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 형태의 비평과 연구
1. 작가론의 성립—메이지 시대의 작가론을 둘러싸고
작가의 존재형식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인간에게 있어 타자는 결국 이해 불가능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는 무거운 사실을 상기시킨다. 국내에서 <작가론 형태의 비평>이 본격화된 것은 메이지 4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메이지 20년에『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한 모리 오가이가 담리(談理)[1]를 표방하여 <혼돈스러운 문학세계>의 <탕청(蕩清)의 때>에 대비한 지도원리 확립을 목표로 한 이후 메이지 비평의 주류는 항상 조감의 높이로부터 현상의 통일과 선취를 지향해 왔다. 동시대의 문학상황을 <혼돈>스럽다고 보고 그것에 하나의 방향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줄곧 계몽비평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여러 이념을 서양에서 배우기에 성급했던 시대의 성격은 계속해서 서양으로 통하는 강단비평가를 요구하였다. 계몽비평의 명맥은 메이지 4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 이어졌다. 예를 들면 시마무라(島村)에 의해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지도원리로써 되살아났는데 그것이 비평사에 있어서는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메이지 40년대를 자연주의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의 무계함에 대해서 지금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40년대는 소세키와 오가이의 이름을 꺼낼 것까지도 없이 자연주의의 규준을 넘어 훨씬 자유로운 산문정신이 제각기 개성의 꽃을 피우고 이 나라 근대문학이 최초로 결실을 거둔 시대였다. 그러한 문학상황에 직면하여 외부로부터의 가치에 의한 정서(整序)에 익숙진 강단비평이 조감의 시점을 고집하면 할수록 그는 구제할 길 없는 혼란과 분열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겨우 자기의 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개성의 형태로 ‘개(個)’를 포괄한 전체를 이념화하거나 통일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계몽비평의 파산이다. 일례로써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또한 마찬가지인데 보다 강력한 외래사상으로의 신앙이 전환을 피할 수 없게 된 시대의 위기감과 함께 등장할 때까지 비평이라고 하는 문학형식은 시대상황으로의 지도성을 거의 상실한다. 그것은 다이쇼기에 있어서 쿠리야가와(厨川)의 강단비평에 동시대를 재촉하는 기폭력이 거의 누락된 까닭이기도 하다.
다이쇼기의 비평이 무엇보다도 생기를 띄는 것은 <작가의 감상>이라고 하는 형식을 취했을 때부터이다. 예를 들어 히로쓰(広津)의「志賀直哉論」은 그 전형이다. 하지만 상황의 총체로의 원리성 지향의 파탄을 대가로 메이지 40년대의 비평은 작가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어찌되었든 근대문학이 직선적 전개로부터 평면으로써의 확장을 얻었을 때 상황으로부터 용립(聳立)[2]한 개성이—또는 홀연히 상황과 상대화된 개성 조차도—비평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드디어 비평가는 동시대문단과 바로 이웃하여 존재하는(또는 존재했던) 리얼리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총체로부터 ‘개(個)’로의 회귀인 것이다.
시마무라(島村)를 길러내고 자연주의문학 운동의 유력한 거점이 된『早稲田文学』는 메이지 43년 1월호로 카타카미(片上)의「国木田独歩論」이나 교후(御風)의「樋口一葉論」을 포함한 여덟 권의 작가론특집을 시도하였다. 동시대문단의 기실(記実)[3]을 끝까지 이어온『早稲田文学』의 이러한 시도는 분명 작가론의 본격화라고 하는 시대상을 상징하는데 어울린다.「一葉論」은 삶의 여러 형태를 통째로 복원하기 위하여 오히려 트리비얼리즘(trivialism)[4]을 겁내지 않는 작가론이다. <기실(記実)>의 전통을 재촉한 포름(forme)[5]인지도 모르나 개성의 전원을 세부의 사실로 구성해가는 절차 사이에 비평주체의 주관이나 감정의 맥동이 희박하게 되어 <나(私)>의 일인칭은 <우리들(吾々)>의 복수표현 안에서 해소된다. 만일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둔다면 설령 대상의 상은 의사(擬似)적[6]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실체감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였을 테지만 메이지 비평가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만한 방법도 방법으로의 성찰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수는 얼마 되지 않으나 메이지 시대의 이러한 타입의 작가론은 묘하게 매력이 모자라다. 교후의「一葉論」의 대극에 있는 것은 마야마(真山)의「小栗風葉論」이다. 「芸術論は出来ない」「自分には恩人」「初対面の時」「公明な生活」「酒の飲み振り」등의 서브타이틀을 뽑은 것만으로 논의 성격이 저절로 명확해질 것이다. <나는 그저 단적으로 오구리 후요 그 사람을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는 모티브가 생활자의 체취를 풍기게 하는 에피소드를 얽어 하나로 만들고 인간 후요의 풍채를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마야마의 말투는 작가론의 발상이 소문이나 가십과 동류, 즉 <인간의 인간에 대한 흥미>와 다름없는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자면 마야마의 론과 소문의 거리는 <설마>라고 하는 회의(懷疑)의 유무에만 관련해있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든 작가론에 대한 인간은 <설마>라고 하는 회의를 보류할 수 있다.
「一葉論」이 타자를 객관의 형태로 까지 되돌리고 그 청사진 내지는 약식들을 그리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風葉論」은<카타리, 자신을 위해 쓰기 때문에 후요론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후요 대 자신의 취청(吹聴)[7]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직접 말한다. 이것은 곧 타자를 자기와의 관계에 두고 포착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신애의 정과 함께(물론 거부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타자와 자기의 사이에 다리를 걸치는 행위로써의 작가론의 원형이다.
게다가 이 두 작가론은 지향성에 있어서 훌륭하게 대조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 근본에는 <실상(実像)으로의 낙천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한 분명한 공통성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말투의 명석함에 반영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 자신의 말이 대상의 정확한 실상을 그리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타자의 진심인 것이다. 마야마가 <후요 대 자신>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인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후요의 실상이다. 비평대상이 그곳에 확실하고 단호히 존재하며 비평주체가 외부로부터 그것을 객체로써 인식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미숙한 인식이 메이지 작가론의 청량한 말투를 떠받치고 있다. 이 실상을 그리는 것으로의 낙천주의야말로 메이지 작가론을 일관하는 본질이었던 모양이다.
2.전통과 <나>와의 왕래—현대의 작가론부터
최근(이라고 하는 말로 간단히 일축될 정도로 시간의 폭은 좁지 않지만) 야스오카 쇼타로의「志賀直哉私論」과 코지마 노부오(小島信夫)에게「私の作家評論」의 시도가 있었다. 소설가나 비평가 등 현대의 문학상황과 직접 관련된 창작자로서의 입장으로부터 근대문학의 <과거>를 묻는 형태의 작가론이 눈에 띄는 현상이 시작된 것도 같은 무렵이다. 이것은 작가론의 영역뿐 아니라 여러 방법으로의 어프로치가 있었을 테지만 메이지·다이쇼의 문학이 단순히 역사적 시간에 봉쇄된 문화유산으로써 뿐 아니라 현대의 문학이 거기에 양식을 조달하여 스스로의 명맥을 걸고 재평가하기에 충분한 문학전통으로써의 중요 의미를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선명하게 해온 것의 반영이다.
저자는 빈손으로 자유로운 탐색을 통해 작가의 세계로 내딛고 스스로의 감수성과 직관의 움직이는 방식만을 의지하여 대상의 손에 닿는 감촉을 확신한다. 평전이라고 하는 틀 등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코지마의 작가론을 근본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은 소설가는 모두 똑같다고 하는 자부이며 소세키라든가 오가이라든가 하는 고명한 작가를 독자와 등신대(等身大)의 존재로까지 환원해버리는—이른바 구름 위의 인간을 지상으로까지 다시 끌어내리려는 손짓의 매력이다. 야스오카 쇼타로와 코지마 노부오의 작가론이 논의 겉포장에 다소 이질성을 남긴다고 할지라도 모두 한 사람의 소설가가 근거하여 세운 <나>의 살롱에 여러 초대손님을 불러 보여준 <향연>과 다름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작가론은 도식화하여 말하자면 메이지의 작가론의 변주다. 소설의 본질이나 작가의 삶, 그 본연의 자태에 대한 통찰 또한 소설의 룰이나 표현 기술로의 이해 등에 현격히 동떨어져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굳이 그것을 무시하고 말하자면 야스오카 쇼타로에게 있어서도 코지마 노부오에게 있어서도 자신에게만 필요한 작가상을 그린다고 하는 신조는 메이지 후기의 문학자가 메이지 전기의 문학자를 보고 있던 시선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그 모티프를 역전시켜 시가 나오야나 시마자키 도손을 논한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근대문학을 떠맡을 사람들은 전통의 무게를 짊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좀 더 가까운 이웃으로써의 존재성을 아직 상실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다이쇼 8년에 쓰여진 히로츠(広津)의「志賀直哉論」의 근저에는 나오야의 미덕을 현창(顕彰)[8]하는 모티프의 그림자로 비평대상의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원망(願望)이 숨어있다. 대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 그것은 대상의 전체상을 해명하는 것에 맞추어 작가론이 가지는 최초의 원류의 모티브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가교(架橋)로 자기를 묻는다고 하는 현대의 작가론이 이제 겨우 명료한 자각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요한 주제에 대상을 움직이기 위한 어떤 열정도 다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확실히 근대문학의 <과거>가 <전통>의 무게를 대비하기 시작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 있었다.
<동사의 부정법(不定法)>이라고 하는 수사는 비교대상을 역사의 상대적인 시간으로부터 떼내어 생의 본질을 보통화하는 방법의 비유로써도 유효하다. 대개 방법론적인 인식이 명확화되어 작가론의 점진주의—즉, 작가가 본 것을 그가 본 것처럼 간주해가는 방법에 대해 강한 안티테제가 제출되기 시작한 것도 현대작가론의 큰 특색이다. 에토쥰과 오케타니 히데아키(桶谷秀昭)의 소세키론에 공통되는 대상의 내부에 인간의 <실존>을 탐구하고 상황과 상대화된 존재의 근거를 묻는다고 하는—이른바 존재론적인 어프로치가 눈에 띈다. 존재론 내지는 상황론으로의 경계는 소세키론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지나 대체로 최근의 작가론(작품론) 일반에도 통하는 현저한 현상이다. 이것은 분명 전통으로써의 타자와 비평주체의 <나>를 잇는 주관의 다리의 하나이다.
3. 실상과 허상
메이지의 작가론은 대체로 비평대상의 <실상>을 그리기 위한 절차를 회의 하지 않았다. 현대의 작가론도 마찬가지일까. 원래 이것이 시가 나오야이고 이것이 모리 오가이다 라는 확신이 없으면 아무도 작가론 따위를 쓰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나 확신을 뒷받침하는 객관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론의 설득력인가, 자료의 사실성인가. 어느 것이든 타자의 존재를 동정(同定)[9]하지 않으면 출발이 있을 수 없는데다가 타자와 <나>를 잇는 객관의 다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모든 작가론의 근저에 가로놓인 모순은 그 뿌리가 깊다.
확호(確乎)로써 존재하는 객체로써의 예술가를 발레리는 믿지 않는다. 대상으로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수선안내(水先安內)[10]라는 모티프만큼 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론에서 먼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가 그리는 르네상스기의 예술가상은 다빈치가 확실히 살아서 사고하고 창조한 정신의 다이나미즘(dynamism)[11]을 모조리 재현하고 있다. 그 실재감과 등가(等価)하게 균형이 맞는 것은 발레리의 <나>의 존재성 뿐이다.
대상에 바로 자신의 꿈을 회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코바야시의 유명한 자각도 또는 발레리의 계시는 아니었을까. 코바야시에 대한 것의 자각과 함께 비평은 다시금 <작가의 감상>으로부터 비평가의 손으로 갈취되어 돌아와 소설로부터의 상대적 독립을 성취하는 가능성을 붙잡았으나 분명 발레리나 코바야시의 방법에서만 익숙하지 않은 타자의 진실은 존재한다. 타자—라고 하는 말투 자체가 자타의 <관계>에 있어 성립하는 대자성의 명증이지만—<나>라고 불리는 타자의 <실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인식자로서의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식의 대상으로써 나타나는 것은 <나>에게 영략(領略)[12]된 타자의 <허상>이다. 그러므로 비평으로써의 작가론은 실상을 허상으로까지 움직이는 작업—발레리식으로 말하자면 <행위>인 것이다. 대상의 구조와 비슷하게 <꿈>을 그린 도형이 아니며 대상을 스스로의 꿈에 좀 더 가깝게 가구(仮構)[13]된 상상력의 행위이다. 아날로지(analogy)[14]로 말하자면 모든 작가론은 <고백과 비평의 중간형태>로써 객관성의 근거를 계속해서 비평주체의 <나>에게만 부채질하는 것이다.
4. <작가론 형태의 연구>
객관성의 근거로 <나>를 대가로 치르는 활달한 비평정신은 오히려 선망을 이기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서 비평으로써의 작가론에 있어서의 <허용> 내지 <유보>로부터는 <작가론 형태의 연구>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문학>은 문학연구에 있어서 연구 대상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학문의 상식으로 말하자면 본래 주체와 객체의 거리는 멀리 찢어져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관계는 더욱 애매하여 보기가 어렵다. <문학>과 <연구>는 둘 다 언어를 모체로 하는 <표현>인데다가 문학의 창조와 향수(享受)[15]에는 미의식이나 감수성 등의 성가신 속성을 비롯하여 식역(識閾)[16]하(下)의 심층심리를 포함한 여러 심리나 정신성의 움직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문학>과 <문학연구>의 두 영역은 대응의 정합성을 상실하고 여러 간섭과 유착을 넘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론 형태의 연구>는 가능한 것인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3장까지의 서술부터 저절로 결론 지어지는 것과 같이 작가론이나 작품론의 영역에 자기(自己)를 폐쇄하는 한 문학연구는 학문으로써의 체계도 자율성도 결국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비평과 자기를 구별할 수 없다고 바꿔 말해도 좋다.
내 독단으로 말하자면 문학연구는 문학사의 총계에 의해 완결하는 인식의 단순운동이다. 발단은 지적 호기심이며 모든 도취와 로맨티즘과 관계없이 대상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하는 이유뿐,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운동 인식의 행위이다. 문학연구는 문학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말도 아직 정확하지 않다. <문학사>라는 역사학의 한줄기로써만 비로소 문학연구가 성립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그 때, 연구자의 주체는 역사를 보는 인식자의 눈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여기까지의 과정으로 <연구>는 늘 지향성에 있어서만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나의 편견에 따라 말하자면—<작가론 형태의 연구>가 혹시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평>에 끊임 없이 참여하며 대상으로써의 작가와 문학사를 잇는 통로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의 <삶>의 총체를 실증의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의 총량으로 대체 되지 않는 한, 타자를 철저히 이해하려고 하는 인식의 운동은 어차피 불가능한 타자성의 깊은 어둠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의사적으로 가설된 <실상>에 대하여 <허상>으로 무한히 다가가는 작가론의 절차는—적어도 관념 또는 이념의 형식으로써 상정 할 수 있다.
지금의 내게 <작가론 형태의 연구>의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해답이 논리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불명확한 예상으로써 적어 둔다면 우선 첫째로 <문학사>를 가리키는 작가론은 현재 창작활동을 단속(断続)하고 있는 작가를 대상으로 하지 않을 것—일정의 <시간의 거리>가 필요해서 종결된 정신의 운동만이 대상으로 선택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연구주체와 대상을 잇는 탯줄을 끊을 것—문학의 창조와 향수의 가역관계[17]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더욱 <탯줄을 끊기>위한 시도가 논의 기점에 되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대상을 현대로까지 데리고 돌아오지 말 것. 어떤 역사적 상황이 관련된 작가의 <삶>에 연구주체가 현대와의 관계로 끌어오는 여러 문제를 의식하여 투영하는 것은 적어도 피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작가를 그가 살던 역사의 시간으로까지 되돌리는—에토 쥰의 표현을 빌리자면—작가를 <그 시대>에 붙들어 매기 위하여 고증이나 주석이라고 하는 작업이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작가가 본 것을 그가 본 그대로 보는 것도 가능하며 게다가 동시대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시대의 암부(暗部)조차 시간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보여지게 된다고 하는 고증가(考証家)의 특권만이 작가와 그가 살던 시대를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음과 양 어느 쪽이든 스스로 <감동>으로부터는 논을 시작하지 않을 각오도 필요하고 자신의 미의식이나 감수성을 너무 믿는 것은 위험하다. 마지막으로 대상에 관련하여 존재하는 자료는 모두 조사해야 하고 지실(知悉)[18]해 두어야 한다. 발레리가 꺼렸던 <석학(碩學)>의 방법이다. 막스 베버 식으로 말하자면 한 줄의 <사실>을 해명하기 위한 <시간>을 두려워 말 것. 증명된 무언가만이 아닌 증명에 이르기까지의 절차에도 학문의 자율성의 근거가 있다. 모든 자료를 논리의 그물망에 묻어두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알기 위한 인식의 운동에 브레이크를 걸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상은 아직 망상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작가연구를 위한 방법이다.
[1] 이론을 말함.
[2] 높이 우뚝 솟음.
[3] 기사(記事)의 예스러운 일컬음.
[4] <문학>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탐구하지 아니하고 사소한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하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
[5] <프랑스어>포름; (예술 등에서) 형식; 형태; 구조.
[6] 비슷하여 분간하기 어려움.
[7] (말을)퍼뜨림; 선전함.
[8] 현창; (숨어 있는 선행을) 밝히어 알림; 또, 두드러지게 나타남; 공적 등을 알려 표창함.
[9] 동정; 동식물의 분류학상의 소속을 결정함.
[10] 수로 안내
[11] <철학>역본설(力本說), 역동설(力動說)이라고도 번역된다. 기본적으로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반대하여, 물질을 포함한 모든 자연현상을 힘으로 환원하여 생각하려는 발상을 말한다.
[12] 그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깨닫는 것.
[13] 가구; 허구
[14] <비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analogiā에서 유래하는 말. 당초에는 수학용어였으나, 플라톤 이후에는 철학분야에서 이용되었으며, 유추(類推), 유비(類比), 비론(比論) 등으로 번역된다.
[15] 향수; 받아들여 누림; 또 예술의 아름다움을 음미하여 즐김.
[16] 식역; 어떤 의식 작용의 생기(生起)와 소실(消失)과의 경계점.
[17] 물질의 상태가 바뀐 다음 다시 본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
[18] 지실; 다 자세히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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