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2015. 4. 22. 10:05

 

인간의 내면 세계에 주로 눈을 돌리는 심리주의 비평 방법과는 달리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주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에 눈을 돌린다. 문학은 의미 있는 인간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고 그 경험의 주체인 작가는 독자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공동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다.

 

<문학과 사회의 관계>

문학가를 비롯한 예술가에게 있어 사회는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범주의 개념과 비슷한 사고의 틀을 제공해준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을 따르는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와 예술가는 오직 사회라고 하는 관념의 틀을 통하여서만 세계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예술 작품으로 표상할 수 있다. 해리 레빈의 말대로 문학과 사회는 서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문학은 사회적 원인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결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회학자 위트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1)사회적 인습과 터부 2)일반적인 윤리 기준 3)종교적·철학적 신념 4)경제조직 그리고 5)주어진 사회의 정치 구조라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살핀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과 역사 비평 방법>

이렇게 사회적 맥락에서 문학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얼핏 역사 비평 방법과 동일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문학을 목적보다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두 비평 방법은 서로 큰 공통점을 지닌다. 실제로 몇몇 이론가들은 사회학적 비평방법과 역사 비평 방법을 서로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같은 개념으로 사용해왔다. 가령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은「문학의 역사적 해석에서 사회·경제·정치적 측면에서 문학을 해석하는 행위를 두고 역사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적 해석은 실제로는 역사 비평 방법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 훨씬 더 가깝다. 물론 한차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만큼 윌슨은 이 글에서 역사적이라는 용어를 주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쓰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과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연구 방법론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역사 비평 방법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역사 비평과는 달리 사회학적 비평은 언어의 문제, 그러니까 텍스트가 전달되는 과정에는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비록 언어는 사회적 상호 작용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사회 비평가들은 언어 문제를 역사 비평가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또한 사회 비평가들은 작가의 삶에 대하여서도 간접적으로만 주의를 기울인다. 역사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를 연구하되 뤼시엥 골드만과 같은 발생학적 비평가들처럼 사회적 존재로의 작가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춘다. 문학 장르나 인습 그리고 전통 문제에 있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역사 비평 방법이 통시적 측면을 중시한다면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오히려 공시적 측면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의 역사와 범위>

사회학적 비평 방법의 역사적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플라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일찍이 문학이 사회적 의미와 효과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자신의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시인들을 쫓아내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플라톤이 처음 씨앗을 뿌린 사회학적 비평은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써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 특정한 문학 형식은 특정한 시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게 이 비평 방법이 취하고 있는 기본 스탠스이다. 한편 문학이 사회를 표현하고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을 반영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헤겔의 태도 또한 사회학적 비평 방법과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그 기원을 이폴리트-아돌프 텐을 비롯하여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매슈 아놀드 등에게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 비코와 헤르더 그리고 헤겔의 이론을 논리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나간 그들은 이 문학 연구방법을 굳건한 이론적 반열에 올려놓았다. 20세기의 이론가들은 바로 그들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사회학적 비평 방법을 정립한다. 문학에서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중시하는 이론가들은 텐에게서, 사회적·경제적 차원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그리고 문화적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론가들은 아놀드에게서 각각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

1. 이폴리트-아돌프 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텐은 그 유명한『영국 문학사』에서 문학을 인종, 시대, 환경의 세 요소가 만들어낸 결과로 본다. 여기에서 인종이란 한 민족의 종족적 특성을 말하고 시대란 역사적 시기를 말하며 환경이란 사회적 환경을 말한다. 이 이론은 귀스타브 랑송한테서 큰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서 아주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2. 마르크스와 엥겔스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텐의 이론에 생산 양식이라는 네번째 요소를 덧붙였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좁게는 생산 양식, 넓게는 물질 조건이라는 잣대로 가늠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와 제도는 인간의 물질 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들이 사회의 상부 구조라고 부르는 문학·예술·종교·철학·정치·법률 따 따위 물질 기반 위에 세워진 이층집과 같다. 예술은 사회의 물질 조건을 정확하게 반영할 필요가 없다는 점, 예술은 사회 조건에 뒤늦게 나타나거나 미리 앞당겨 나타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 심지어 예술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점들을 그들은 지적하였다. 더구나 엥겔스는 예술 작품이 물질 기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가장 효과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와 단서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술이 궁극적으로 구체적인 물질 기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의 한 물음에 대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해왔지만 영원한 심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학적 태도는『독일의 이데올로기』에 이르러 한결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개념이나 관념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라 생산력과 그것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구체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당에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분명히 밝힌다.

여기에서 독일 철학이란 다름아닌 형식주의 비평 방법의 이론적 모태가 된 임마누엘 칸트와 헤겔의 관념 철학을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바로 독일 관념 철학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3. 매슈 아놀드

한편 영국의 시인이며 문학 비평가인 매슈 아놀드는 문학과 문학 비평에서 무엇보다도 도덕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현대 비평의 기능」에서 그는 비평을 아예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된 최상의 것을 배우고 전파하려는 사심 없는 노력이라고 못박는다. 그에 따르면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삶의 비평이다. 문학가는 반드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위대성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육적 기능이라는 차원에서 문학을 보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아놀드의 이론과 만나게 된다.

아놀드가 현대 비평 이론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문학을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윤리적 차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문화적 차원에서 보려는 사회-문화 비평가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이론은 어떤 작품이 문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문학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지만 문학의 위대성은 단순히 문학적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엘리엇에게서도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정치처럼 사회 제도의 일부로써 파악하려는 라이오널 트릴링한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비록 심미적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어빙 하우의 견해도 본질적으로 아놀드의 그것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활기를 띤다. 문학사회학과 예술사회학을 포함하는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그리고 문학 작품을 통하여 사회의 성격을 캐려는 뤼시엥 골드만의 발생학적 구조주의 이론도 기본 전제와 방법론에 있어서는 이 비평 방법에 속한다. 좀더 최근에 들어와서는 흔히 역사주의의 사생아라고 부르는 신역사주의의 이론, ‘문화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의 문화 비평 연구, 문학 작품의 사회화 과정을 연구하려는 사회학적 시학그리고 문학을 문화를 구성하는 기호 체계의 일부로 파악하려는 문화 시학도 모두 이 비평 방법에 포섭된다. 이 밖에도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페미니즘 비평 이론이나, 1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이 비평 방법과 결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학적 비평은 한마디로 삶과 문학 작품의 상호 작용을 밝히려는 연구 방법이다. 사실 이 비평 방법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두루 포함하는 아주 폭넓은 영역이다. 이 비평 방법이 때로는 역사 비평 방법이나 심리주의 비평 방법 또는 신화 비평 방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비평 방법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니트 울프가 정의하는 문학사회학자의 역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사회 환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작가가 사회 환경에 반응하는 방법과 정도에 관심을 가진다. 영국의 문학사회학자 재니트 울프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문학사회학자의 역할을 지적한다. 첫째, 이 비평 방법은 사회학의 개념을 도구로 삼아 문학 작품을 분석한다. 둘째, 이 비평 방법은 문학을 일종의 사회학으로 간주하여 문학 작품을 자료로 삼아 사회 현상을 연구한다. 셋째, 이 비평 방법은 문학의 사회적 기원과 문학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소를 연구한다. 넷째, 이 비평 방법은 문학을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 발전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사회적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을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수단으로 파악한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

사회학적 비평 방법 가운데에서 특히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이 방법은 아직도 문학 이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간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물질 기반의 영향을 받는 사회적 동물인 이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언제나 큰 설득력을 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리주의 비평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듯이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류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제도의 역동성과 모순을 분석하여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문학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한다. 둘째, 지금까지 헤겔을 비롯한 관념 철학자들은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일에만 주력해왔지만 이제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도 실천성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문학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을 비롯한 문화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아주 적절하고도 타당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을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써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은 바로 헝가리 태생의 문학 이론가 게오르그 루카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그는 문학이 사회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문학이 사회 변혁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 하는 점을 오직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가 프란츠 카프카나 제임스 조이스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을 그토록 신랄하게 매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마르크스주의 문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주관성과 내면 세계에 탐닉하는 모더니즘 문학은 정신병적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토마스 만이나 레오 톨스토이처럼 구체적인 삶의 실재에 굳건한 뿌리를 둔 리얼리즘 문학가만이 진정한 문학가라고 그는 주장한다.

루카치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미국의 비평가 아이러 쇼어는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라면 으레 문학에 대하여 던져 할 물음을 모두 여섯 가지 관점에서 지적한다. 1)주어진 작품이 사회주의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2)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삶의 공허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는가? 3)작가가 고뇌와 혼돈을 극복하는가? 4)사회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작가는 총체성을 얼마나 획득하는가? 5)어떻게 삶의 의미가 회복되는가? 그리고 6)개인의 운명과 사회적 힘이 얼마나 잘 유기적으로 결합 되어 있는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물을 던져야 할 분만 아니라 이 물음 대부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방법과 정도를 묻는 마지막 두 물음에 대하여서도 그들은 사회 변혁에 긍정적인 쪽으로 답할 것을 요구 받는다.

『광장』의 출판과 판매를 둘러싼 작품 외적 문제에 못지않게 작품의 주제나 내용에 관한 내적 문제 또한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서 아주 중요하다. 사실 작품의 외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문학 비평가의 몫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사회학자의 몫에 더 가깝다. 서구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학 외적 문제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주로 문학사회학자들의 업적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가령 문학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과정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경험론적으로 다룬 프랑스의 문학사회학자 로베르 에스카르피의『문학의 사회학』은 흔히 이 분야에서 고전적인 책으로 평가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이러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뿌리고 박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폭로함으로써 삶을 개선시키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문학가들도 예술 일꾼으로서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하도록 요구 받는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노동자 계급에 동조하지 않거나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작가들을 신랄히 비판해왔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 방법은 역사적 진보나 발전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르주아비평 방법과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 비평을 제외한 다른 비평 방법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새로운 비평 방법들은 한결같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적인 부르주아의 사회의 이익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신비평 이후에 생겨난 그 많은 새로운 비평 방법들은 어디까지나 형식주의 안에서의 집안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학 이론 가운데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처럼 이렇듯 드러내놓고 그리고 문학의 예술성을 무릅쓰고라도 문학과 삶의 관계를 주장하는 이론도 아마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문화유물론자들의 비평>

또한 1980년대에 들어와 문학 비평 분야에서 부쩍 눈길을 끌고 있는 문화 유물론자들의 비평 이론도 넓은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포섭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산자와 무산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을 주로 문제 삼지만 문화 유물론자들은 계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종과 성차(性差)까지도 함께 문제 삼는다. 조너선 돌리모어와 앨런 신필드의 말대로 문화 유물론은 한마디로 인종과 성 그리고 계급을 근거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 질서를 변혁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문학 비평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최근의 네오-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도 성과 인종을 중요한 의제로 삼지만 이 문제는 특히 문화 유물론에서 심도 있게 다룬다. 문화 유물론자들은 오직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만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페미니즘 비평

성차와 관련한 이 문제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페미니즘 문학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기도 한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생물학적인 과 사회적인 을 구별하여 전자를 섹스, 후자를 젠더라고 부른다. 페미니즘에 이론적 틀을 마련해준 시몬 드 보부아르가『제 2의 성』에서 지적하듯이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만들어질따름이다.

2. 사회학적 의미의 자살뒤르켐의 자살이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죽음의 의미와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죽음의 의미는 자못 다르다. 심리학에서는 자살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동으로 간주하지만 사회학에서는 사회라는 맥락에서 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자살이 가지는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따라 작품의 의미나 주제도 조금씩 달라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생겨나기 훨씬 앞서 고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지금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무렵 사람들은 자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조차 하였다. 가령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삶을 질적으로 살아야 하지 결코 양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값어치 없는 삶을 계속 유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와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나 신약성서에서나 자살을 직접 금지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자살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한 다음의 일이다. 초대 교인들이 순교를 자주 하게 되자 이 행위를 크게 염려한 교부들이 마침내 자살을 개인적 죄악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4세기에 성()아우구스투스는 자살이란 살인을 금지하는 여섯 번째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7세기에 스페인의 톨레도 회의에서도 자살하려는 개인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였고 13세기에 성()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자살을 도덕적 되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자살 행위가 새롭게 평가 받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18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렇게 자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데에는 이 무렵 서구에 불어 닥친 계몽주의의 영향이 무척 컸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자살이 범죄 행위가 아니라고 처음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자살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죄도 아니요 동료 인간에 대한 죄도 아니요 자신에 대한 죄도 아니다. 삶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에 인간은 얼마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좋다는 것이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주장한 장 자크 루소는 자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이 아닌 사회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살을 처음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이론가는 바로 독일 태생의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다. 이 분야에 관한 고전적인 저서라고 할 만한『자살론』에서 그는 자살 행위를 개인화 과정의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살은 개인의 심리나 물리적 환경에 달려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적 연구라는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는 사회적 결합성이나 긴밀성, 사회적 연대나 유대, 또는 사회적 규범 따위에서 자살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자살 행위를 개인과 사회의 긴장이나 갈등의 결과로 본다는 점에서 뒤르켐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살에서 이렇게 사회적 요인을 중시하는 뒤르켐은 자살을 크게 네 갈래로 나눈다. 1)타아적 자살 2)자아적 자살 3)운명적 자살 그리고 4)아노미적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타아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와 지나치게 긴밀하게 맺어져 있을 때에 일어난다. 이 경우 사회가 개인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부추기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바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국가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하라키리(腹切)나 인도에서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는 순장(殉葬)등이 이 갈래에 속한다. 자아적 자살은 타아적 자살과는 정반대로 개인이 사회와 유대 관계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 일어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개인은 극심한 고립과 소외 속에서 사는 나머지 자살을 막는 어떤 집단적 압력한테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편 운명적 자살은 노예가 자살하는 경우처럼 사회가 지나치게 개인의 행위를 규제할 때에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전망이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에서는 개인의 욕망과 야망을 억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무너져버릴 때에 나타난다. 한 사회에서 아노미가 늘어나면 개인의 정열이나 야망도 충족시킬 수 없는 수준까지 늘어난다.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충격을 받거나 직장이나 재산을 잃었을 때처럼 개인과 사회의 관례적인 관계가 갑자기 무너질 때에도 아노미적 자살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회학에서는 물론이고 일상 대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쓰는 아노미라는 용어는 뒤르켐이 아노미적 자살을 말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