저정신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주관의 동요와 고민에 대한 만족을 얻을 정도의 힘있는 인생관에 기반하지 않는 이상, 물질적 인생관에 기초한 객관본위(客観本位)의 문학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조잡한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주관적 요소는 자연주의문학의 근본으로써 가장 중요한 요소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꽤 기이하게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과학적 실증정신에 뒷받침된 내추럴리즘 본래의 이념과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정확하게」라는 덕목으로 치환되어 ‘고백=사소설’이라는 길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문학사의 구조적 결함으로 공공연하게 지적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낭만주의문학이 발달하지 않은 채로 자연주의를 수용한 탓에 고백적인 요소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말았다고 하는 ‘일본 근대의 “미성숙”’이라는 비판의 패턴도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서술했던 관점에 비추어보면, 장면에 내재적으로「말하는 것(語ること)」과 외재적인 시점으로「그리는 것(描くこと)」사이를 ‘얼마만큼 절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사태의 본질이 숨겨져 있던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22]는『문예상의 자연주의』(「早稲田文学」明41(1908) 1)에서 다음과 같은 표를 제시하고 있다.
— 주관삽입적 — 설명적 — 인상파 자연주의 — 적극적 태도 —
<본래 자연주의>에 대해 <주관삽입적> <설명적>이라고 하는 개념이 설정된 사실은 상징적인 것으로서 방금 전까지의 문맥에 따르면 대화적, 실황중계적인 서술자의 판단을 서술로 ‘얼마만큼 집어 넣을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이 역시 그 배후에 남아있는(揺曳) 것처럼 생각된다. 「~た」세계를 기본으로 장면에 내재하는 시점에 어떻게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さりげなく)” 삽입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언문일치체 소설의「사실」의 성패가 달려있었던 것이다.
자연주의의 본격화에 앞서, 독자적인 언문일치체를 실천했던 계보로「사생문(写生文)」[23]이 있다.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사생」의 제창을 하이쿠(俳句), 단가로 실천하고, 후에 이것을 산문에 적용하며 메이지30년대 전반에 사생문운동을 일으켰다. 시키의 사후, 다카하마 교시(高浜虚子)[24]가 하이쿠 잡지인「ホトトギス」를 무대로 언문일치체 소설을 실천해 나갔으나, 그 특징은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개척한 문말사「~た」를 제거하여 현재진행형을 사용하고,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배열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현장의 시점만을 특화 하려 하면, 역으로 소설의 시간구성이 기술적으로 곤란하게 되기도 한다. 설령 줄거리에 환원할 수 있는 이야기내용이 동일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야기 하는 순서가 바뀌게 되면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고민이야말로 소설 플롯이 담당할 역할인 것이며, 적어도 사생문적 실황중계로 장편소설을 구성하기는 아주 어렵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세키는 교시가 추천 해준대로 사생문의 일환이 되는 소설 데뷔작『吾輩は猫である』를「ホトトギス」에 게재했는데(明38(1905) 1~明39(1906) 8),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양이의 눈을 빌린 실황중계를 담은 이 작품에는「~た」가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 고양이를 통해 보이는 세계가 보이는 그대로, 현재형 시제로 이야기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장편소설의 통괄적 시점을 명확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연재도중 고양이에게 <독심술>을 할 수 있게 하여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등(9), 이러저러한 궁리를 더해가게 된다. 당초의 예정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요청에 응해서『吾輩は猫である』가 장편화 된 프로세스는 언문일치체의 실황중계 시점과 통괄적 서술의 시점을 어떤 식으로 절충시켜 갈 것인지에 대한 시행착오의 실천이 되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아울러, 사생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소세키의 초기작품『草枕』(「新小説」明39(1906) 9)의 서두 부근에 한 구절을 참조해보면 역시「~た」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중에서 화가는 등장인물인데도 오히려 <비인정(非人情)>을 표방하며, 히로인인 나미(那美)에게 방관적인 행동을 관철하고 있다. <평범한 소설가들처럼 제멋대로 근본을 찾아 심리작용으로 들락날락하거나, 인간갈등을 새삼스럽게 자꾸 문제 삼는 행위를 하게 되면 속되어 진다>라는 언문은 어떤 의미로는 상술한 다야마 가타이의「평면묘사」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蒲団』의 주인공이「소설가」로서의 자기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草枕』에서는 화가가 <비인정>을 표방하는 것을 담보로 해서 객관적 시점과 당사자 시점 사이의 굴절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술은 시종일관 사생문적 실황중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으며 문말사「~た」역시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화가가 결국「그림」을 작중에서 완성시키지 못한 채로 끝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황중계적인「사생문」그 자체는 결국「소설」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우의를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인정>을 관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중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괄하는 주체여야만 한다. 중편소설 이상의 구성으로는 아무래도 역시「~た」로 표상되는 통괄적인 시점이 필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소세키가 장편소설에서「~た」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三四郎』(「東京朝日新聞」明41(1908))부터다. 주인공 산시로가 상경한 직후의 장면의 문말만을 주목해보면 과거의「~た」로 끝나고 있는 경우와 현재형으로 끝나고 있는 경우가 거의 반반으로, ‘산시로의 눈에 도쿄가 어떻게 보이는가’ 라는 장면에 입각한 시점과 ‘산시로가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라는 결과적 통괄이 혼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형과 과거형이 번갈아 등장하는, 생각해보면 몹시 기묘한 이 “혼교기술(混交技術)”은 그 뒤에 나온 언문일치체 소설에 하나의 양식으로 제시되었으나, 소세키의 경우에는『それから』(「朝日新聞」明42(1909)),『門』(「東京朝日新聞」明43(1910))과 장편소설을 연재해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현재형은 줄고, 압도적인 비율로 문말에「~た」가 늘어나게 되었다. 대신에 이것은 현장에 있는 당사자의 시점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소세키는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를 큰 폭으로 늘림으로써 임장감을 연출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세키의 경우,「~た」의 증가와「 」에 의한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증가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두 요소가 칼로 자른 듯 분리되어 가는 것이 과연 서술의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보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분리가 진행되면 될수록 등장인물은 독자로부터도, 화자로부터도 독립해 멀어져 가는 숙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 사실은『行人』(「朝日新聞」大元(1912)~大2(1913)),『草枕』(「朝日新聞」大4(1915)),『明暗』(「朝日新聞」大5(1916))로 나아감에 따라 주인공들이「개(個)」의 폐쇄(閉塞)상황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내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4»
메이지40년대부터 다이쇼 초기에 걸쳐 언문일치문체는「~た」가 우세한 형태로 전개되어 갔으나, 그 큰 추진력이 되는 것이 백화파 작가들이 즐겨 사용한 일인칭이었다. 그들은「自分」을 주어로 하여 문장의 종지를거의「~た」로 통일하는 형태를 일반화하였고 이것이 이후에 언문일치체의 표준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의『お目出たき人』(明44(1911) 2)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한 구절의 경우를 놓고 봤을 때, 거의 초등학생의 작문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러한 문체를 이쿠다 죠코(生田長江)[25]가 자연주의가 악전고투 끝에 획득한「묘사」이전의 치졸한 문체라고 매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묘사논의의 축적에 의해 모처럼 고심해서 만들었을 암묵적인 합의—삼인칭적인 세계 제시와 일인칭적 판단과의 절충—가 <自分>의 주관을 전면적으로 표출해버리는 것으로 아주 간단히 무너져버릴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의해서 유심히 읽어보면 백화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自分>은 예를 들면, 예전의 돗포의『武蔵野』의 <自分>과 비교했을 때 같은 일인칭이라도 크게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무샤노코지나 시가 나오야가 사용한 <自分>은 독자를 부르거나 스스로 서술내용의 해설을 시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서술자가 사정한 독자의 존재의 지수는 매우 낮다. 거기에서 그리는「현재」의 판단은 가능한 한 억제되어 있는데 그것이 <自分>을 내세우는 강한 주관과, 「~た」로 끝나는「かつて―そこに―あった」객관세계 제시와의 기묘한 동거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 나오야의 초기 일인칭소설인『網走まで』(「白樺」明43(1910) 4)의 경우에도 草橋와 비교해보면 완성된 원고에서는 집필시의 현재 판단이 꼼꼼히 제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시도했던 것은 서술의 현재를 굳이 바깥으로 내지 않은 채「自分は~した」라는 종지형을 사용함으로써「그 당시의 현재(其時の現在)」(『大津順吉』「中央公論」大元(1912) 9)에 밀착하여「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연출해가려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백화파는 서술자의 주관을 전면으로 표출하는 문체를 확립했다고 하는데, 독자를 직접 부르는 것을 삼가려는 억제가 일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종일관 자기가 자기에게만 보고하는「혼잣말」과 같은 구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이쇼기 후반에는 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의 대립이 의미를 잃고 문단은 곧 시가 나오야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는 구어에서 대화적 요소를 제거한 독백체형식이 정착하고,「묘사」에 관한 최대공약수적 합의가 형성되어가는 과정과도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굳이 반복해 말하자면 억제하면 할수록,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 역시 다시금 부상하게 된다. 방금 상술 한 듯이 소설 문체에는 거기 상정된 청자(독자)의 존재—이인칭적 세계—가 어디까지 서술에 혼재해 있는가 하는 지수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되며 오히려 이것을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데에 하나의 이념이 있다고 한다면 응당 그 역 또한 성립될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우노 고지(宇野浩二)[26]의『蔵の中』(「文学世界」大8(1919) 4)[27]에는 <이야기의 앞 뒤가 뒤바뀌어서 종종 기로(岐路)에 들어서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저의 끝 없는 이야기를 여러분 머리로 적당히 분별해 알아들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야기의 전후가 뒤바뀝니다, 기로에 들어섭니다, 라기보다는 당치도 않은 곳으로 튑니다. 부디 자유롭게 취사(取捨)하고 안배(按排)하여 들어주십시오>같은 형태로 실제로는 묵독(黙読)하고 있을 독자에게「이야기(話し)—듣는다(聞く)」의 장(場)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끔 연출해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 내용에는「~ました」를 이용하여 독자를 부르는「~ます」를 꽤 명확히 가려 쓰고 있는데 이러한 부름에 의해 역으로 이야기내용으로써 봉인되었을 세계가 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결과를 남기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른바「~た」로 표상되는 세계와의 분쟁(争い)과정 그 자체가「말」의 호흡의 재생으로 이어지는 매우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백화파에 의해 하나의 극단적 정형이 완성되었기에 비로소 이러한 안티테제 또한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와야 사자나미의『日本昔噺』에는「~ました」와 거의 같은 횟수만큼「~ましたとさ」라는 구승문예적 문말표현이 사용되고 있었다. 역으로「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의 제시와 이러한 가장을 일깨우는 독자와의 응답관계—아마도 거기에는「묘사」와「서술」과의 영원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가역적 왕복운동에 시선을 집중해보는 것으로 각각의 소설이 어떤 시공간을 구축하려고 했는지가 부각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텍스트】
安藤宏,『近代小説の表現機構』, 岩波書店, 2012
【단행본】
스즈키 사다미, 김채수 역,『일본문학의 개념』, 보고사, 2001
김채수 편,『韓國과 日本의 近代言文一致體 形成過程』, 보고사, 2002
스즈키 토미, 한일문학연구회 역,『이야기된 자기』, 생각의 나무, 2004
【논문】
井上敏夫,「国語教科書の変遷」,『国語教育科学講座 国語教材研究論』第5巻, 全国大学国語教育学会編 , 1958
[1] 일본에서의 언문일치운동은 서양서적들을 번역해 가다가 언문일치화 된 서구어 문장들의 장점을 발견한 난학자(蘭学者)들에 의해, 이미 18세기 말부터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그것은 메이지 혁명 직전에 양학자에 의한「한자폐지」를 발단으로 하여, 근대 서구의 계몽사상과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해 속문운동으로 전개되어 나왔다. 계몽사상가들의 그러한 속문운동은 정치, 사회계에서의 1880년대 전반기의 민권운동, 1880년대 후반기의 서구화 운동의 물결을 타고 전개되어 나갔고 1890년대 말에 와서는 정치사회계에서의 사회주의 운동과 교육계에서의 국어운동, 1900년초 년대 후반에 와서는 문학계에서의 사생문운동과 자연주의 운동, 1910년대에 와서는 정치사회계에서의 자유, 개성주의에 입각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물결 등을 타고 전개되어 나갔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언문일치운동의 실상과 그 의미」, 김채수 편,『韓國과 日本의 近代言文一致體 形成過程』, 보고사, 2002, p.55참조)
[2] 메이지 30년은 서기 1897년, 메이지 36년~39년을 후반으로 본다면 1903~1906년을 가리킨다.
[3] 일본어에 있어서 근대 문체의 본질은「과거라는 시제를, 서술 상에 우세하게 취급하는 움직임」이고,「과거의 시제를 문말에 오게 하는 문체의 채용」이었다. 즉 문말어「~た」의 사용여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김채수, 위의 책, p.154 참조)
[4] 『尋常小学読本』(じんじょう・しょうがく・とくほん), 7권, 1887(明20) (尋常[명/형동] (1)특별하지 않으며, 보통인 것. 또는 그런 모양. 당연한 것. (goo辞書, 검색일 : 2015. 07. 22))
이노우에 토시오(井上敏夫)는「국어교과서의 변천(国語教科書の変遷)」(『国語教育科学講座 国語教材研究論』第5巻, 全国大学国語教育学会編, 1958)에서 1872년(메이지5)「학제(学制)」반포로부터 태평양 전쟁 후까지의 소학교국어교과서를 모두 1기~4기*로 구분하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보통소학독본』은 분류 중 2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래는 학년마다 제 각각 편찬되었던 교과서를 소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아동의 능력에 맞추어 평이한 레벨에서부터 어려운 레벨로 교재의 배열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다종다양한 교재를 구어체(담화체)에 의해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한편, 교재의 대부분은 도덕(修身), 지리, 역사로 충효, 근면, 입신 등의 덕목을 설파했던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시기에 민간 발행된 국어교과서로서 보통과목 용으로 평가가 높았던 것은 다음과 같다.
(1)学海指針社編集『帝国読本』8冊 集英堂 1892(明25)
(2)坪内雄蔵(逍遥)『国語読本』8冊 富山房 1900(明33)
(3)金港堂書籍編輯『尋常国語読本』8冊 金港堂 1900(明33)
특히 츠보우지 쇼요(坪内逍遥)가 쓴『국어독본(国語読本)』(고등소학교용, 각 8권)은 구어문을 중시하여 문장표현에서도 뛰어났다.
* 이노우에 토시오에 따른 교과서 변천의 시대구분
<1기 : 자유편찬시대> 1872년(明5)의「学制」반포로부터 1885년(明18)까지
<2기 : 검정제도시대> 1886년(明19)의「教科用図書検定条例」제정으로부터 1903년(明36)까지
<3기 : 국정교과서시대> 1904년(明37)「小学校令」개정에 의한 국정교과서제도 실시부터 1948년(昭23)의 교과서검정제도의 실시까지
<4기 : 신(新)검정제도시대> 1949년(昭24)부터 신(新)검정교과서사용의시대 중간에 3개의 국정교과서시대는 다음과 같은 6기로 다시 구분된다.
-제1기 : 국정교과서『尋常小学読本』(「イエスシ」読本)8冊 1904(明37)
-제2기 : 국정교과서『尋常小学読本』(「ハタタコ」読本)12冊 1910(明43)
-제3기 : 국정교과서『尋常小学読本』・『尋常 小学国語読本』(「ハナハト」読本)各12冊 1918 (大7)
-제4기 : 국정교과서『小学国語読本』(「サクラ」読本)12冊 1933(昭8)
-제5기 : 국정교과서『ヨミカタ』・『コトバノオケイコ』・『初等科国語』他(「アサヒ」読 本)16冊 1941(쇼와16)
-제6기 : 국정교과서『こくご』『国語』(「みんないいこ」読本)15冊 1947(昭22)
여기에는 배(排)언문일치회와 같은 반대도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일치냐, 아니냐 하는 논의에서 나아가 새로운 문체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라는 취지에서 구어법에 관한 전국적인 조사가 시행되어(1903), 국정최초의『보통소학독본』에는 구어문이 확실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1904). 문예 면에서도 점차 문어로 된 문장을 줄이고 특히 러일전쟁 후에는 자연주의문학이 성행하면서 그 경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世界大百科事典」내의『尋常小学読本』에 관한 언급, (kotobank, 검색일 : 2015. 07. 22))
[5] 메이지~다이쇼 시대에 걸쳐 작가, 아동문학자,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작품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편집하는 博文館에서 발행하는 잡지「소년세계(少年世界)」에 게재되었다. 이후 같은 잡지사의「유년세계(幼年世界)」「소녀세계(少女世界)」「유년화보(幼年画報)」등의 주필(主筆)로서 작품을 집필하며「일본 옛날이야기」(1894-96)「세계 동화(世界お伽噺)」(1899-1908)등 대부분의 시리즈를 간행하였다. 오늘날 유명한『모모타로』『꽃 피우는 할아버지(花咲爺)』*등의 민화와 영웅담 다수는 그의 손에서 다시 쓰여져 어린 독자에게 읽혔는데 이는 일본 근대 아동 문학의 개척자라고도 불릴 말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꽃 피우는 할아버지』: 일본의 전래동화. 착한 노부부와 욕심꾸러기 이웃집 부부가 신기한 힘을 가진 개를 매개로 하여 전자는 행복해지고 후자는 불행해진다는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줄거리 ) 노부부가 작은 개 한 마리를 주워서 자식같이 귀여워하며 길렀다. 어느 날 개가 밭의 땅을 파며 "여기 파라 멍멍" 하고 짖기 시작하고, 놀란 노인이 쟁기로 밭을 파 보니 금은보화가 나왔다. 이를 부러워한 이웃집 부부는 억지로 개를 데려가 보물을 파라고 학대한다. 하지만 개가 가리킨 곳에서 나온 건 오물(혹은 지네, 두꺼비 같은 것) 뿐이었고, 화가 난 이웃집 부부는 개를 쟁기로 때려 죽이고 만다.
자식 같은 개를 잃고 슬픔에 잠긴 부부는 마당에 죽은 개의 무덤을 만들어 묻는다. 그리고 비바람으로부터 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옆에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는 금새 큰 나무로 자라났다. 어느 날 개가 꿈에 나타나 그 나무를 베어 절구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조언대로 절구를 만들어 떡을 치자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옆집 부부가 트집을 잡아 절구를 빼앗아 와 똑같이 떡을 치지만, 보물 대신에 오물만 쏟아져 나온다. 격노한 옆집 부부는 도끼로 절구를 부숴서 장작으로 써 버린다.
노부부는 절구가 타고 남은 재를 받아와서 소중히 공양하려고 하는데, 다시 개가 꿈에 나타나서 재를 마른 벚나무에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 말대로 했더니 마른 벚나무에 꽃이 피어났고 마침 지나가던 영주가 감동해 노인을 칭찬하며 상을 주었다. 이를 본 옆집 부부가 마찬가지로 이를 따라 하지만 꽃이 피기는커녕 영주의 눈에 재가 들어갔고, 욕심꾸러기 이웃집 부부는 무례를 범한 죄로 벌을 받게 된다.
[6] のぐち たけひこ(1937.6.28-). 도쿄출신의 문예평론가, 국문학자, 고베대학(神戸大学)명예교수.
[7] [いずれのおおんときにか]. 출전은 겐지모노가타리의 1권인 기리쓰보(桐壷). 현대어로 번역하면「どの帝(みかど)の御代であったろうか」(어느 천황의 치세였던가)
[8]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 제국주의 귀족이자 사실주의 소설가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레프 톨스토이와 나란히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문호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하다.『사냥꾼의 수기』(1852)로 유명해졌다.
아버지는 기병 장교로서 방탕과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고는, 재산이 탐나서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6세나 연상인 부유한 여지주(女地主)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추한 용모에다 포악한 전제군주적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는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 대한 동정에서 농노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1841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수렵을 즐겼다. 후일《문학적 회상》(1869)에서 농노제라는 ‘적’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서유럽에 도피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847년《동시대인(同時代人)》지(誌) 제1호에 농노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작《사냥꾼의 수기(手記) Zapiski okhotnika》의 제1작이 발표되었으며, 1852년 8월에는《사냥꾼의 수기》가 출판되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후타바테이 시메이에 의해 번역 및 소개되었으며, 특히 쿠니키타 돗포(国木田独歩)나 다야마 카타이(田山花袋)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9]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번역소설. 메이지21(1888)에 발표되었다. 트루게네프의『사냥꾼의 수기』의 1절을 직역(逐語)한 것(즉, 부분역)으로 러시아 문학소개의 선구작(先駆作)으로 일컫어진다.
[10] [형용사] 맑고 산뜻하다.
[11] やまだ びみょう(1868년(게이오4)-1910년(메이지43)). 일본의 소설가·시인·평론가. 언문일치 단체 및 신체시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와 겐유샤(硯友社)를 조직하고 언문일치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메이지39년 11월「中学世界」정기증간「作文叢話」호 중,「明治文学の揺籃時代」와 메이지40년 10월「文章世界」제2권 제11호 정기증간「文話詩話」호 중「言文一致の犠牲」에 의하면, 야마다 비묘는 영문학사에서 본 チョーサー와, 모즈메 타카미(物集高見, 국학자)「言文一致」및「RŌMAJI ZASSHI」메이지20년 5월호의 체임벌린(チェンバレン)의「GEM-BUN ITCHI」의 영향을 받아, 언문일치체를 지향하였다고 한다. 야마다 비묘는 제 1작인 메이지19년 11월~20년 7월의「嘲戒小説天狗」이후,「風琴調一節」,「ふくさづつみ」,「武蔵野」,「花の茨、茨の花」,「夏木立」에서「~だ」조(調)의 언문일치체 소설을 발표하여「武蔵野」때 유명해졌다.「風琴調一節」의 작중에는 언문일치체로 쓰인 시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을 선구로 하여 21년 1월에는 언문일치체로 쓴 3편의 시「初春の湖」「はるのあけぼの」「明治二十一年の新年に又俗語体で」를 발표하였고, 시에 있어서의 언문일치에 선참하였다. 동년 2, 3월에「言文一致論概略」을 내며 언문일치 옹호를 주창하였다.
[12] やなぶ あきら(1928.6.12-). 번역어 연구자, 비교문화론 연구자.
[13] からたに こうじん(1941.8.6-). 일본의 철학자, 사상가, 문학자, 문예평론가. 가라타니는『日本近代文学の起源』(講談社、1980 / 講談社文芸文庫、1988 / 岩波現代文庫、2008)에서 구니키타 돗포의 작품을 통해 메이지20년대에 일어난 언문일치 운동을「風景の発見」으로 논한 바 있다.
[14] 『浮雲』는 전부 세 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과 제2편은 제목을「新編 浮雲」저자명을「坪内雄蔵(つぼうち・ゆうぞう)」로 한 단행본의 형태로 金港堂에서 각각 1887년 6월과 1888년 2월에 발간되었다. 제3편은 같은 金港堂에서 발행되는 문예잡지『都の花』의 제18호, 19호, 20호, 21호에, 1889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걸쳐 실렸다. 분량으로는 제2편이 가장 많고 다음이 제1편 그 다음이 제3편의 순이다. 각 편은 각각 여러 개의 회(回)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편은 제1회에서 제6회까지의 6회, 제2편은 제7회에서 제12회까지의 6회, 제3편은 제13회에서 제19회까지의 7회로 되어 있다. 전 19회 중에 제12회까지는 각 회의 첫머리에 그 ‘회’의 내용을 시사하는 소제목이 있지만, 제13회부터는 단지 회수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15] みたに くにあき(1941-2007). 일본의 국문학자. 요코하마시립대학(横浜市立大学) 명예교수. 전공은 중고문학.
[16] ふじい さだかず(1942.4.27-). 일본의 시인. 일본문학자. 도쿄대학 명예교수. 문학박사(1992).
[17] ときえだ もとき(1900-1967). 일본의 국어학자. 문학박사. 메이지 이전의 국어학사의 검토와 서양언어학의 비판을 가하며 언어과정설이라고 불리는 독자적 학설을 건설하며 국어학 분야에 새로운 전개를 가져왔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형성한 국어학은 도키에다 국어학으로 유명하며, 여기에 근거한 문법이론은 도키에다 문법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학교육을 바탕으로 국어교육의 진흥 및 전후 국어학계의 재건에도 힘썼다는 것이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도키에다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의 보급에도 관여했으며, 황국신민화 정책 시기에는 한국 강제 병합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대사실의 완성을 명목으로 조선어 완전 폐기와 일본어 모국화를 요구하며, 그 구체적인 방책으로 조선 여성을 중점적으로 교육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8] 스기모토 쓰토무(杉本つとむ)에 의하면「である」는 16세기경에 교토인들의 구어였다. 그런데 18~19세기에 중국의 고전, 서구의 화란서적 등이 일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문장어로 정착되어 나왔다. 그런데 메이지의 언문일치주의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문장어로 가져다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메이지의 언문일치주의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문장어로 가져다 썼던 이유는 무엇인가. (중략) 그들이 목표로 설정했던 근대구어체 문장이란 전근대 문어체가 근대 구어 문장체로 전환해 나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담화체의 형식으로부터 탈피해 나옴으로써 모든 인격체들로부터 해방되어 필자로서 취할 수 있는 고유의 위치에서 쓰여진 문장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언문일치체문장으로서의「である」조 문장은 근대 구어체로서 완성된 문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이란 필자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경우 독자들은 왕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고, 서민들일 수도 있다. 노인들일 수도 있고, 어린이들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러한 자기의 모든 독자들에 대하여 평등하고, 동등한 입장을 취할 수가 있다. (김채수, 위의 책, p.40참조)
[19] すずき さだみ(1947.9.22-). 남성. 일본근대문학연구자.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통합연구대학원대학 명예교수. 무라사키시키부문학상 선고(選考)위원.
[20] 작자의 주관을 섞지 않고 대상이나 사건과정의 표면만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문예상의 기법. 메이지40년대 다야마 가타이가 주장.
[21] かたかみ てんげん(1884-1928). 일본의 문예평론가, 러시아 문학자. 1900년에 도쿄 전문 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당시의 자연주의문학의 발흥에 즈음하여 자연주의문학에 심취하였다. 졸업 후에는『早稲田文学』에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평론을 많이 발표했다.
[22] しまむら ほうげつ(1871-1918). 일본의 문예평론가, 연출가, 극작가, 소설가, 시인. 신극(유럽식 근대적 연극을 목표로 했던 일본의 연극)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23] 사생문은 사생(스케치)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던 글. 메이지 중기 서양 회화에서 유래한 "사생"의 개념을 응용해서 하이쿠, 단가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마사오카 시키가 같은 방법을 산문에도 적용하고 설파한 것으로,『ホトトギス』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근대 일본어에 의한 산문 창출에 큰 역할을 맡았다.
[24] たかはま きょし(1874-1959). 시인, 소설가.『ホトトギス』의 이념이 되는「객관사생(客観写生)」,「화조풍영(花鳥諷詠)」을 제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5] いくた ちょうこう(1882-1936). 평론가, 번역가, 극작가, 소설가.
[26] うの こうじ(1891-1961). 일본의 소설가, 작가.
[27] 지카마쓰 슈코(近松秋江, 1876-1944,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의 삽화(여자를 밝히고, 기모노를 좋아하여 새 기모노를 만들어 전당포로 들고 가는 이야기)를 힌트로 구성된 소설이다. 주인공은 전당포에 맡겨둔 기모노가 마음에 걸려 그것을 햇볕에 말리러 가는 길에, 함께 맡길 고급담요를 몸에 두르고 기모노에 얽힌 이야기—과거에 만났던 여성과 있었던 일—에 대해 회상한다는 전체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구성 외의 세부내용은 고지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이불에 돈을 걸고 이불 속에서 집필을 하는 일, 다른 사람의 첩이 된 여자(실제 모델은 카요코(加代子))와 여배우(실제 모델은 와타세 준코(渡瀬淳子))와의 협상, 히스테리로 이혼한 여자(실제 모델은 이자와 기미코(伊沢きみ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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