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양에서의 ‘시’
‘시’(詩)라는 명칭은 원래 중국에서 글의 한 종류를 지칭한 것으로 가령 중국의 고대 경전의 하나를 『시경(詩經)』이라 했을 때의 ‘시’가 그 뜻이다. 이 용어를 처음 문학적 장르 명칭으로 사용한 사람은 기록상 순(舜)임금이라고 하는 데 그는 “시는 뜻[志]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歌]는 말[言]을 읊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대 서양의 장르 체계와 동양의 장르 체계는 서로 다른 까닭에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 ‘시’가 서양의 ‘poetry’와 꼭 일치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서양의 경우, 고대 그리스에서는 문학을 서정시, 서사시, 극시와 같은 개념으로, 현대에는 시, 소설, 드라마 따위로 분류한다. 이에 반해 고대 중국에서는 일찍이 진(晉)나라 때 육기(陸機)가 문(文)을 시(詩), 부(賦), 비(碑), 뢰(䛶), 명(銘), 잠(箴), 송(頌), 논(論), 주(奏), 설(說) 등 10유형으로, 5세기 전후, 양( 梁)나라 때 유협(劉勰)이 시(詩), 악(樂), 부(賦), 송(頌), 찬(讚), 축(祝), 맹(盟), 명(銘), 잠(箴), 뢰(䛶), 비(碑), 애(哀), 조(弔), 잡문(雜文), 해(諧), 은(隱), 사(史), 전(傳), 제자(諸子), 논(論), 설(說), 조(詔), 책(策), 격(激), 이(移), 봉선(封禪), 장(章), 표(表), 주(奏), 계(啓), 의(議), 대(對), 서(書), 기(記) 등 34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후자의 경우는 악(樂) 혹은 악부(樂府)의 가사가 시이고 시에 악곡을 붙인 것이 노래이므로 이를 하나로 묶을 경우 실제로는 33유형이 된다. 한편『시경(詩經)』의 시들이 풍 (風), 아 (雅), 송(頌), 흥 (興), 부 (賦), 비( 比)로 분류되는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동양의 분류체계는 서양과 달리 문(文)을 그 기능, 실용성, 문체, 표현 등으로 본 것이어서 서구적 개념의 ‘서정시’ 혹은 ‘시’라면 이 중에서 시, 가, 부, 송, 찬 등을 통합한 정도의 개념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한다.
고대 중국에서 형성문자 ‘詩’(시)의 ‘寺’(사)는 ‘절간’을 지칭하는 어휘가 아니다. ‘사’로 발음할 때는 ‘집’을, ‘시’로 발음할 때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관청’ 혹은 대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詩’(시)는 오늘날의 해석처럼 ‘말의 절’ 혹은 ‘절의 말’이라고 해석될 수 없다. 형성문자를 구성하는 음부 ‘寺’가 여기서는 ‘관청 시’자이기 때문이다 ‘寺’가 오늘날처럼 ‘절간’의 뜻을 지니게 된 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훨씬 후대의 일이다. 그러므로 ‘詩’(시)를 ‘절간의 언어’, 혹은 ‘언어의 사원’ 따위와 같이 통속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詩’(시)는 ‘절간의 언어’가 아니라 ‘관청의 언어’라는 뜻이다.
그러면 관청 혹은 대궐의 언어란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규율과 범절을 갖춘 언어 즉 ‘윤율과 형식성을 갖춘 언어’라는 뜻이다. 그것은 고대 왕조의 관청이 규율과 범절을 중요시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寺자와 어우르는 글자, 예컨대 ‘대’(待), ‘시’(侍) 등이 대부분 일정한 규율과 격식에 따라서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시’라는 한자어(漢字語)는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일상어에 조직적 혹은 인위적인 규율과 질서(체계적 강제systematic violence)를 부여하여 새롭게 재창조한 언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다.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시’라는 발음은 ‘시’(詩)라는 발음의 음부( 音符) 즉 ‘寺’의 고대 중국어 발음 ‘지’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한자(漢子)의 합성에서 음부는 비록 소리를 맡는 기능을 지녔다 하더라도 가능한 그 뜻에 가깝거나 그에 일치되는 다른 글자를 차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寺’ 역시 마찬가지다. ‘지’로 발음되는 ‘寺’가 같은 발음의 ‘志’와 상호 교환되는 경우가 많아─’寺’가 또한 ‘志’를 뜻하는 말로 통용되기도 해서 ‘寺’와 같은 발음의 한자어 ‘志’와 동일시된 ‘시(詩)’는 어원적으로 ‘뜻을 지닌 언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시에 대한 정의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감정이 움직이는 가운데 나타나면 말이 되고 말이 부족하면 탄식하게 된다. ─『시경(詩經)』,「대서(大序)」
㉡시경에 수록된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논어(論語)』,「위정(爲政)」
㉠은 시의 본질을, ㉡은 시의 기능을 설명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을 통해 고대 동양인들이 시를 어떤 효용성에서 보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삶을 교화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참다운 도덕적 완성자로 나아가게 하는 목적, 즉 도(道)의 실현 수단으로서의 효용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동영에서는 보편적으로 시를 도를 실현시키는 수단, 달리 말해 ‘문재도론’(文載道論)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의 문학론으로는 소위 문학의 교훈적 기능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앞의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자는 생각에 간특함이 없는 시, 인간의 성정을 정화시키는 시, 세상과 인간을 교화하는 시를 강조했던 것이다.
시의 기능을 문재도론으로 파악한 것에서 보듯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시의 본질 역시 이기론(理氣論)이나 성정론(性情論)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기론에 의하면 기(氣)는 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힘이며(따라서 형질을 가진 일종의 에너지임), 이(理)는 기에 내재하는 원리이다. 한편 음양(陰陽)은 그 안에 기와 오행(五行)의 질(質)을 내포하고 있는바 이 음양이 조화(造化)하는 원인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부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氣)는 도(道)에 따라 만물을 조화시키는 힘이며 그 변용하는 실상은 음양오행이다. 그리고 그 기가 사물에 감응하여 나타나는 정(情)과 이로부터 영탄되는 소리(聲)는 그 실재성(實在性)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가 기(氣)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이 조화하는 우주 본연을─관념적으로서가 아니라─실제적으로 표현함을 의미한다. 즉 시에서 정이란 기에 내재하는 원인으로서의 도(道)와 원리로서의 성(性), 혹은 이(理)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시는 뜻[志]이나 의(意)를 서술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대 동양에서는 시를 도(道)의 언어적 표현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지칭하는 협의의 ‘시’일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현대적 개념의 장르 의식이 수반되어 있지 않고 이상의 제 언급이나 정의들은 협의의 시가 아닌 문학 일반, 즉 ‘문’(文)에 적용시켜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2.서양에서의 ‘시’
이는 근대 이전의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이래 “시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했을 때의 ‘시’는 문학 일반(나아가 예술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지 오늘날 우리가 뜻하는 바의 시는 아니었다. 이는 서양에서 시를 정의한 몇 개의 널리 알려진 진술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시는 한편으로 유용하며(utile) 한편으로는 즐거워야 한다(dulce). ─호레이스(Horace),『시학(Ars Poetica)』
시의 목적은 가르치거나 쾌락을 주거나 혹은 이 둘을 겸하는 일이다. ─부알로(N. Boileau),『시학(Art Poetiques)』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Phillip Sidney),『시의 변호(The Defence of Poesie)』
시는 상상력의 표현이다. ─셸리(P. B. Shelly),『시의 옹호(Defence of poetry)』
시는 강한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다. 시인은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생각하고 느낀다. ─워즈워스(W. Wordsworth),『서정민요시집(Lyrical Ballads)』
시는 체험이다. ─릴케(R. M. Rilke),『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시는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이다. ─포(E. A. Poe),『시의 원리(Poetic Principle)』
이상의 여러 인용문들에서 ‘시’는 ‘문학’과 같은 뜻의 말로 사용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다. 시가 아닌 산문문학 일반에서도 이상 소개한 특징들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소설이나 드라마 역시 그 내용은 시각적 형상성으로 제시하는 것이 본질적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감정이나 율격적 표현 또한 산문문학에서도 중요하다. 최소한 과학적 진술에 비할 경우 그러하다. 그 외 ‘가르치거나 쾌락을 주는 일’ ‘상상력의 산물’ ‘체험의 소산’이라는 것도 문학 일반 나아가 전체 예술에 해당되는 특징이지 시만이 지닌 전유물은 아니다. 따라서 고대 동양에서와 같이 근대 이전의 서양에 있어서 시의 정의도 장르적인 관점에서 해명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다.
서구어에서 ‘시’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poesis’에서 왔다. 그런데 ‘poesis’는 원래 ‘만들다’ 혹은 ‘제작한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poiein’에서 파생되었으므로 그것은 특정한 형식의 문학만이 아닌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즉 절대자가 창조한 ‘자연’(nature)에 대해 인간이 제작한 ‘인공물’(artifact)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 ‘시’는 원래 의자나 책상과 같은 가구에서부터 미술작품이나 음악작품 나아가 문학작품 전체를 내포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시’는 어원적으로 오늘날에 통용되는 협의의 개념과 달리 ‘제작행위’ 혹은 ‘인공행위’의 모두를 뜻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말을 대체로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로 ‘제작행위 일체’(making), 둘째, 다소 넓은 의미로 ‘모방행위 일체’(imitation, 그리스어로 mimesis), 셋째, 좁은 의미로 ‘문학’(literature)이 그것이다. 여기서 모방행위가 문학을 포함하여 음악, 미술, 연극, 무용 등 예술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시학(Poietike)』에서 ‘시’를 다소 넓은 의미의 ‘모방예술’과 좁은 의미의 ‘문학’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혼용하였다. ‘서정시’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오늘날의 서정시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비극, 희극, 서사시 나아가 무용, 음악까지도 모두 ‘시’(오늘날 poem 혹은 poetry의 어원인 poesis)라는 명칭에 내포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 드라마와 등가를 이루는 오늘의 시의 하위 장르를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분류하는 오류도 이와 같은 명칭상의 혼란에서 기인된 듯하다. 그러나 서사시가 좁은 의미로서 오늘의 시의 하위 장르에 포함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서사시’라는 용어의 접미사 ‘시’라는 단어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넓은 의미의 시, 즉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liric’,’epic’,’drama’는 각각 서정문학(양식), 서사문학(양식), 극문학(양식)과 같은 상위 장르(장르 유(類))의 명칭으로 번역해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詩’라는 명칭은 용어상 혼란되어 있거나 혹은 보다 넓게 문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던 까닭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협의의 시─소설, 드라마와 등가를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시─와는 그 뜻이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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