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끄적2019. 6. 29. 03:26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타 연극이었고 연출이 남성2인극에 과감하게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대사 수정 없이 그대로 남자 대사를 읊게 한 게 신의 한수였네요.

 

이거 남자배우가 하는 연극으로 봤으면 진부한 거 왜 하냐, 시간낭비 돈낭비 했다, 했을 텐데, 연출이 여배우를 쓰면서 내러티브의 초점이 극중극의 여배우로 옮겨가면서 극 전체가 재전유 되는 부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비평가>는 2인극이라는 형식과 두 등장인물의 치열한 논쟁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꽤 여러가지 토픽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처럼 픽션과, 픽션의 재현, 비평의 본령을 비롯해서 시선의 권력이라든가 하는 정말 여러가지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발되는 키워드들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상 이번 연출의 주제랄지 최심부에 있는 토픽은 바로 "진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연극의 중반부까지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중반부 이후까지도 메타연극답게 연극의 본령이니 비평의 본령이니 하는 진부한 논쟁으로 가득하죠. 한 두 세살만 더 어렸어도 따분하지는 않았을텐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걸 연출한 연출가도 작가도 <비평가>의 내용이 이미 오래 전에 "한물간" 소위 쉰떡밥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연극 속 두 인물 간의 대사에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어느 부분이냐하면 초반부에 볼로디아가 방에 놓여진 <리어왕>의 책을 들고 대충 "연극에 대한 연극은 꽤 오래된 것이고, 셰익스피어도 그러한 작품을 몇 개인가 남겼지만 주목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 이런 대사를 치는 부분입니다. <비평가>가 극중극의 형식을 하고 있는 메타 연극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런 대사는 일종의 위트예요. 자조적인 위트죠.

 

여하튼 이런 식으로 <비평가>는 메타 연극이라는 스스로의 입장을 자조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남성2인극에 여배우를 캐스팅한 과감한 연출의 의도성은 더 부각됩니다. 이러한 의도성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면 꽤 훌륭한 연출전략이고, 또 아주 영리한 마케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평가하건데 이걸 쓴 스페인 작가놈보다 대사 수정 없이(중요합니다) 여배우에게 남배우 대사를 그대로 읊게한 한국 연출가가 시류에 부응하는 감수성은 훨씬 더 뛰어나고 연출 감각도 한 수 위라고 하겠습니다. (뭐 애초에 스페인과 한국의 페미감수성은 비교할 바가 못 되겠지만요)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이 연극의 배우 캐스팅이 신의 한수였는가, 입니다.

 

이 연극에는 후반부에 볼로디아(비평가)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금자탑을 스카르파(작가)가 허물어버리는 반전이 장치되어 있습니다. 볼로디아는 시종 '스카르파의 여배우에는 리얼리티가 없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런 여자를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그런 것은 진짜 여자가 아니다' 라고 혹평하는데 알고보니 그게 볼로디아의 애인을 모델로 한, 대사까지도 볼로디아의 애인이 했던 말 그대로를 대사로 적은 것이었다는 부분이죠. 한마디로 여자는 "진짜"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볼로디아가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논쟁은 스카르파가 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스카르파가 이긴 것처럼 보인다고 적은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르파가 수화기를 들고 신문사 편집부에 들려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이 그 길고 치열했던 논쟁의 종지부를 '스카르파 완승'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견 그것은 끝내 볼로디아에게 호평을 얻어내지 못한 스카르파의 도덕적 양심이라든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마지막 대사들이 작가가 내린 일종의 결론인 거겠죠.

 

그리고 그 결론이라는 건 주지의 진부한 너도 옳다, 그리고 나도 옳다,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인데 이게 글쓰기와 비평의 본령 같은 쉰떡밥에 대한 답으로는 형편없지만 그래서 "진짜 여자"라는 건 뭐였어? 라는 대답에는 꽤 유효하거든요. 이 부분이 중요한 거예요. 극중극의 여자는 거짓이었나 진짜였나 하는 프레임이 실제 남성2인극이었던 연극을 하고 있는 여배우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옵니다.

 

여기까지 오면 일단 연출이 지시한 큰 길 끝에는 모두 도달한 셈이죠.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아마 연출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확장된 프레임>이 꼭 페미적으로만 전유될 이유는 없다는 게 제 사견이 되겠네요. 그렇죠. 연출이 의도한대로 "진짜 여자"라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여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죠. 마치 남자 옷을 입고, 남자 대사를 읊는 (여)배우들처럼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여자라는 건 뭐고, 남자라는 건 또 뭔가 하고요. 앞서 언급해뒀지만 아마 연출은 논바이너리라든가 퀘스쳐너리와 같은 성소수자 이슈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스카르파의 대본이 연출에 의해, 또 배우에 의해 '오염'되듯이 2019년의 <비평가>의 연출 또한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는거니까요.

 

극중극이 복싱 얘기고 복싱의 링 처럼 책 네 권을 무대 네 귀퉁이에 올려놓고 복싱선수처럼 격렬하게 논쟁하는 모양새라든가 극중극의 복싱 스승을 이겨서 뛰어넘는 제자처럼 볼로디아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는 스카르파 등등은 전부 부차적인 장치들이죠.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