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2015. 2. 12. 21:45

작가론 형태의 비평과 연구

 

1. 작가론의 성립메이지 시대의 작가론을 둘러싸고

 

작가의 존재형식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인간에게 있어 타자는 결국 이해 불가능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는 무거운 사실을 상기시킨다. 국내에서 <작가론 형태의 비평>이 본격화된 것은 메이지 4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메이지 20년에『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한 모리 오가이가 담리(談理)[1]를 표방하여 <혼돈스러운 문학세계><탕청()의 때>에 대비한 지도원리 확립을 목표로 한 이후 메이지 비평의 주류는 항상 조감의 높이로부터 현상의 통일과 선취를 지향해 왔다. 동시대의 문학상황을 <혼돈>스럽다고 보고 그것에 하나의 방향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줄곧 계몽비평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여러 이념을 서양에서 배우기에 성급했던 시대의 성격은 계속해서 서양으로 통하는 강단비평가를 요구하였다. 계몽비평의 명맥은 메이지 4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 이어졌다. 예를 들면 시마무라(島村)에 의해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지도원리로써 되살아났는데 그것이 비평사에 있어서는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메이지 40년대를 자연주의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의 무계함에 대해서 지금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40년대는 소세키와 오가이의 이름을 꺼낼 것까지도 없이 자연주의의 규준을 넘어 훨씬 자유로운 산문정신이 제각기 개성의 꽃을 피우고 이 나라 근대문학이 최초로 결실을 거둔 시대였다. 그러한 문학상황에 직면하여 외부로부터의 가치에 의한 정서(整序)에 익숙진 강단비평이 조감의 시점을 고집하면 할수록 그는 구제할 길 없는 혼란과 분열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제 겨우 자기의 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개성의 형태로 ()’를 포괄한 전체를 이념화하거나 통일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계몽비평의 파산이다. 일례로써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또한 마찬가지인데 보다 강력한 외래사상으로의 신앙이 전환을 피할 수 없게 된 시대의 위기감과 함께 등장할 때까지 비평이라고 하는 문학형식은 시대상황으로의 지도성을 거의 상실한다. 그것은 다이쇼기에 있어서 쿠리야가와(厨川)의 강단비평에 동시대를 재촉하는 기폭력이 거의 누락된 까닭이기도 하다.

다이쇼기의 비평이 무엇보다도 생기를 띄는 것은 <작가의 감상>이라고 하는 형식을 취했을 때부터이다. 예를 들어 히로쓰(広津)의「志賀直哉論은 그 전형이다. 하지만 상황의 총체로의 원리성 지향의 파탄을 대가로 메이지 40년대의 비평은 작가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어찌되었든 근대문학이 직선적 전개로부터 평면으로써의 확장을 얻었을 때 상황으로부터 용립(聳立)[2]한 개성이—또는 홀연히 상황과 상대화된 개성 조차도—비평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드디어 비평가는 동시대문단과 바로 이웃하여 존재하는(또는 존재했던) 리얼리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총체로부터 ()’로의 회귀인 것이다.

시마무라(島村)를 길러내고 자연주의문학 운동의 유력한 거점이 된『早稲田文学』는 메이지 43 1월호로 카타카미(片上)의「国木田独歩論」이나 교후(御風)의「樋口一葉論」을 포함한 여덟 권의 작가론특집을 시도하였다. 동시대문단의 기실(記実)[3]을 끝까지 이어온『早稲田文学』의 이러한 시도는 분명 작가론의 본격화라고 하는 시대상을 상징하는데 어울린다.一葉論」은 삶의 여러 형태를 통째로 복원하기 위하여 오히려 트리비얼리즘(trivialism)[4]을 겁내지 않는 작가론이다. <기실(記実)>의 전통을 재촉한 포름(forme)[5]인지도 모르나 개성의 전원을 세부의 사실로 구성해가는 절차 사이에 비평주체의 주관이나 감정의 맥동이 희박하게 되어 <()>의 일인칭은 <우리들(吾々)>의 복수표현 안에서 해소된다. 만일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둔다면 설령 대상의 상은 의사(擬似)[6]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실체감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였을 테지만 메이지 비평가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할만한 방법도 방법으로의 성찰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수는 얼마 되지 않으나 메이지 시대의 이러한 타입의 작가론은 묘하게 매력이 모자라다. 교후의「一葉論」의 대극에 있는 것은 마야마(真山)의「小栗風葉論」이다. 芸術論出来ない」「自分には恩人」「初対面」「公明生活」「」등의 서브타이틀을 뽑은 것만으로 논의 성격이 저절로 명확해질 것이다. <나는 그저 단적으로 오구리 후요 그 사람을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는 모티브가 생활자의 체취를 풍기게 하는 에피소드를 얽어 하나로 만들고 인간 후요의 풍채를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마야마의 말투는 작가론의 발상이 소문이나 가십과 동류, <인간의 인간에 대한 흥미>와 다름없는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자면 마야마의 론과 소문의 거리는 <설마>라고 하는 회의(懷疑)의 유무에만 관련해있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든 작가론에 대한 인간은 <설마>라고 하는 회의를 보류할 수 있다.

一葉論」이 타자를 객관의 형태로 까지 되돌리고 그 청사진 내지는 약식들을 그리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風葉論」은<카타리, 자신을 위해 쓰기 때문에 후요론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후요 대 자신의 취청(吹聴)[7]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직접 말한다. 이것은 곧 타자를 자기와의 관계에 두고 포착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신애의 정과 함께(물론 거부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타자와 자기의 사이에 다리를 걸치는 행위로써의 작가론의 원형이다.

게다가 이 두 작가론은 지향성에 있어서 훌륭하게 대조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 근본에는 <실상(実像)으로의 낙천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한 분명한 공통성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말투의 명석함에 반영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 자신의 말이 대상의 정확한 실상을 그리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타자의 진심인 것이다. 마야마가 <후요 대 자신>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독자에게 인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후요의 실상이다. 비평대상이 그곳에 확실하고 단호히 존재하며 비평주체가 외부로부터 그것을 객체로써 인식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미숙한 인식이 메이지 작가론의 청량한 말투를 떠받치고 있다. 이 실상을 그리는 것으로의 낙천주의야말로 메이지 작가론을 일관하는 본질이었던 모양이다.

 

2.전통과 <>와의 왕래—현대의 작가론부터

 최근(이라고 하는 말로 간단히 일축될 정도로 시간의 폭은 좁지 않지만) 야스오카 쇼타로의「志賀直哉私論」과 코지마 노부오(小島信夫)에게「作家評論」의 시도가 있었다. 소설가나 비평가 등 현대의 문학상황과 직접 관련된 창작자로서의 입장으로부터 근대문학의 <과거>를 묻는 형태의 작가론이 눈에 띄는 현상이 시작된 것도 같은 무렵이다. 이것은 작가론의 영역뿐 아니라 여러 방법으로의 어프로치가 있었을 테지만 메이지·다이쇼의 문학이 단순히 역사적 시간에 봉쇄된 문화유산으로써 뿐 아니라 현대의 문학이 거기에 양식을 조달하여 스스로의 명맥을 걸고 재평가하기에 충분한 문학전통으로써의 중요 의미를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선명하게 해온 것의 반영이다.

저자는 빈손으로 자유로운 탐색을 통해 작가의 세계로 내딛고 스스로의 감수성과 직관의 움직이는 방식만을 의지하여 대상의 손에 닿는 감촉을 확신한다. 평전이라고 하는 틀 등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코지마의 작가론을 근본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은 소설가는 모두 똑같다고 하는 자부이며 소세키라든가 오가이라든가 하는 고명한 작가를 독자와 등신대(等身大)의 존재로까지 환원해버리는—이른바 구름 위의 인간을 지상으로까지 다시 끌어내리려는 손짓의 매력이다. 야스오카 쇼타로와 코지마 노부오의 작가론이 논의 겉포장에 다소 이질성을 남긴다고 할지라도 모두 한 사람의 소설가가 근거하여 세운 <>의 살롱에 여러 초대손님을 불러 보여준 <향연>과 다름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작가론은 도식화하여 말하자면 메이지의 작가론의 변주. 소설의 본질이나 작가의 삶, 그 본연의 자태에 대한 통찰 또한 소설의 룰이나 표현 기술로의 이해 등에 현격히 동떨어져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굳이 그것을 무시하고 말하자면 야스오카 쇼타로에게 있어서도 코지마 노부오에게 있어서도 자신에게만 필요한 작가상을 그린다고 하는 신조는 메이지 후기의 문학자가 메이지 전기의 문학자를 보고 있던 시선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그 모티프를 역전시켜 시가 나오야나 시마자키 도손을 논한 것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근대문학을 떠맡을 사람들은 전통의 무게를 짊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좀 더 가까운 이웃으로써의 존재성을 아직 상실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다이쇼 8년에 쓰여진 히로츠(広津)의「志賀直哉論」의 근저에는 나오야의 미덕을 현창(顕彰)[8]하는 모티프의 그림자로 비평대상의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원망(願望)이 숨어있다. 대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 그것은 대상의 전체상을 해명하는 것에 맞추어 작가론이 가지는 최초의 원류의 모티브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가교(架橋)로 자기를 묻는다고 하는 현대의 작가론이 이제 겨우 명료한 자각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요한 주제에 대상을 움직이기 위한 어떤 열정도 다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확실히 근대문학의 <과거> <전통>의 무게를 대비하기 시작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 있었다.

<동사의 부정법(不定法)>이라고 하는 수사는 비교대상을 역사의 상대적인 시간으로부터 떼내어 생의 본질을 보통화하는 방법의 비유로써도 유효하다. 대개 방법론적인 인식이 명확화되어 작가론의 점진주의—즉, 작가가 본 것을 그가 본 것처럼 간주해가는 방법에 대해 강한 안티테제가 제출되기 시작한 것도 현대작가론의 큰 특색이다. 에토쥰과 오케타니 히데아키(桶谷秀昭)의 소세키론에 공통되는 대상의 내부에 인간의 <실존>을 탐구하고 상황과 상대화된 존재의 근거를 묻는다고 하는—이른바 존재론적인 어프로치가 눈에 띈다. 존재론 내지는 상황론으로의 경계는 소세키론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지나 대체로 최근의 작가론(작품론) 일반에도 통하는 현저한 현상이다. 이것은 분명 전통으로써의 타자와 비평주체의 <>를 잇는 주관의 다리의 하나이다.

 

3. 실상과 허상

메이지의 작가론은 대체로 비평대상의 <실상>을 그리기 위한 절차를 회의 하지 않았다. 현대의 작가론도 마찬가지일까. 원래 이것이 시가 나오야이고 이것이 모리 오가이다 라는 확신이 없으면 아무도 작가론 따위를 쓰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나 확신을 뒷받침하는 객관성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론의 설득력인가, 자료의 사실성인가. 어느 것이든 타자의 존재를 동정(同定)[9]하지 않으면 출발이 있을 수 없는데다가 타자와 <>를 잇는 객관의 다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모든 작가론의 근저에 가로놓인 모순은 그 뿌리가 깊다.

확호(確乎)로써 존재하는 객체로써의 예술가를 발레리는 믿지 않는다. 대상으로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수선안내(水先安內)[10]라는 모티프만큼 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론에서 먼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가 그리는 르네상스기의 예술가상은 다빈치가 확실히 살아서 사고하고 창조한 정신의 다이나미즘(dynamism)[11]을 모조리 재현하고 있다. 그 실재감과 등가()하게 균형이 맞는 것은 발레리의 <>의 존재성 뿐이다.

대상에 바로 자신의 꿈을 회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코바야시의 유명한 자각도 또는 발레리의 계시는 아니었을까. 코바야시에 대한 것의 자각과 함께 비평은 다시금 <작가의 감상>으로부터 비평가의 손으로 갈취되어 돌아와 소설로부터의 상대적 독립을 성취하는 가능성을 붙잡았으나 분명 발레리나 코바야시의 방법에서만 익숙하지 않은 타자의 진실은 존재한다. 타자—라고 하는 말투 자체가 자타의 <관계>에 있어 성립하는 대자성의 명증이지만—<>라고 불리는 타자의 <실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인식자로서의 <>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식의 대상으로써 나타나는 것은 <>에게 영략(領略)[12]된 타자의 <허상>이다. 그러므로 비평으로써의 작가론은 실상을 허상으로까지 움직이는 작업—발레리식으로 말하자면 <행위>인 것이다. 대상의 구조와 비슷하게 <>을 그린 도형이 아니며 대상을 스스로의 꿈에 좀 더 가깝게 가구(仮構)[13]된 상상력의 행위이다. 아날로지(analogy)[14]로 말하자면 모든 작가론은 <고백과 비평의 중간형태>로써 객관성의 근거를 계속해서 비평주체의 <>에게만 부채질하는 것이다.

 

4. <작가론 형태의 연구>

 객관성의 근거로 <>를 대가로 치르는 활달한 비평정신은 오히려 선망을 이기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서 비평으로써의 작가론에 있어서의 <허용> 내지 <유보>로부터는 <작가론 형태의 연구>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문학>은 문학연구에 있어서 연구 대상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학문의 상식으로 말하자면 본래 주체와 객체의 거리는 멀리 찢어져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의 관계는 더욱 애매하여 보기가 어렵다. <문학> <연구>는 둘 다 언어를 모체로 하는 <표현>인데다가 문학의 창조와 향수(享受)[15]에는 미의식이나 감수성 등의 성가신 속성을 비롯하여 식역(識閾)[16]()의 심층심리를 포함한 여러 심리나 정신성의 움직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문학> <문학연구>의 두 영역은 대응의 정합성을 상실하고 여러 간섭과 유착을 넘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작가론 형태의 연구>는 가능한 것인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3장까지의 서술부터 저절로 결론 지어지는 것과 같이 작가론이나 작품론의 영역에 자기(自己)를 폐쇄하는 한 문학연구는 학문으로써의 체계도 자율성도 결국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비평과 자기를 구별할 수 없다고 바꿔 말해도 좋다.

내 독단으로 말하자면 문학연구는 문학사의 총계에 의해 완결하는 인식의 단순운동이다. 발단은 지적 호기심이며 모든 도취와 로맨티즘과 관계없이 대상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하는 이유뿐,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운동 인식의 행위이다. 문학연구는 문학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말도 아직 정확하지 않다. <문학사>라는 역사학의 한줄기로써만 비로소 문학연구가 성립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그 때, 연구자의 주체는 역사를 보는 인식자의 눈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여기까지의 과정으로 <연구>는 늘 지향성에 있어서만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나의 편견에 따라 말하자면—<작가론 형태의 연구>가 혹시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평>에 끊임 없이 참여하며 대상으로써의 작가와 문학사를 잇는 통로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의 <>의 총체를 실증의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의 총량으로 대체 되지 않는 한, 타자를 철저히 이해하려고 하는 인식의 운동은 어차피 불가능한 타자성의 깊은 어둠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의사적으로 가설된 <실상>에 대하여 <허상>으로 무한히 다가가는 작가론의 절차는—적어도 관념 또는 이념의 형식으로써 상정 할 수 있다.

지금의 내게 <작가론 형태의 연구>의 가능성에 대해 명확한 해답이 논리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불명확한 예상으로써 적어 둔다면 우선 첫째로 <문학사>를 가리키는 작가론은 현재 창작활동을 단속(断続)하고 있는 작가를 대상으로 하지 않을 것—일정의 <시간의 거리>가 필요해서 종결된 정신의 운동만이 대상으로 선택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연구주체와 대상을 잇는 탯줄을 끊을 것—문학의 창조와 향수의 가역관계[17]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더욱 <탯줄을 끊기>위한 시도가 논의 기점에 되어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대상을 현대로까지 데리고 돌아오지 말 것. 어떤 역사적 상황이 관련된 작가의 <>에 연구주체가 현대와의 관계로 끌어오는 여러 문제를 의식하여 투영하는 것은 적어도 피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작가를 그가 살던 역사의 시간으로까지 되돌리는—에토 쥰의 표현을 빌리자면—작가를 <그 시대>에 붙들어 매기 위하여 고증이나 주석이라고 하는 작업이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작가가 본 것을 그가 본 그대로 보는 것도 가능하며 게다가 동시대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시대의 암부(暗部)조차 시간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보여지게 된다고 하는 고증가(考証家)의 특권만이 작가와 그가 살던 시대를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음과 양 어느 쪽이든 스스로 <감동>으로부터는 논을 시작하지 않을 각오도 필요하고 자신의 미의식이나 감수성을 너무 믿는 것은 위험하다. 마지막으로 대상에 관련하여 존재하는 자료는 모두 조사해야 하고 지실(知悉)[18]해 두어야 한다. 발레리가 꺼렸던 <석학(碩學)>의 방법이다. 막스 베버 식으로 말하자면 한 줄의 <사실>을 해명하기 위한 <시간>을 두려워 말 것. 증명된 무언가만이 아닌 증명에 이르기까지의 절차에도 학문의 자율성의 근거가 있다. 모든 자료를 논리의 그물망에 묻어두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알기 위한 인식의 운동에 브레이크를 걸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상은 아직 망상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작가연구를 위한 방법이다.



[1] 이론을 말함.

[2] 높이 우뚝 솟음.

[3] 기사(記事)의 예스러운 일컬음.

[4] <문학>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탐구하지 아니하고 사소한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하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

[5] <프랑스어>포름; (예술 등에서) 형식; 형태; 구조.

[6] 비슷하여 분간하기 어려움.

[7] (말을)퍼뜨림; 선전함.

[8] 현창; (숨어 있는 선행을) 밝히어 알림; , 두드러지게 나타남; 공적 등을 알려 표창함.

[9] 동정; 동식물의 분류학상의 소속을 결정함.

[10] 수로 안내

[11] <철학>역본설(力本說), 역동설(力動說)이라고도 번역된다. 기본적으로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반대하여, 물질을 포함한 모든 자연현상을 힘으로 환원하여 생각하려는 발상을 말한다.

[12] 그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깨닫는 것.

[13] 가구; 허구

[14] <비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analogiā에서 유래하는 말. 당초에는 수학용어였으나, 플라톤 이후에는 철학분야에서 이용되었으며, 유추(類推), 유비(類比), 비론(比論) 등으로 번역된다.

[15] 향수; 받아들여 누림; 또 예술의 아름다움을 음미하여 즐김.

[16] 식역; 어떤 의식 작용의 생기(生起)와 소실(消失)과의 경계점.

[17] 물질의 상태가 바뀐 다음 다시 본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것.

[18] 지실; 다 자세히 앎.

Posted by prajna_
summary2015. 2. 2. 00:43

1. 동양에서의 ‘시’

  ‘시’()라는 명칭은 원래 중국에서 글의 한 종류를 지칭한 것으로 가령 중국의 고대 경전의 하나를 『시경(詩經)이라 했을 때의 ‘시’가 그 뜻이다. 이 용어를 처음 문학적 장르 명칭으로 사용한 사람은 기록상 순()임금이라고 하는 데 그는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는 말[]을 읊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대 서양의 장르 체계와 동양의 장르 체계는 서로 다른 까닭에 물론 여기서 의미하는 ‘시’가 서양의 ‘poetry’와 꼭 일치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서양의 경우, 고대 그리스에서는 문학을 서정시, 서사시, 극시와 같은 개념으로, 현대에는 시, 소설, 드라마 따위로 분류한다. 이에 반해 고대 중국에서는 일찍이 진()나라 때 육기(陸機)가 문()을 시(), (), (), (), (), (), (), (), (), () 10유형으로, 5세기 전후, ( )나라 때 유협(劉勰)이 시(), (), (), (), (), (), (), (), (), (), (), (), (), 잡문(雜文), (), (), (), (), 제자(諸子), (), (), (), (), (), (), 봉선(封禪), (), (), (), (), (), (), (), () 34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후자의 경우는 악() 혹은 악부(樂府)의 가사가 시이고 시에 악곡을 붙인 것이 노래이므로 이를 하나로 묶을 경우 실제로는 33유형이 된다. 한편『시경(詩經)의 시들이 풍 (), (), (), (), (), ( )로 분류되는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동양의 분류체계는 서양과 달리 문()을 그 기능, 실용성, 문체, 표현 등으로 본 것이어서 서구적 개념의 ‘서정시’ 혹은 ‘시’라면 이 중에서 시, , , , 찬 등을 통합한 정도의 개념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한다.

 고대 중국에서 형성문자 ‘()의 ‘()는 ‘절간’을 지칭하는 어휘가 아니다. ‘사’로 발음할 때는 ‘집’을, ‘시’로 발음할 때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관청’ 혹은 대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따라서 ‘()는 오늘날의 해석처럼 ‘말의 절’ 혹은 ‘절의 말’이라고 해석될 수 없다. 형성문자를 구성하는 음부 ‘’가 여기서는 ‘관청 시’자이기 때문이다 ‘’가 오늘날처럼 ‘절간’의 뜻을 지니게 된 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훨씬 후대의 일이다. 그러므로 ‘()를 ‘절간의 언어’, 혹은 ‘언어의 사원’ 따위와 같이 통속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는 ‘절간의 언어’가 아니라 ‘관청의 언어’라는 뜻이다.

 그러면 관청 혹은 대궐의 언어란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규율과 범절을 갖춘 언어 즉 ‘윤율과 형식성을 갖춘 언어’라는 뜻이다. 그것은 고대 왕조의 관청이 규율과 범절을 중요시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와 어우르는 글자, 예컨대 ‘대’(), ‘시’() 등이 대부분 일정한 규율과 격식에 따라서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시’라는 한자어(漢字語)는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일상어에 조직적 혹은 인위적인 규율과 질서(체계적 강제systematic violence)를 부여하여 새롭게 재창조한 언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다.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시’라는 발음은 ‘시’()라는 발음의 음부( 音符) 의 고대 중국어 발음 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한자(漢子)의 합성에서 음부는 비록 소리를 맡는 기능을 지녔다 하더라도 가능한 그 뜻에 가깝거나 그에 일치되는 다른 글자를 차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다. ‘로 발음되는 가 같은 발음의 와 상호 교환되는 경우가 많아─가 또한 를 뜻하는 말로 통용되기도 해서 와 같은 발음의 한자어 와 동일시된 ()’는 어원적으로 뜻을 지닌 언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시에 대한 정의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지()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감정이 움직이는 가운데 나타나면 말이 되고 말이 부족하면 탄식하게 된다. ─『시경(詩經),「대서(大序)

    ㉡시경에 수록된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논어(論語),「위정(爲政)

㉠은 시의 본질을, ㉡은 시의 기능을 설명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을 통해 고대 동양인들이 시를 어떤 효용성에서 보았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삶을 교화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참다운 도덕적 완성자로 나아가게 하는 목적, 즉 도()의 실현 수단으로서의 효용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동영에서는 보편적으로 시를 도를 실현시키는 수단, 달리 말해 문재도론’(文載道論)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의 문학론으로는 소위 문학의 교훈적 기능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앞의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자는 생각에 간특함이 없는 시, 인간의 성정을 정화시키는 시, 세상과 인간을 교화하는 시를 강조했던 것이다.

 시의 기능을 문재도론으로 파악한 것에서 보듯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시의 본질 역시 이기론(理氣論)이나 성정론(性情論)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기론에 의하면 기()는 만물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힘이며(따라서 형질을 가진 일종의 에너지임), ()는 기에 내재하는 원리이다. 한편 음양(陰陽)은 그 안에 기와 오행(五行)의 질()을 내포하고 있는바 이 음양이 조화(造化)하는 원인이 되는 것을 도()라고 부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는 도()에 따라 만물을 조화시키는 힘이며 그 변용하는 실상은 음양오행이다. 그리고 그 기가 사물에 감응하여 나타나는 정()과 이로부터 영탄되는 소리()는 그 실재성(實在性)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가 기()를 위주로 한다는 것은 이 조화하는 우주 본연을─관념적으로서가 아니라─실제적으로 표현함을 의미한다. 즉 시에서 정이란 기에 내재하는 원인으로서의 도()와 원리로서의 성(), 혹은 이()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시는 뜻[]이나 의()를 서술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대 동양에서는 시를 도()의 언어적 표현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지칭하는 협의의 일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현대적 개념의 장르 의식이 수반되어 있지 않고 이상의 제 언급이나 정의들은 협의의 시가 아닌 문학 일반, ’()에 적용시켜도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2.서양에서의

 

 이는 근대 이전의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이래 시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했을 때의 는 문학 일반(나아가 예술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지 오늘날 우리가 뜻하는 바의 시는 아니었다. 이는 서양에서 시를 정의한 몇 개의 널리 알려진 진술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시는 한편으로 유용하며(utile) 한편으로는 즐거워야 한다(dulce). ─호레이스(Horace),시학(Ars Poetica)

    시의 목적은 가르치거나 쾌락을 주거나 혹은 이 둘을 겸하는 일이다. ─부알로(N. Boileau),시학(Art Poetiques)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Phillip Sidney),시의 변호(The Defence of Poesie)

    시는 상상력의 표현이다. ─셸리(P. B. Shelly),시의 옹호(Defence of poetry)

    시는 강한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다. 시인은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생각하고 느낀다. ─워즈워스(W. Wordsworth),『서정민요시집(Lyrical Ballads)

    시는 체험이다. ─릴케(R. M. Rilke),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시는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이다. ─포(E. A. Poe),『시의 원리(Poetic Principle)

 이상의 여러 인용문들에서 문학과 같은 뜻의 말로 사용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다. 시가 아닌 산문문학 일반에서도 이상 소개한 특징들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소설이나 드라마 역시 그 내용은 시각적 형상성으로 제시하는 것이 본질적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감정이나 율격적 표현 또한 산문문학에서도 중요하다. 최소한 과학적 진술에 비할 경우 그러하다. 그 외 가르치거나 쾌락을 주는 일’ ‘상상력의 산물’ ‘체험의 소산이라는 것도 문학 일반 나아가 전체 예술에 해당되는 특징이지 시만이 지닌 전유물은 아니다. 따라서 고대 동양에서와 같이 근대 이전의 서양에 있어서 시의 정의도 장르적인 관점에서 해명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다.

 서구어에서 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poesis’에서 왔다. 그런데 ‘poesis’는 원래 만들다혹은 제작한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poiein’에서 파생되었으므로 그것은 특정한 형식의 문학만이 아닌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즉 절대자가 창조한 자연’(nature)에 대해 인간이 제작한 인공물’(artifact)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 는 원래 의자나 책상과 같은 가구에서부터 미술작품이나 음악작품 나아가 문학작품 전체를 내포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는 어원적으로 오늘날에 통용되는 협의의 개념과 달리 제작행위혹은 인공행위의 모두를 뜻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말을 대체로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로 제작행위 일체’(making), 둘째, 다소 넓은 의미로 모방행위 일체’(imitation, 그리스어로 mimesis), 셋째, 좁은 의미로 문학’(literature)이 그것이다. 여기서 모방행위가 문학을 포함하여 음악, 미술, 연극, 무용 등 예술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시학(Poietike)』에서 를 다소 넓은 의미의 모방예술과 좁은 의미의 문학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혼용하였다.서정시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오늘날의 서정시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비극, 희극, 서사시 나아가 무용, 음악까지도 모두 ’(오늘날 poem 혹은 poetry의 어원인 poesis)라는 명칭에 내포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 드라마와 등가를 이루는 오늘의 시의 하위 장르를 서정시’, ‘서사시’, ‘극시로 분류하는 오류도 이와 같은 명칭상의 혼란에서 기인된 듯하다. 그러나 서사시가 좁은 의미로서 오늘의 시의 하위 장르에 포함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서사시라는 용어의 접미사 라는 단어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넓은 의미의 시,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liric’,’epic’,’drama’는 각각 서정문학(양식), 서사문학(양식), 극문학(양식)과 같은 상위 장르(장르 유())의 명칭으로 번역해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라는 명칭은 용어상 혼란되어 있거나 혹은 보다 넓게 문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던 까닭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협의의 시─소설, 드라마와 등가를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시─와는 그 뜻이 전혀 다르다.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