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뮤지컬의 이름은 다시 명명될 필요가 있겠네요.
이 뮤지컬의 진짜 이름은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이하, 오첨뮤)이 아니라 <오늘 처음 만드는 것 같은 뮤지컬>입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적어두지만, 배우와 스탭들이 미리 짜고 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오첨뮤는 그날그날 그때그때 공연에 맞춰 객석에서 공연될 장르와, 시작장소, 주요인물, 명대사, 후렴구, PPL등을 관객으로부터 받아서 연출가와 배우들이 매회 새로운 내용을 선보인다는 다소 파격적이고 신선한 형식의 공연입니다.
당연히 공연을 보기 전까지 관객들은 그날 어떤 공연을 보게 될 지 모르고 '오늘은 어떤 내용을 보게 될까?' 또는 '오늘 내가 직접 낸 디렉팅 아이디어로 공연을 보고싶다'는 기대와 바람이 사실상 이 공연을 추동하는 에너지인 동시에 꽤 전략적인 세일즈까지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오첨뮤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죠.
즉흥극이라는 형식의 공연이 과연 수익을 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오첨뮤는 그것은 결국 세일즈하기 나름이라는 답을 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인터미션에는 꽤 자주 '개천재다'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이걸 듣고 시장조사만 잘해도 본전을 칠 수 있는 공연을 올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첨뮤를 처음 기획한 사람도 이미 시장의 니즈가 무엇인지 잘 알고 이 공연을 기획한 거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 공연은 사실 획기적이지도 파격적이지도 실험적이지도 전위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을 뿐이죠. 다만 그런 <위장>이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게 어떻게 굴러가?' '오늘 공연 망하면 어떡해' 하는 모종의 불안마저 유발하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안 또는 미지의 공연에 대한 설렘이 마치 이 공연은 파격적이다, 신선하다, 획기적이다, 같은 인상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상 무엇인가를 팔려고 할 때는 타상품에 대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에 대해 오첨뮤가 선택한 차별화 전략은 일견 '스토리텔링' 쪽인 것 같지만 스토리텔링에 대한 차별화는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오첨뮤고, 오첨뮤가 어떻게든 굴러간다는 의미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첨뮤는 결코 통속극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클리셰>라고 불리는 것들을 십분 활용합니다.
즉흥극이라는 형식을 생각하면 클리셰는 활용하면 할수록 다방면에서 이득이죠.
첫사랑은 실패한다든가, 진짜 사랑은 네 주변 아주 가까이에 있다든가 하는 <통속적인 주제>와 킬러가 얼떨결에 목표대상의 아이를 떠맡게 되는 설정 같은 걸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차마 아이는 죽이지 못했다' 같은 <클리셰>의 <마구잡이식 짜깁기>가 오첨뮤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관객들이 정하는 장르니, 제목이니, 등장인물, 시작장소, 명대사, PPL 같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어도, 누구여도, 어디여도 상관없는 더미들이죠. 청춘로맨스면 청춘로맨스, 느와르면 느와르에 부합하는 스토리텔링이 있을 것이고 사실상 메인스트림만 흐뜨러지지 않는다면 저런 단서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죠.
가령 영웅담이라고 하면 걔가 어느동네에서 태어났는지 같은 세부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죠. 주인공이 얼마나 비범한지, 또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해서, 칭송받게 되는지 같은 걸 기대하겠죠.
뮤지컬을 그렇게 많이 본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오첨뮤를 보고 다시 한 번 느낀건 소위 뮤덕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보고싶은 건 스토리텔링이라기 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서 존잘력을 뽐내는 배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연극이든지 공연이든지 스토리가 캐리하는 경우보다는 배우가 스토리든 연기든 노래든 소름 돋게 훌륭하면 대체로 만족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첨뮤는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의 캐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즉흥극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관객의 니즈를 잘 캐치하고 있죠.
정말이지 오첨뮤는 하나서부터 열까지 즉흥적인 '척'을 아주 잘 해내고 있습니다. 가령 노래같은 경우에는 코드를 배우신 분들은 훨씬 더 잘 알고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진행되는 코드의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 C코드로 시작하거나 D코드로 시작하거나 해도 상관없죠. 이미 그 뒤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어느정도 다 알고 있을테니까요.
오첨뮤에서는 스토리텔링도 음악도 대사도 전부 버튼 누르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 같은 거예요. 다만 어떻게 봉합하는지가 궁금한 것이고, 다른 극에서의 작가나 연출이 이야기의 조각들을 어떻게 봉합할지(개연성)를 궁리하는데 쏟는 노력이 오첨뮤에서는 배우의 센스로 커버되고, 그 부분은 곧 유머로 승화되죠.
봉합은 거칠지만 어쨌든 아무튼 관객은 양해하고 넘어갑니다. 왜냐면 즉흥극이라는 극에서도, 뮤덕들의 소비심리에서도 이미 그 부분은 진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오첨뮤가 관객들로부터 수집하는 더미들 중에서도 특히 '이름'에는 조금 흥미가 있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아니메라든지 만화와 같은 소위 서브컬처를 비롯해서 대중문화 전반에서 '이름'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이런 경향은 제2차세계대전이 갈무리되고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들 무렵(1960년대죠)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요새는 이런 경향이 좀 더 현저하게
증가하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적을 일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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