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2015. 4. 22. 01:46

<수용이론과 수용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

-독일에서 해석학이 발전하여 생긴 이론이 수용미학 혹은 수용이론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가다머와는 달리 이 이론은 과거의 작품에만 전적으로 치중하지 않는다. 수용이론은 문학에 있어서의 독자의 역할을 조사, 검토하며, 그런 면에서 볼 때 꽤 새롭게 발전 된 이론이다. 현대 문학이론의 역사를 '작가에 대한 관심'(낭만주의와 19세기), '텍스트에 대한 전적인 관심'(뉴크리티시즘), '최근 수년간에 걸쳐 두드러지게 나타난 독자에 대한 관심의 전환'등 세 시기로 대충 구분해 볼 수 있다.  문학텍스트는 책읽기의 실천을 통해서만 구현되는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문학이 생기기 위해서는 독자도 작가만큼이나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독서 행위에는 무엇이 끼여드는가? 독자는 암묵적으로 연관짓고, 간극들을 메우며, 추론을 하고, 예감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수용이론이란 용어를 쓰자면 독자는 종이 위에 찍힌, 조직된 일련의 검은 표시들에 지나지 않는 문학작품을 '구체화한다.' 독자 쪽에서 이러한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없이는 문학작품은 결코 존재하지 못 할 것이다. 작품은 '불확정항들', 즉 그것들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독자의 해석에 의존하며, 수많은 서로 다른 방식들로, 어쩌면 서로 다른 상반된 방식들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수용이론에 있어서 독서의 과정은 항상 역동적이며, 시간을 통해 펼쳐지는 복잡한 운동이다.

 

<폴란드의 수용이론학자, 로만 인가르덴의 이론>

-인가르덴은 문학작품 자체는 일련의 도식들이며 독자가 현실화해야 하는 일반적인 방향들로써 존재할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이현실화를 위해서 독자들은 어떤 '선이해들'을 작품에 적용할 것이며 확신과 예상들로 이루어진 흐릿한 맥락 속에서 작품의 다양한 면모들을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독서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이 예상들 자체도 우리가 작품들을 통해 알게 된 것에 의해 수정, 변형되며, 해학적 순환(부분에서 전체로, 전체에서 다시 부분으로 움직이는 순환)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독자들은 통합된 '환상'을 짓기 위하여 작품 내에서 서로 다른 관점들을 병행시키거나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옮기기도 한다고 보았다. , 독서는 단순히 누가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만 인가르덴 이론의 한계>

-또한 로만 인가르덴은 그의 주저 '문학예술작품'(1931)에서 독단적인 주장을 편다. 독자는 '적합한' 방식으로 작품의 서로 다른 부분들과 층들을 연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데 그가 말하는 '적합한' 방식이란 제조업자의 지시에 따라 색칠하는 아동용 그림책과 다소 유사한 것을 뜻한다. 인가르덴에 있어서 텍스트는 불확정항들을 미리 갖추고 나오며, 독자는 그 텍스트를 '정확하게' 구체화 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독자의 활동을 제한하며 때로는 독자를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불확정항이나 채우는 일종의 문학 잡역부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콘스탄츠 수용미학파, 볼프강 이저의 이론>

-볼프강 이저는 텍스트들이 사용하는 '전략들', 텍스트들 속에 들어 있는 친숙한 테마들과 인유들의 '레퍼터리들'에 관해 '독서행위'(1978)에서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적어도 독서하기 위해서는 특정 작품이 전개하는 문학기법 및 문학관습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의미생산 방식을 체계적으로 지배하는 규칙들을 뜻하는 그 텍스트의 '약호들'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볼프강 이저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문학작품이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습관적인 약호와 예상들을 새롭게 비판적으로 자각하도록 강제하는 작품이다. 그러한 작품은 우리가 작품에 대해 갖는 절대적 확신들에게 질문하고, 그것들을 변형시키며, 우리의 타성적인 인식습관을 '()상투화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의 참모습을 인정하도록 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약호들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의 이론과 러시아 형식주의자와의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독서행위 도중에 우리의 관습적인 전제들은 '낯설게 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비판하고 수정할 수 있을 정도까지 객관화된다. 그가 말하는 독서의 요체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은 자기의식에 이르게 해주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촉매역할을 하는 데 있다. 요컨데 볼프강 이저의 수용이론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낯선 것과의 대면으로부터 생긴 풍부해진 자기지식에 신뢰를 두고 있는 가다머 해석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볼프강 이저 이론의 한계>

-볼프강 이저의 이론이 함의하는 바는 텍스트에 의해 변형되기 위하여 우리는 애초에 우리의 신념들을 아주 일시적으로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독서 행위는 이미 전제된 인간주체의 한 유형을 생산하는 셈이다. 문학 자체는 문학이 독서를 통해 생성해내려는 '일정한' 유형의 독자를 암묵적으로나마 조용히 전제하는 폐쇄성을 지닌다. 많은 수용이론이 외견상 지니고 있는 무제한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개방적 성격의 밑바탕에는 통일된 자아와 폐쇄된 텍스트라는 교리들이 깔려있는 것이다.

 볼프강 이저가 제시하는 독서의 모델은 근본적으로 기능주의적인 것이다. , 부분들은 일관성 있게 전체에 맞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자의적인 편견 뒤에는 따로따로 떨어진 지각들을 이해가능한 전체로 통합하는 데 관심을 가진 게슈탈트 심리학이 숨어있다) 하지만 문학작품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룬다거나 혹은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결코 없으며, 그에 따라서 의미가 지닌 허다한 암시적인 마찰과 충돌들이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도록 유도되기 위하여 문학비평에 의해 부드러버게 가공처리 되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볼프강 이저의 현저히 권위주의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불확정항들은 '표준화되어야'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들을 잘 길들여서 어떤 견고한 의미구조에 종속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다원론적'비평가가 말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누 아주 이상한 방힉이다. 볼프강 이저에 잇어서 이 환원이 행해지지 않으면 통일된 독서주체는 위태롭게 되고, 균형잡힌 실체로서의 자기자신에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저는 독서의 사회적 차원을 알고 있지만 주로 '미학적'측면들에 관심을 집중하려 한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이론>

-볼프강 이저가 주로 리얼리즘 작품에 초점을 맞추지만 바르트는 억압적인 사고체계들을 파괴하려 애쓴느 모더니즘 텍스트를 취함으로써 극히 대조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한 텍스트는 '해석학'보다는 '에로스학'을 요구한다. 독자들은 자아가 작품 자체의 뒤얽힌 그물조직을 따라 부서지고 흩어지는 것을 느끼는 데서 오는 매저키즘적 전율을 알게 된다.

 볼프강 이저가 언어의 무한한 잠재력을 억제하는 엄격하게 '규범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면, 바르트는 그것의 이면이나 다름없는 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며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경험을 보여준다.

 

<몰랑 바르트 이론의 한계>

-책 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한 어떤 세계에서는 바르트의 이론인 자기탐닉적이고 전위적인 쾌락주의인 면에 아연할 수 있다. 또한 볼프강 이저와 몰랑 바르트의 이론은 체계적인 사상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혐오를 드러대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독자의 역사적 위치를 무시한다.

 

<콘스탄츠 학파,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의 이론>

-그는 가다머식으로 작품이 생산된 배경인 문화적 의미들의 맥락으로 문학작품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지평과 역사적으로 위치지어진 독자들의 변화하는 '지평'사이의 변천관계를 탐구한다. 이러한 작업의 목표는 작가, 영향, 문학경향 등에 중심을 둔 문학사가 아니라 작품이 역사적으로 '수용되는' 다양한 순간들에 의해서 정의. 해석되는 새로운 종류의 문학사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 텍스트와 문학전통들 자체도 그것들이 수용되는 다양한 역사적 '지평들'에 따라 활발히 변한다는 것이다.

 

<-폴 사르트르의 이론>

-문학 수용에 관한 더 상세한 연구서 중 하나인 장-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8)에서 저서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은 한 작품의 수용은 그 작품의 '외적인' 수용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그것은 작품 자체를 구성하는 한 차원의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모든 문학텍스트는 저마다 잠재적인 독자에 대한 인식으로 이뤄지며, 그 작품이 지향하는 수용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연구는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라는 문제의 제기를 시도하는데, 단지 '실존적'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제기한다.

 

<미국의 비평가, 스탠리 피쉬의 이론>

-만일 문학작품이 어떤 불확정항들을 포함하는 명확한 구조가 아니고, 텍스트에 있는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어서 독자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 그의 이론은 '객관적인' 문학작품이란 전혀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인다. 피쉬에 있어서 독서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가 우리에게 행하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피쉬의 언어개념은 실용주의적이다.

 

<스탠리 피쉬 이론의 한계>

-스탠리 피쉬는 자신의 이론이 이끌지도 모를 해석의 무질서 상태를 조심스레 경계했다. 텍스트를 천 가지 서로 경쟁하는 해석들로 분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독자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개인적 반응을 지배할 어떤 '해석전략들'에 호소한다.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독자들은 아카데미 제도 속에서 성장한, '학식이 풍부하거나 정통한' 독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반응은 합리적인 토론을 앞설 정도로 서로서로 크게 차이날 가능성이 없다.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