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끄적2019. 6. 29. 03:26

결론부터 말하자면, 메타 연극이었고 연출이 남성2인극에 과감하게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대사 수정 없이 그대로 남자 대사를 읊게 한 게 신의 한수였네요.

 

이거 남자배우가 하는 연극으로 봤으면 진부한 거 왜 하냐, 시간낭비 돈낭비 했다, 했을 텐데, 연출이 여배우를 쓰면서 내러티브의 초점이 극중극의 여배우로 옮겨가면서 극 전체가 재전유 되는 부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비평가>는 2인극이라는 형식과 두 등장인물의 치열한 논쟁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꽤 여러가지 토픽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처럼 픽션과, 픽션의 재현, 비평의 본령을 비롯해서 시선의 권력이라든가 하는 정말 여러가지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발되는 키워드들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상 이번 연출의 주제랄지 최심부에 있는 토픽은 바로 "진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연극의 중반부까지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중반부 이후까지도 메타연극답게 연극의 본령이니 비평의 본령이니 하는 진부한 논쟁으로 가득하죠. 한 두 세살만 더 어렸어도 따분하지는 않았을텐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걸 연출한 연출가도 작가도 <비평가>의 내용이 이미 오래 전에 "한물간" 소위 쉰떡밥이라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연극 속 두 인물 간의 대사에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어느 부분이냐하면 초반부에 볼로디아가 방에 놓여진 <리어왕>의 책을 들고 대충 "연극에 대한 연극은 꽤 오래된 것이고, 셰익스피어도 그러한 작품을 몇 개인가 남겼지만 주목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 이런 대사를 치는 부분입니다. <비평가>가 극중극의 형식을 하고 있는 메타 연극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런 대사는 일종의 위트예요. 자조적인 위트죠.

 

여하튼 이런 식으로 <비평가>는 메타 연극이라는 스스로의 입장을 자조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남성2인극에 여배우를 캐스팅한 과감한 연출의 의도성은 더 부각됩니다. 이러한 의도성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면 꽤 훌륭한 연출전략이고, 또 아주 영리한 마케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평가하건데 이걸 쓴 스페인 작가놈보다 대사 수정 없이(중요합니다) 여배우에게 남배우 대사를 그대로 읊게한 한국 연출가가 시류에 부응하는 감수성은 훨씬 더 뛰어나고 연출 감각도 한 수 위라고 하겠습니다. (뭐 애초에 스페인과 한국의 페미감수성은 비교할 바가 못 되겠지만요)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이 연극의 배우 캐스팅이 신의 한수였는가, 입니다.

 

이 연극에는 후반부에 볼로디아(비평가)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금자탑을 스카르파(작가)가 허물어버리는 반전이 장치되어 있습니다. 볼로디아는 시종 '스카르파의 여배우에는 리얼리티가 없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런 여자를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그런 것은 진짜 여자가 아니다' 라고 혹평하는데 알고보니 그게 볼로디아의 애인을 모델로 한, 대사까지도 볼로디아의 애인이 했던 말 그대로를 대사로 적은 것이었다는 부분이죠. 한마디로 여자는 "진짜"였다는 것인데 여기서 볼로디아가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논쟁은 스카르파가 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스카르파가 이긴 것처럼 보인다고 적은 이유는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르파가 수화기를 들고 신문사 편집부에 들려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이 그 길고 치열했던 논쟁의 종지부를 '스카르파 완승'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견 그것은 끝내 볼로디아에게 호평을 얻어내지 못한 스카르파의 도덕적 양심이라든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마지막 대사들이 작가가 내린 일종의 결론인 거겠죠.

 

그리고 그 결론이라는 건 주지의 진부한 너도 옳다, 그리고 나도 옳다,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인데 이게 글쓰기와 비평의 본령 같은 쉰떡밥에 대한 답으로는 형편없지만 그래서 "진짜 여자"라는 건 뭐였어? 라는 대답에는 꽤 유효하거든요. 이 부분이 중요한 거예요. 극중극의 여자는 거짓이었나 진짜였나 하는 프레임이 실제 남성2인극이었던 연극을 하고 있는 여배우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옵니다.

 

여기까지 오면 일단 연출이 지시한 큰 길 끝에는 모두 도달한 셈이죠.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아마 연출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확장된 프레임>이 꼭 페미적으로만 전유될 이유는 없다는 게 제 사견이 되겠네요. 그렇죠. 연출이 의도한대로 "진짜 여자"라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여자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죠. 마치 남자 옷을 입고, 남자 대사를 읊는 (여)배우들처럼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여자라는 건 뭐고, 남자라는 건 또 뭔가 하고요. 앞서 언급해뒀지만 아마 연출은 논바이너리라든가 퀘스쳐너리와 같은 성소수자 이슈까지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스카르파의 대본이 연출에 의해, 또 배우에 의해 '오염'되듯이 2019년의 <비평가>의 연출 또한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는거니까요.

 

극중극이 복싱 얘기고 복싱의 링 처럼 책 네 권을 무대 네 귀퉁이에 올려놓고 복싱선수처럼 격렬하게 논쟁하는 모양새라든가 극중극의 복싱 스승을 이겨서 뛰어넘는 제자처럼 볼로디아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는 스카르파 등등은 전부 부차적인 장치들이죠.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9. 6. 29. 02:45

 

일단 이 뮤지컬의 이름은 다시 명명될 필요가 있겠네요.

 

이 뮤지컬의 진짜 이름은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이하, 오첨뮤)이 아니라 <오늘 처음 만드는 것 같은 뮤지컬>입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적어두지만, 배우와 스탭들이 미리 짜고 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오첨뮤는 그날그날 그때그때 공연에 맞춰 객석에서 공연될 장르와, 시작장소, 주요인물, 명대사, 후렴구, PPL등을 관객으로부터 받아서 연출가와 배우들이 매회 새로운 내용을 선보인다는 다소 파격적이고 신선한 형식의 공연입니다.

 

당연히 공연을 보기 전까지 관객들은 그날 어떤 공연을 보게 될 지 모르고 '오늘은 어떤 내용을 보게 될까?' 또는 '오늘 내가 직접 낸 디렉팅 아이디어로 공연을 보고싶다'는 기대와 바람이 사실상 이 공연을 추동하는 에너지인 동시에 꽤 전략적인 세일즈까지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오첨뮤의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죠.

 

즉흥극이라는 형식의 공연이 과연 수익을 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오첨뮤는 그것은 결국 세일즈하기 나름이라는 답을 내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인터미션에는 꽤 자주 '개천재다'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이걸 듣고 시장조사만 잘해도 본전을 칠 수 있는 공연을 올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첨뮤를 처음 기획한 사람도 이미 시장의 니즈가 무엇인지 잘 알고 이 공연을 기획한 거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 공연은 사실 획기적이지도 파격적이지도 실험적이지도 전위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을 뿐이죠. 다만 그런 <위장>이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게 어떻게 굴러가?' '오늘 공연 망하면 어떡해' 하는 모종의 불안마저 유발하고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안 또는 미지의 공연에 대한 설렘이 마치 이 공연은 파격적이다, 신선하다, 획기적이다, 같은 인상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상 무엇인가를 팔려고 할 때는 타상품에 대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에 대해 오첨뮤가 선택한 차별화 전략은 일견 '스토리텔링' 쪽인 것 같지만 스토리텔링에 대한 차별화는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오첨뮤고, 오첨뮤가 어떻게든 굴러간다는 의미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첨뮤는 결코 통속극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클리셰>라고 불리는 것들을 십분 활용합니다.

 

즉흥극이라는 형식을 생각하면 클리셰는 활용하면 할수록 다방면에서 이득이죠.

 

첫사랑은 실패한다든가, 진짜 사랑은 네 주변 아주 가까이에 있다든가 하는 <통속적인 주제>와 킬러가 얼떨결에 목표대상의 아이를 떠맡게 되는 설정 같은 걸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차마 아이는 죽이지 못했다' 같은 <클리셰>의 <마구잡이식 짜깁기>가 오첨뮤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관객들이 정하는 장르니, 제목이니, 등장인물, 시작장소, 명대사, PPL 같은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어도, 누구여도, 어디여도 상관없는 더미들이죠. 청춘로맨스면 청춘로맨스, 느와르면 느와르에 부합하는 스토리텔링이 있을 것이고 사실상 메인스트림만 흐뜨러지지 않는다면 저런 단서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죠.

 

가령 영웅담이라고 하면 걔가 어느동네에서 태어났는지 같은 세부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죠. 주인공이 얼마나 비범한지, 또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되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해서, 칭송받게 되는지 같은 걸 기대하겠죠.

 

뮤지컬을 그렇게 많이 본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오첨뮤를 보고 다시 한 번 느낀건 소위 뮤덕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보고싶은 건 스토리텔링이라기 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서 존잘력을 뽐내는 배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연극이든지 공연이든지 스토리가 캐리하는 경우보다는 배우가 스토리든 연기든 노래든 소름 돋게 훌륭하면 대체로 만족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첨뮤는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의 캐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즉흥극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관객의 니즈를 잘 캐치하고 있죠.

 

정말이지 오첨뮤는 하나서부터 열까지 즉흥적인 '척'을 아주 잘 해내고 있습니다. 가령 노래같은 경우에는 코드를 배우신 분들은 훨씬 더 잘 알고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진행되는 코드의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 C코드로 시작하거나 D코드로 시작하거나 해도 상관없죠. 이미 그 뒤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어느정도 다 알고 있을테니까요.

 

오첨뮤에서는 스토리텔링도 음악도 대사도 전부 버튼 누르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 같은 거예요. 다만 어떻게 봉합하는지가 궁금한 것이고, 다른 극에서의 작가나 연출이 이야기의 조각들을 어떻게 봉합할지(개연성)를 궁리하는데 쏟는 노력이 오첨뮤에서는 배우의 센스로 커버되고, 그 부분은 곧 유머로 승화되죠.

 

봉합은 거칠지만 어쨌든 아무튼 관객은 양해하고 넘어갑니다. 왜냐면 즉흥극이라는 극에서도, 뮤덕들의 소비심리에서도 이미 그 부분은 진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오첨뮤가 관객들로부터 수집하는 더미들 중에서도 특히 '이름'에는 조금 흥미가 있습니다. 요새 유행하는 아니메라든지 만화와 같은 소위 서브컬처를 비롯해서 대중문화 전반에서 '이름'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이런 경향은 제2차세계대전이 갈무리되고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들 무렵(1960년대죠)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데 요새는 이런 경향이 좀 더 현저하게

증가하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적을 일이 있겠죠.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21. 15:59

 

 

나는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그 시가 내 삶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져버린 적이 없다.

 

 

 

이 시가 가장 나를 울리는 부분은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고 하는 부분이다. 태양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고양이는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여자는 카모밀 차를 홀짝 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한데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고 옆으로는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이 남자는 곧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며 나 또한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질 운명의 인간이다.

이렇게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 속 꿈동산 속에선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초정도가 지난다. 무심한 슬픔. 길들은 사방에서 휘고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는 침묵이 새는데 고요하고 평화로운 십오초.

무심한 슬픔. 나의 슬픔을 먼 바리에서 지켜보는 듯한, 그런 무심한 슬픔.

이 시의 정념이 폭발하지 않는 부분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의 그 찰나의 십오초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내 슬픔을 가만히 바라다보는 그 십오초를.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꽃말의 뜻을 꽃이 알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그때 생은 거짓말 투성이였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난느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데 슬픔이 없는 십오초가 생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얘기하는 시라면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는 사자의 입장에서 생을 이야기한다는 게 하나의 재미포인트랄지. 꽃말의 뜻을 꽃이 알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가득했던 생은 우주를 스쳐 지나는 하나의 진리가 서편 하늘을 뒤덮을 때 누추하게 구겨져 아주 잠간 빛나는데 그 모습이 장대하고 거룩해보인다는 것이다. 아주 잠깐. 그 해질녘에.

심보선의 시에는 해가 정말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낮이 슬퍼. 찬란하게 슬퍼.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14. 23:38

할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고 했었다. 정작 할머니랑 영화 보러 간 적은 없다. 권한 적은 있지만 당신이 너무 완고하게 난 됐다고 하는 덕에.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어딘갈 갔던 곳은 시장이었고, 할머니는 오랜만에 온 길을 헤매며 속상해했다. 총명하고 자존심이 세고 다혈질인 사람이었다.

코 끝에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날이다. 부재는 슬프구나. 아니 부재는 부재일 뿐인데, 부재를 슬퍼하는 내 마음이 슬프구나.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14. 23:13

 

0.
일단 빌리 엘리어트가 억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므로 길게 적지 않으려 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내러티브 곳곳에는 억압과 저항이 대비되며 나타나고 있다. 가령 작중 초반에 나타나는 대처주의에 의한 경찰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은 국가에 의한 억압과 노동자계층의 저항에 대한 이야기이며, 남자는 복싱을 배워야하고 여자는 발레를 배워야한다는 성 역할 구분 또한 대립되는 것이고, 마이클이 여자 옷을 입는 것에 대해 처음에 빌리가  '진짜 졸라 이상해, 너 게이야?'라고 묻는 행위 또한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복싱과 발레 같은 경우는 한층 내밀하게 파고 들면 복싱은 노동자계급의, 발레는 중산층 이상 계급의 전유물로 노동자계층의 자녀인 빌리가 발레의 세계로 편입되는 과정 자체는 사회의 구조적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복싱이 '뭐가 미안해! 복싱은 원래 그런거야!(때리는 거야!)'라는 대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의 대처주의로 대표되는 영국의 신자유주의의 고단함, 피로함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아버지가 두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장면 또한 억압과 저항으로 카테고라이즈 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억압이란 무엇에 대한 억압이고, 저항이란 무엇에 대한 저항이며, 자유란 무엇에 대한 자유를 말하는 것일까?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1.
빌리 엘리어트의 주제는 쉽고 간결하다. '춤이 태초의 본성을 끌어내는' 행위라면 작중에서 춤이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의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빌리가 춤을 추며 와이어를 달고 하늘을 나는 퍼포먼스는 '자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빌리 엘리어트>에서의 자유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을>자유를 뜻한다. 반대로 억압이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빌리의 세계관 안에서 태초의 인간은 자유롭다. 그런데 그들은 사회 구조에 편입되며 사회화 되는 과정 등으로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자유>를 억압당한다. 이미 선술한 문장에 답이 나와 있는 듯하지만 사람은 '기투된 존재'고 사회는 '구조화' 되어 있기에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 환상에 가깝다.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는 대략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리 엘리어트>에서 말하는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는 환상으로서의 자유인가?

 


2.
나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선 그렇다, 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구조화'라고 하는 메타적인 차원에서의 자유란 원래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오롯하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안에 자리지워져 있다고 하는 구조화 이론에서 인간의 자유란 한정적인 것이고 개인이란 그 구조 안에서 조건지워진 존재에 불과하다.  빌리의 주제를 좀 더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시 바꿔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나로 보아주세요. 나를 '대상화'하지 말아주세요>가 될 것이다. 그런데 대상화 되지 않는 삶이란 가능한가. 인간이 보는 타인이란 대체로 그 인간에 대한 환상이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나는 타인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고, 타인 <그 자체>라기 보다 그러한 타인이 가진 속성과 이미지를 타인으로 오인한다. 물론 '대상화'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견이 어떠한 지점에서 발생하게 되는지를 충분히 인지한 후에 쓰는 글이라는 점을 양해바란다.

 


3.
어쨌든 그런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는 그 조건지워진 안에서 분투하는 일종의 시지프스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빌리와 친구들이 세간에 존재하는 모럴과 대립하는 동안에는 그는 자유로운 인간일 것이다. 즉,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세요>라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빌리와 친구들은 자유로운 인간인 것이다. 이것이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에 대한 답이다. 시지프스가 산 정상으로 그 커다란 돌덩이를 굴리고, 또 굴리면 정상에 올라간 돌덩이는 다시 시지프스 위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다시 그 돌덩이를 산 정상으로 굴린다. 인간의 삶이 구조지워져 있다는 건 이러한 시지프스의 삶처럼 계속해서 돌을 굴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굴러떨어지는 돌덩이를 반복해서 굴리는 시지프스의 삶을 우리는 부자유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4.
다시 작중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이클이나 마이클의 아버지처럼 남자가 여자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는 동성이 동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것, 발레는 중산층 이상의 여자만의 전유물이라는 것, 발레복 아래에 토슈즈가 아닌 탭댄스 신발을 신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대상화'이며 사회화란 말하자면 이러한 사회적 모랄의 부역자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주인공 빌리와 빌리를 승인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어린이>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어린이>라는 위치가 이러한 사회적 모랄이 아직 그들의 중심에 자리하기 이전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 공연의 내러티브가 빌리의 형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이다.

 


5.
초반 작중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상화'의 부역자이고, 누구보다 세상에 거칠게 <저항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걸고 지킨 가치는 곧 몰락하고 광산은 국유화되고 만다. <빌리 엘리어트>의 무엇보다 훌륭한 점이 있다면 주인공 빌리를 그저 억압에 저항하는 존재로만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저항하는 부역자'라는 형의 지위는 저항에 갇혀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물의 한계상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빌리의 저항은 형에 저항과 달리 <저항함>에 함몰되지 않고 억압을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서 자유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 바로 발레라는 소재다. 복싱과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발레 라는 소재는 인간이 인간되지 않음을 수행함으로서 '미'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예술 장르다. 저항이라는 것도 결국은 억압의 극단에 있는 삶에 골몰한 형태의 하나일 뿐, 저항 그 자체는 자유가 되지 못함을 빌리는 발레로 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빌리의 발레는 더욱 빛나고 아름다우며 가치있는 것은 아닐까.

 


6. 마지막으로 <나를 대상화 하지 말아주세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아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빌리의 치명적인 윤리적 오류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렇다.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그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애 한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로 열고 '엄마에게 쓰는 답장'으로 닫는 빌리의 코 끝 시큰시큰한 내러티브는 과연 빌리를 <있는 그대로>보고 있는가? 빌리가 대단히 훌륭한 웰메이드 뮤지컬이라는 점에는 한 점의 의심이 없지만 극의 내러티브며, 관객들이 그 내러티브를 소비하는 애티튜드까지를 아울러서 <빌리 엘리어트>는 아동혐오적이다. 이 뮤지컬은 어린이는 순수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하며, 어머니가 없으면 선생님과 같은 유사 어머니의 손길이 없어서는 안된다, 라는 메시지를 내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상술한 열거를 전면에서 모두 부정할 생각은 없다. 어린이는 순수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있고, 누군가가 그의 자립을 도와주지 않으면 생활이 곤란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린이가 갖는 <이미지>가 전술한 사회적 모랄(어떠한 정상성이라고 보아도 무관하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한 언어도단일 것이다. 흔히들 어른들은 말한다. <애는 애다워야 한다>고.  <빌리 엘리어트>의 주연들은 '귀엽다'고. 아동의 어리숙함이나 미숙함을 귀여움으로 소비하는 것 자체가 '대상화'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곧 <빌리 엘리어트> 안에서 은폐되고 만다. '어린데 대단하다'. 어리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만큼이나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7. 딱히 관객들이 <빌레 엘리어트>를 소위 '착즙'하는 행태에 대해 꼬집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왕 착즙할거면 착즙인 줄은 알고 하자는 두서없는 리뷰였다. 억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적지 않으려고 했던 것에 비해서는 굉장히 길어져버렸다. 두서없는 리뷰에 양해를 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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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5. 10:50

어쨌든 미련을 만들어야 살아지는 거고 미련이 없으면 죽는 것이죠. 미련이 없이 병원에 갔고 의사는 내게 미련을 만들라고 했고 될 수 있으면 여기저기 이것저것 많이 만들라고 했죠. 저는 그 미련으로 살 겁니다. 역시 내 가장 큰 미련은 애인이겠죠. 그 없는 세상에 돈이 무슨 소용이고 맛있는 음식 온갖 좋은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요.

우리는 오늘 서로를 위해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살 것입니다. 너를 위해. 내 이기적인 욕심으로, 너를 위해.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5. 10:49

차라리 아픈 줄 모르고 성격만 버려갔던 기성세대가 정신건강에 예민한 젊은 세대 보다 낫다는 생각도 하긴 하죠. 증상이 있기 때문에 병이라는 개념이 생겼다기보다는 병이라는 개념이 발명되고 증상은 심화되고, 환자는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그들이 현대정신건강의학 기준으로 아프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심리적 현실은 끊임없이 정신병을 의심하거나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근심에 시달리거나 그런것들을 통보받고 비통해하진 않겠죠.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좋은 건 플라시보 효과 뿐이라는 생각이에요. 없는 것보단 편하지만 딱 그 뿐이고(작고도 큰 효과죠) 약이 현실의 상황을 낫게 해주거나 그로 인해 빚어지는 내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하죠.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멀쩡하다고 믿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게 아닐까요.

나는 어쨌든 한계까지 믿었고 결국 신체화 증상이 너무 심해져서 병원에 갔지만 이 결과에 만족합니다. 나는 할만큼 했으니까요 정말로. 그래요. 어쩌면 나는 꿋꿋이 버텼다는 이 알량한 자긍심이 문제인지도 모르죠. 왜 버티지 못하느냐 하는 꼰대가 욱하고 치밀어 오를 여지를 주는 걸지도요. 아무도 나한테 한계까지 버티라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늘 말하지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만든다는 명제는 진린데 반해서 인간은 평생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일부의 나를 지움으로서 나를 유지하고, 누군가는 모두의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쳐버리고 그 미쳐버림이 삶의 방식일 수도 있겠죠.

모르겠네요. 나는 한심하다 인정해버리면 그걸로 와해 되어버린 스스로와 화해가 되는걸까요.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5. 10:36

 

근래 나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도 구제할 길이 없는 좆창난 인간들이 한심했다. 죽음을 바라마지 않으면서 죽지 못해 사는 망령이 진심반 자조반으로 떠드는 죽음이 하찮았다. 결국은 살고 있으면서 죽음을 바라마지 않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건지 괴로웠다. 어느 때의 나를 겨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난 (이제 더이상) 아니야, 가 바로 공격성으로 드러났다. 알기쉬운 공격성이었다.

그 때(라고 해봤자 불과 얼마 전이지만)를 떠올릴만한 건덕지만 보여도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잘 살고 싶었으니까.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노력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닌 삶은 내 주위에 산재해 있고 바로 가까이에도 있었다. 나는 아마도 무서웠던 것 같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불일치한 삶이, 나를 또 덮쳐올가봐. 내가 또 사는 게 버겁고 힘들어질까봐, 다 내려놓고 싶을까봐,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실까봐, 그러다 어느날 재미도 슬픔도 모두 메말라버릴까봐,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나보다.

나는 열심히 씩씩하게 살고 싶다. 노력으로 일군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손에 쥐고 기뻐하고 싶다. 그리고 주변과 그 시시한 것들을 나누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지만 어딘가에는 그렇지 않은 삶이 산재해있다는 거, 그리고 그 보잘 것 없는 삶 또한 그 보잘 것 없음으로 거기에 있다는 것. 그녀가 내게 남긴 건 그런 하찮고 시시하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 남자친구는 내게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도 있어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가엾다. 가엾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가엾지 않아지는 건 아니었다. 가엾은 채로 보잘 것없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지 보잘 것 없는 걸 포기할지, 포기당할지 일 뿐.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그녀의 실천이었고 이제는 그 실천을 내 애도의 방식으로 삼고자 한다. 물론 순전히 내 멋대로, 내 욕심으로.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7. 10. 22. 00:14
  1.  

관람 전 가장 주안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역시 뮤지컬이라는 폼에 전통국악을 어떻게 접목시켰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배우가 뮤지컬 발성과 국악발성 둘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고……. 큰 틀은 뮤지컬이고 내용은 판소리하는 부녀지간 얘기라 적지 않은 비중의 판소리가 곁들어지는데 그 부분이 매우 신선하고 의외로 잘 어우러진다. 판소리가 생소하거나 멀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그냥 판소리를 무작정 찾아 듣기보다 <서편제>를 한편 보는 게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기에는 더 나을 것도 같다. 무대는 간단한 무대장치로만 효율적으로 운용돼서 나머지는 조명효과에 의지하는 부분이 컸지만, 그 부분도 나쁘지 않았다.

 

  1.  

오히려 자꾸 되짚어보게 되는 쪽은 내러티브 쪽이다. 원작소설인<남도사람들>이나 영화화된<서편제>와 다르게 뮤지컬에서 동호(남자주인공)의 서사를 이항대립적으로 확장시켜서 부각되는 60년대의 전후(戦後) 공간 이외에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다소 심심하다. 오누이의 정? 사실상 그게 전부라고 할 수 있다.1 어쩌면 내가 바로 전에 본 공연이 <레베카>여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 일수도 있겠다. <레베카>와 <서편제>는 어떻게 보면 서사의 동력 측면에서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대조점이 <서편제>가 ‘안 팔리는 이유’와 맞물려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1.  

일단 <서편제>가 안 팔리는 이유로 가장 짐작해보기 쉬운 이유는 대중의 편견일 것이다. 국내창작 뮤지컬인데다가, 소재가 익숙하지 않은 판소리라고 하는데 선뜻 티켓을 구매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조금 믿고 볼만한 구석이라고 한다면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과, 같은 제목으로 개봉한 꽤 흥행한 영화가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어디서 이름만 들어본 소설이거나, 잘해야 줄거리 정도 꾀고 있거나, 흥행했다고는 하지만 본 적 없는 옛날 영화일 뿐이다. 지극히 타당하고 일리 있는 분석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된 걸까? 여기서는 <서편제>가 비주류인 이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론부터 말해두자면, 애초에 공연시장 자체가 <서편제>가 주류로 자리잡기에 불리한 조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서사를 중심으로 검토해보자.

 

  1.  

<레베카>는 일인칭시점인 '나(Ich)'의 이야기로 시작한다.(물론 뮤지컬이라는 특성상, 시점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맨덜리에 도착한 이래로 초점인물인 ‘나’는 시종일관 레베카라는 강력한 대타자의 상징질서 안에서 점점 무력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윽고 댄버스부인(소타자)에 의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레베카>의 컨텍스트는 완전히 소외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점이다.2 덧붙여 <레베카>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부분은 바로 그 “주체”와 “타자”의 문제로, <레베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컨텍스트적인 맥락을 제하고 순수하게 캐릭터와 그들의 내적/외적 갈등에만 골몰하게 되는 구조에 가깝다.
한편, <서편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다. <서편제>에서는 컨텍스트적 맥락이 부각된다. 동호와 아버지 유봉의 갈등은 1960년대 전후(
戦後)로,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락(rock)과 판소리가 교차대비 되는 부분은 격동하는 전후 사회에 혼재하는 가치관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세상 바뀐 걸 모르는군!"
동호와 유봉의 외적갈등이 신()/구(),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물과 전통, 더 좁히면 미국과 한국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레베카>의 서사와 결을 달리하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컨텍스트가 중요해지는 작품인지 아닌 지와 같은 단순 대조점이라기보다도, <서편제>의 서사를 추동하는 적지 않은 부분이 이 컨텍스트적 맥락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항대립에 대한 해명에 불성실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좀 더 노골적으로 이항대립적 요소를 삽입한 건 어떤 필요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반에 언급했던 ‘서양의 음악예술공연에 전통국악을 주로 다루는 서사를 어떻게 접목시킬까’라고 하는 문제다. 프로듀싱을 하는 입장에서는 뮤지컬을 뮤지컬로 있게 하는 요소가 침해 받지 않을 만큼의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도사람들>이나 <서편제>(영화)는 둘 다 송화를 초점인물로 삼고 있어 득음하고자 유랑길에 오르는 부녀의 이야기가 주가 되고 있으므로,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올릴 경우 ‘뮤지컬의 형식을 빌린 전통공연’ 또는 ‘이도저도 아닌 뮤지컬’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다시 말해, 뮤지컬<서편제>는 바깥이야기의 화자가 되고 있는 동호의 비중을 늘리고 그러한 화자의 서사를 노골적으로 이항대립시켜 각색해 넣음으로써 공연 전체의 밸런스를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항대립이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친숙한 문법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다시 <서편제> 전체의 밸런스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서사적 측면에서도 현대인이 한 층 매끄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따라서 상기한 <서편제>에 삽입된 동호의 서사 부분은 그대로 <서편제>의 득과 실로 볼 수 있다. <서편제>의 이항대립과 컨텍스트의 문제는 서사를 한층 관람객들에게 매끄럽고 익숙하게 전달하며 극 전체의 밸런스를 잡아 안정시키고 있는 그 지점에 그치고 만다. 공연예술의 오락적인 측면에서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극히 서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호와 유봉의 교차대비는 극 중에서 킬링타임용 컨텐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비중에 대해서는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사실 상기한 내용은 문제에 핵심에 닿아있다고 보기에는 다소 엄밀하지 못하다. 좀 더 문제가 심화되는 부분은 이 다음부터다.

 

  1.  

<서편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캐릭터는 송화지만 극중 화자는 바로 동호다. 액자식구성의 바깥이야기 부분은 동호의 회고로 시작하고 있고 <서편제>는 동호가 송화와 재회하기까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안이야기로써 유봉과 송화와 동호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형식이다. 극 초반만해도 동호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데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인 동호에 초점을 맞춰 기승전결로 서사를 간결하게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아진다.


   (1)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생기고(기), 커져가고(승), 계속 증오하고(전), 증오했었다(결)

–한의 서사-

(2)누나 송화를 만났고(기), 따르며 좋아했고(승), 그리워했고(전), 만났다(결)

–정의 서사-


  각각은 다시<어머니를 여의면서 유봉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고(기), 판소리와 친해질 수 없었고(승), 결국 가출해서 스프링보이즈로 활동했고(전), 시간이 흘러 송화를 찾았다(결)>-판소리에 대한 서사- 와 조응한다. 서사를 다소 심심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부분은 역시 (1)과 같은 구조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MSG가 아무데도 없달까. 유봉이 죽는 장면은 사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정말로 허망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데, 유봉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으면서 동호의 증오도 함께 허무하게 증발해버린다. 극 초반에 "저 뜨거운 햇덩이가" "우리 엄마를 삼켜버린 저 뜨거운 햇덩이" 같은 분노와 증오로 폭발하던 동호는 유봉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후반부로 접어들면 동호의 송화에 대한 그리움이 극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상기한 '오누이의 끈끈한 정' 같은 것이다. 김 빠지는 대목이지 않을 수 없다. 증오하던 아버지가 죽어버리자 말 없이 증발해버린 증오심을 비롯해서 비단 동호뿐 아니라, 세월이 흐르자 "양놈 소리" 라고 비하하던 (양키)음악을 어영부영 따라부르는 아버지나, 눈에 염산을 넣어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미워할 거예요" 하다가도 어느새 스리슬쩍 용서해버린 송화까지. 세 인물의 갈등은 부지불식간에 해소되어 버린다. 물론 이런 갈등의 해소를 서양 근대소설이 가지는 양상과 다를 바 없이 치부해버려서는 곤란하다. 부지불식간에 해소되어버리는 갈등. 바로 이 지점이 <서편제>의 서사를 현대의 관람객들이 <레베카>와 같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서사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느끼도록 만들어버리면서, 동시에 '오누이의 애틋한 정'과 같이 <서편제>의 주제를 축소시켜 바라보게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서 짧게 적었지만, <서편제>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바로 정한이다. 극은 크게 정과 한이라는 정서를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서편제>의 서사에서 일견 갈등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방식은 바로 그 '한의 정서'를 담아낸 것이다.

 

  1.  

그런데 과연 '한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젊은이는 얼마나 있을까? 공감이라는 것도 너무 사치스러운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한의 정서'이라는 걸 젊은 세대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는 걸까?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한의 정서'를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못할 것이다"라든가, 극단적으로는 “’한’이라는 단어는 번역이 불가하다.”같은 얘기를 접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들은(물론 한국인이다) '한의 정서'에 얼마나 깊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은 어느 정도 머리 속으로는 '한'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익숙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와 같은 구절에서 가슴에 사무치는 극도로 억제된 감정을 진정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공감할 수 있는 한국어 네이티브는 젊은 세대일수록 적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한의 정서'를 학제교육을 통해 교육받아 아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일상에서 '한의 정서'를 빈번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어, 세대가 내려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서편제>의 서사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오누이의 애틋하고 끈끈한 정'과 같이 서사를 '정'쪽에 더 힘 실어 느끼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한국인은 젊은 세대 일수록 '한의 정서'를 잘 캐치하지 못한다. 가령 이별을 대하는 여성화자의 애티튜드만 봐도,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의 화자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라고 감정을 최대한 억제해서 억울함과 비통함, 슬픔의 정념을 마음 속 깊이 꾹꾹 눌러 담아 삭여낼 때, 2017년의 K-pop에서 선미는 "왜 예쁜 날 두고 가시나" 하면서 떠난 상대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보다 더 좋은 예시도 있다. 요 몇 년 사이 꾸준하게 인기 있는 ‘썰’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소위 ‘사이다썰’이라는 것인데, 인터넷 좀 하는 네티즌이 아니더라도 ‘사이다’라는 말은 이미 예능을 비롯해 잡지, 신문 등 종횡무진으로 쓰이고 있어 이미 누구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이다썰’의 7할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사이다썰’의 ‘고구마’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썰의 기와 승 또는 기, 승, 전까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이다’부분이 아닌 ‘고구마’부분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은 고구마를 한 100개쯤 먹은 것 같은 구간을 지나면서 목이 메이고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다가, 맨 마지막에서(전 또는 전, 결에 해당) 사이다를 한 사발 쭉 들이키는 것 같이 시원하게 폐부를 찌르는 ‘한 방’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해소감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사이다썰’로 현대의 한국인을 중독시켜버린 서사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어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확실히 ‘사이다썰’은 현대 한국인이 열광하는 서사임에 틀림없지만, ‘답답함-해소’라는 서사를 선호하는 대중의 심층을 면밀히 하지 않은 채, <서편제>의 서사는 현대의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일축해버린다면 검토는 피상적인 현상관찰에 머무를 뿐이다. 대중의 심층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대단한 얘기는 아니고, <서편제>의 주축이 되고 있는 ‘정한’과 같은 한국식 정서의 효력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반에 언급했던 동호의 서사 비중을 늘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로 “서사를 한층 관람객들에게 매끄럽고 익숙하게 전달”한다는 것 또한 일부 같은 맥락에 위치해 있는 이야기다.

 

  1.  

뮤지컬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태동해 6.25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부 주도로 뮤지컬 전문 악단이 <살짜기옵서예>나 <대춘향전>과 같은 전통음악과 미국식 대중음악을 어우르며 다양한 소재를 혼용하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장르에 비해 뮤지컬의 인기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을 그대로 초빙해 공연하는 일도 많아지고, 아예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한국어로 번안해 한국배우들이 상연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뮤지컬이라고 하면 흔히 라이선스 뮤지컬을 떠올리게 되었다. 일례로 ‘창작뮤지컬’이라는 조어는 있으나, 라이선스 계약한 뮤지컬에 대해서는 라이선스라든가 수입이라는 수식을 굳이 붙이지 않는다. 으레 번안 뮤지컬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번안 상연하고, 공연이 인기를 끎에 따라 대중이 빈번하게 접하고 익숙해져 가는 서사와 서사의 문법이 서양의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뮤지컬 내에서의 서양화(사실 서양화라는 워딩이 적절한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번안은 서양’화’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서양이기 때문이다)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물심양면으로 한국은 60년대를 거쳐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서양화) 되어갔다. 외부로부터 수입되는 문물과 사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이라든가 하는 주제는 이야기를 너무 멀리 돌아가게 하므로, 여기서 짧게 줄이자면 21세기의 한국은 이미 작은 서양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세계화’라는 것의 본질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공시적인 ‘영향’과 ‘수용’의 문제를 논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는 것이다. 조영일이 <세계문학의 구조>(2011)에서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관여하는 보편적인 감각은 ‘세계화’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한국 학교에서 교육받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과는 정면에서 배치되는 지점에 놓여있다. 한국 전통에 가까운 것일수록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낯선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3 그렇다면 다시 <서편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상기한 시점에서 볼 때, 현대의 한국 대중들에게(특히 젊은 세대 일수록) <서편제>의 ‘한의 정서’를 축으로 하는 서사는 시쳇말로 고구마만 100개고, 사이다는 1개도 없는 서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편제>의 관객 리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찾아보기 쉬운 감상평은 “유봉은 아동학대범” “부모 욕심이 앞서면 자식 앞길을 망친다” “유봉이형 삭히려면 홍어나 삭히지 왜 자꾸 한을 삭히라고 함”과 같은 관점으로 지극히 현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후기는 ‘정한’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와는 완벽하게 배치되는 시점의 감상평이다. 이러한 시점을 취하고 있는 관객에게 유봉-동호, 유봉-송화의 갈등과 갈등의 해소는 ‘어쩐지 찝찝한 것’이고, ‘똑 떨어지는’ 해명이 아닌 것이다.(찝찝하고 깔끔하지 못한 ‘한의 서사’의 결말에 비해 세월이 지나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끌어당기는 ‘오누이의 정’과 같은 서사는 오히려 알기 쉬운 편이다.) 원래 ‘한’이라는 정서는 깔끔하게 정리되는 감정이 아니다. 오세영은 김소월 연구에서 ‘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은 결코 통일된 혹은 해결된 감정일 수 없다. 그것은 복합된 갈등의 감정이며 동시에 미해결의 감정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야 될 상황인데도 속마음에서는 뒤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련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 도 없는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달리 설명하여 한이란 앞으로도 뒤로도 돌아올 수 없는 자기모순의 감정이다.4


물론 유봉과 송화 동호의 한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서편제>가 그리고 있는 인과에 대해 “슬프다”라고 공감을 표하고 있는 감상평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런 후기를 적는 관람객은 대체로 이미 초연부터 재연 삼연 잇따라 관람한 바 있거나, 3캐스팅 모두를 주행하거나 하는 식으로 수회(數回)에 걸쳐 <서편제>를 감상하는 일군(一群)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수회에 걸쳐 거듭 <서편제>를 주행하고 있는 일군은 이미 <서편제>가 그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반복적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왜 <서편제>는 비주류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분석과 검토에 완전히 적절한 기준점으로 삼기는 어렵다. 만일 <서편제>가 수출길에 올라 해외에서 국내 창작 뮤지컬로 선방하게 된다면, 아마 그 요인은 판소리와 상모돌리기, 북소리와 같은 이색적인(이국적인) 컨텐츠들이 삽입되어 있는 덕분일 것이고, 당연히 동호의 서사는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5 개인적으로는 국내에서는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 밸런스라고 생각하지만, <서편제>는 서사적인 면에서(좀 더 엄밀히 하자면 서사의 축이 되고 있는 ‘정한’이라는 정서적 측면에서)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 불리한 지형에 놓여있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편제>는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공연시장 안에서 핸디캡을 안고 <서편제>와 같은 국내 창작 뮤지컬이 사연까지 왔다는 점은 아무래도 고무적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과 같은 시점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와 전통 가락을 담고 있는 콘텐츠가 적지만 아직까지 꾸준히 살아남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다. 초연 재연 삼연 사연까지 거듭하며 각본을 고쳐 적고 밸런스를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내재화 된 타자(서양)’의 시점에 변수로서 작용할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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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 대해서는 더 길게 후술하겠지만 일단 먼저 간략하게 하자면, <서편제>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정한(情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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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굳이 1920년대의 유럽과 미국의 뭔가를 읽어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해석과는 결이 달라진다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텍스트의 복수성과 그 무한한 의미의 연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처음엔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하고 싶다.
3 이 ‘낯선 감각’의 양가성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적어볼 요량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프레이즈는 일제시대 항일운동 때부터 강조되어 온 조선의 단일민족 정신과 그에 따른 순혈주의, 외골수적 면모를 계승, 강화하는데 일조해 왔다. 이러한 폐쇄성은 표준 외의 모든 것들을 ‘아류’나 ‘규격외’로 낙인 찍는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게도 세계화의 발목을 잡는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근대화는 서양화)이나 그에 영향 받은 조영일과 같은 시점은(세계적인 감각은 전통과는 배치된다) 작금의 한국사회 전반에 수용되고 한층 활발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째서 세계화에 따른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은 유독 동양에만 두드러지는가. 고진은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파노프스키의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 게오르그 짐멜의 <풍경의 철학>을 빌어 “기하학적 원근법은 한 점에서 바라보는 투시도법”(30)이며, 또한 “<풍경>이란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되는>대상에 다름 아니다”(31)라고 지적한다. 즉, 기존의 문학사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시점을 통해 재배열, 재배치 되어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고진은 이러한 자연을 가장한 시점에 의한 배치를 해체시키고, 낱개의 독립적인 텍스트들을 비역사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을 단행한다. 그렇다면 유독 동양에 두드러진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이란 서양(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6.25이후부터 쭉 미국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물론 문화적인 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하에 놓여있으므로 미국이 되겠다)이라는 고정된 시점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의 자기인식에 다름아닌 건 아닐까. 즉 다시 말하자면, 동양의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은 ‘내재화된 타자(서양)’인 것이다. 따라서 동양이 서양적인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서양이 동양적인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각각을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으로 즉, 대상화된 실체로서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동양이 서양을 바라보는 시점에는 ‘주체’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4 오세영,「한의 논리와 그 역설적 의미」,『문학사상』,1976.
5 서양인에게는 그것이 ‘낯선 감각’으로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한 소재와 문법으로 전개되는 록큰롤과 동호의 서사는 사족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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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