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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전 가장 주안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역시 뮤지컬이라는 폼에 전통국악을 어떻게 접목시켰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배우가 뮤지컬 발성과 국악발성 둘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고……. 큰 틀은 뮤지컬이고 내용은 판소리하는 부녀지간 얘기라 적지 않은 비중의 판소리가 곁들어지는데 그 부분이 매우 신선하고 의외로 잘 어우러진다. 판소리가 생소하거나 멀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그냥 판소리를 무작정 찾아 듣기보다 <서편제>를 한편 보는 게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기에는 더 나을 것도 같다. 무대는 간단한 무대장치로만 효율적으로 운용돼서 나머지는 조명효과에 의지하는 부분이 컸지만, 그 부분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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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자꾸 되짚어보게 되는 쪽은 내러티브 쪽이다. 원작소설인<남도사람들>이나 영화화된<서편제>와 다르게 뮤지컬에서 동호(남자주인공)의 서사를 이항대립적으로 확장시켜서 부각되는 60년대의 전후(戦後) 공간 이외에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다소 심심하다. 오누이의 정? 사실상 그게 전부라고 할 수 있다.1 어쩌면 내가 바로 전에 본 공연이 <레베카>여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 일수도 있겠다. <레베카>와 <서편제>는 어떻게 보면 서사의 동력 측면에서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대조점이 <서편제>가 ‘안 팔리는 이유’와 맞물려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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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서편제>가 안 팔리는 이유로 가장 짐작해보기 쉬운 이유는 대중의 편견일 것이다. 국내창작 뮤지컬인데다가, 소재가 익숙하지 않은 판소리라고 하는데 선뜻 티켓을 구매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조금 믿고 볼만한 구석이라고 한다면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과, 같은 제목으로 개봉한 꽤 흥행한 영화가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어디서 이름만 들어본 소설이거나, 잘해야 줄거리 정도 꾀고 있거나, 흥행했다고는 하지만 본 적 없는 옛날 영화일 뿐이다. 지극히 타당하고 일리 있는 분석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된 걸까? 여기서는 <서편제>가 비주류인 이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론부터 말해두자면, 애초에 공연시장 자체가 <서편제>가 주류로 자리잡기에 불리한 조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서사를 중심으로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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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는 일인칭시점인 '나(Ich)'의 이야기로 시작한다.(물론 뮤지컬이라는 특성상, 시점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맨덜리에 도착한 이래로 초점인물인 ‘나’는 시종일관 레베카라는 강력한 대타자의 상징질서 안에서 점점 무력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윽고 댄버스부인(소타자)에 의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레베카>의 컨텍스트는 완전히 소외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점이다.2 덧붙여 <레베카>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부분은 바로 그 “주체”와 “타자”의 문제로, <레베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컨텍스트적인 맥락을 제하고 순수하게 캐릭터와 그들의 내적/외적 갈등에만 골몰하게 되는 구조에 가깝다.
한편, <서편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다. <서편제>에서는 컨텍스트적 맥락이 부각된다. 동호와 아버지 유봉의 갈등은 1960년대 전후(戦後)로,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락(rock)과 판소리가 교차대비 되는 부분은 격동하는 전후 사회에 혼재하는 가치관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세상 바뀐 걸 모르는군!"
동호와 유봉의 외적갈등이 신(新)/구(舊),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물과 전통, 더 좁히면 미국과 한국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레베카>의 서사와 결을 달리하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컨텍스트가 중요해지는 작품인지 아닌 지와 같은 단순 대조점이라기보다도, <서편제>의 서사를 추동하는 적지 않은 부분이 이 컨텍스트적 맥락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항대립에 대한 해명에 불성실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좀 더 노골적으로 이항대립적 요소를 삽입한 건 어떤 필요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반에 언급했던 ‘서양의 음악예술공연에 전통국악을 주로 다루는 서사를 어떻게 접목시킬까’라고 하는 문제다. 프로듀싱을 하는 입장에서는 뮤지컬을 뮤지컬로 있게 하는 요소가 침해 받지 않을 만큼의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도사람들>이나 <서편제>(영화)는 둘 다 송화를 초점인물로 삼고 있어 득음하고자 유랑길에 오르는 부녀의 이야기가 주가 되고 있으므로,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올릴 경우 ‘뮤지컬의 형식을 빌린 전통공연’ 또는 ‘이도저도 아닌 뮤지컬’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다시 말해, 뮤지컬<서편제>는 바깥이야기의 화자가 되고 있는 동호의 비중을 늘리고 그러한 화자의 서사를 노골적으로 이항대립시켜 각색해 넣음으로써 공연 전체의 밸런스를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항대립이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친숙한 문법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다시 <서편제> 전체의 밸런스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서사적 측면에서도 현대인이 한 층 매끄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따라서 상기한 <서편제>에 삽입된 동호의 서사 부분은 그대로 <서편제>의 득과 실로 볼 수 있다. <서편제>의 이항대립과 컨텍스트의 문제는 서사를 한층 관람객들에게 매끄럽고 익숙하게 전달하며 극 전체의 밸런스를 잡아 안정시키고 있는 그 지점에 그치고 만다. 공연예술의 오락적인 측면에서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극히 서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호와 유봉의 교차대비는 극 중에서 킬링타임용 컨텐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비중에 대해서는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사실 상기한 내용은 문제에 핵심에 닿아있다고 보기에는 다소 엄밀하지 못하다. 좀 더 문제가 심화되는 부분은 이 다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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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캐릭터는 송화지만 극중 화자는 바로 동호다. 액자식구성의 바깥이야기 부분은 동호의 회고로 시작하고 있고 <서편제>는 동호가 송화와 재회하기까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안이야기로써 유봉과 송화와 동호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형식이다. 극 초반만해도 동호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데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인 동호에 초점을 맞춰 기승전결로 서사를 간결하게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아진다.
(1)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생기고(기), 커져가고(승), 계속 증오하고(전), 증오했었다(결)
–한의 서사-
(2)누나 송화를 만났고(기), 따르며 좋아했고(승), 그리워했고(전), 만났다(결)
–정의 서사-
각각은 다시<어머니를 여의면서 유봉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고(기), 판소리와 친해질 수 없었고(승), 결국 가출해서 스프링보이즈로 활동했고(전), 시간이 흘러 송화를 찾았다(결)>-판소리에 대한 서사- 와 조응한다. 서사를 다소 심심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부분은 역시 (1)과 같은 구조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MSG가 아무데도 없달까. 유봉이 죽는 장면은 사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정말로 허망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데, 유봉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으면서 동호의 증오도 함께 허무하게 증발해버린다. 극 초반에 "저 뜨거운 햇덩이가" "우리 엄마를 삼켜버린 저 뜨거운 햇덩이" 같은 분노와 증오로 폭발하던 동호는 유봉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후반부로 접어들면 동호의 송화에 대한 그리움이 극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상기한 '오누이의 끈끈한 정' 같은 것이다. 김 빠지는 대목이지 않을 수 없다. 증오하던 아버지가 죽어버리자 말 없이 증발해버린 증오심을 비롯해서 비단 동호뿐 아니라, 세월이 흐르자 "양놈 소리" 라고 비하하던 (양키)음악을 어영부영 따라부르는 아버지나, 눈에 염산을 넣어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미워할 거예요" 하다가도 어느새 스리슬쩍 용서해버린 송화까지. 세 인물의 갈등은 부지불식간에 해소되어 버린다. 물론 이런 갈등의 해소를 서양 근대소설이 가지는 양상과 다를 바 없이 치부해버려서는 곤란하다. 부지불식간에 해소되어버리는 갈등. 바로 이 지점이 <서편제>의 서사를 현대의 관람객들이 <레베카>와 같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서사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느끼도록 만들어버리면서, 동시에 '오누이의 애틋한 정'과 같이 <서편제>의 주제를 축소시켜 바라보게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서 짧게 적었지만, <서편제>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바로 정한이다. 극은 크게 정과 한이라는 정서를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서편제>의 서사에서 일견 갈등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방식은 바로 그 '한의 정서'를 담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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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한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젊은이는 얼마나 있을까? 공감이라는 것도 너무 사치스러운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한의 정서'이라는 걸 젊은 세대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는 걸까?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한의 정서'를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못할 것이다"라든가, 극단적으로는 “’한’이라는 단어는 번역이 불가하다.”같은 얘기를 접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들은(물론 한국인이다) '한의 정서'에 얼마나 깊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은 어느 정도 머리 속으로는 '한'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익숙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와 같은 구절에서 가슴에 사무치는 극도로 억제된 감정을 진정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공감할 수 있는 한국어 네이티브는 젊은 세대일수록 적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한의 정서'를 학제교육을 통해 교육받아 아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일상에서 '한의 정서'를 빈번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어, 세대가 내려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서편제>의 서사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오누이의 애틋하고 끈끈한 정'과 같이 서사를 '정'쪽에 더 힘 실어 느끼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한국인은 젊은 세대 일수록 '한의 정서'를 잘 캐치하지 못한다. 가령 이별을 대하는 여성화자의 애티튜드만 봐도,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의 화자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라고 감정을 최대한 억제해서 억울함과 비통함, 슬픔의 정념을 마음 속 깊이 꾹꾹 눌러 담아 삭여낼 때, 2017년의 K-pop에서 선미는 "왜 예쁜 날 두고 가시나" 하면서 떠난 상대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보다 더 좋은 예시도 있다. 요 몇 년 사이 꾸준하게 인기 있는 ‘썰’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소위 ‘사이다썰’이라는 것인데, 인터넷 좀 하는 네티즌이 아니더라도 ‘사이다’라는 말은 이미 예능을 비롯해 잡지, 신문 등 종횡무진으로 쓰이고 있어 이미 누구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이다썰’의 7할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사이다썰’의 ‘고구마’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썰의 기와 승 또는 기, 승, 전까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이다’부분이 아닌 ‘고구마’부분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은 고구마를 한 100개쯤 먹은 것 같은 구간을 지나면서 목이 메이고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다가, 맨 마지막에서(전 또는 전, 결에 해당) 사이다를 한 사발 쭉 들이키는 것 같이 시원하게 폐부를 찌르는 ‘한 방’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해소감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사이다썰’로 현대의 한국인을 중독시켜버린 서사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어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확실히 ‘사이다썰’은 현대 한국인이 열광하는 서사임에 틀림없지만, ‘답답함-해소’라는 서사를 선호하는 대중의 심층을 면밀히 하지 않은 채, <서편제>의 서사는 현대의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일축해버린다면 검토는 피상적인 현상관찰에 머무를 뿐이다. 대중의 심층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대단한 얘기는 아니고, <서편제>의 주축이 되고 있는 ‘정한’과 같은 한국식 정서의 효력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반에 언급했던 동호의 서사 비중을 늘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로 “서사를 한층 관람객들에게 매끄럽고 익숙하게 전달”한다는 것 또한 일부 같은 맥락에 위치해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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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태동해 6.25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부 주도로 뮤지컬 전문 악단이 <살짜기옵서예>나 <대춘향전>과 같은 전통음악과 미국식 대중음악을 어우르며 다양한 소재를 혼용하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장르에 비해 뮤지컬의 인기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을 그대로 초빙해 공연하는 일도 많아지고, 아예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한국어로 번안해 한국배우들이 상연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뮤지컬이라고 하면 흔히 라이선스 뮤지컬을 떠올리게 되었다. 일례로 ‘창작뮤지컬’이라는 조어는 있으나, 라이선스 계약한 뮤지컬에 대해서는 라이선스라든가 수입이라는 수식을 굳이 붙이지 않는다. 으레 번안 뮤지컬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번안 상연하고, 공연이 인기를 끎에 따라 대중이 빈번하게 접하고 익숙해져 가는 서사와 서사의 문법이 서양의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뮤지컬 내에서의 서양화(사실 서양화라는 워딩이 적절한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번안은 서양’화’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서양이기 때문이다)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물심양면으로 한국은 60년대를 거쳐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서양화) 되어갔다. 외부로부터 수입되는 문물과 사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이라든가 하는 주제는 이야기를 너무 멀리 돌아가게 하므로, 여기서 짧게 줄이자면 21세기의 한국은 이미 작은 서양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세계화’라는 것의 본질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공시적인 ‘영향’과 ‘수용’의 문제를 논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는 것이다. 조영일이 <세계문학의 구조>(2011)에서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관여하는 보편적인 감각은 ‘세계화’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한국 학교에서 교육받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과는 정면에서 배치되는 지점에 놓여있다. 한국 전통에 가까운 것일수록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낯선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3 그렇다면 다시 <서편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상기한 시점에서 볼 때, 현대의 한국 대중들에게(특히 젊은 세대 일수록) <서편제>의 ‘한의 정서’를 축으로 하는 서사는 시쳇말로 고구마만 100개고, 사이다는 1개도 없는 서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편제>의 관객 리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찾아보기 쉬운 감상평은 “유봉은 아동학대범” “부모 욕심이 앞서면 자식 앞길을 망친다” “유봉이형 삭히려면 홍어나 삭히지 왜 자꾸 한을 삭히라고 함”과 같은 관점으로 지극히 현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후기는 ‘정한’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와는 완벽하게 배치되는 시점의 감상평이다. 이러한 시점을 취하고 있는 관객에게 유봉-동호, 유봉-송화의 갈등과 갈등의 해소는 ‘어쩐지 찝찝한 것’이고, ‘똑 떨어지는’ 해명이 아닌 것이다.(찝찝하고 깔끔하지 못한 ‘한의 서사’의 결말에 비해 세월이 지나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끌어당기는 ‘오누이의 정’과 같은 서사는 오히려 알기 쉬운 편이다.) 원래 ‘한’이라는 정서는 깔끔하게 정리되는 감정이 아니다. 오세영은 김소월 연구에서 ‘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은 결코 통일된 혹은 해결된 감정일 수 없다. 그것은 복합된 갈등의 감정이며 동시에 미해결의 감정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야 될 상황인데도 속마음에서는 뒤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련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 도 없는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달리 설명하여 한이란 앞으로도 뒤로도 돌아올 수 없는 자기모순의 감정이다.4
물론 유봉과 송화 동호의 한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서편제>가 그리고 있는 인과에 대해 “슬프다”라고 공감을 표하고 있는 감상평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런 후기를 적는 관람객은 대체로 이미 초연부터 재연 삼연 잇따라 관람한 바 있거나, 3캐스팅 모두를 주행하거나 하는 식으로 수회(數回)에 걸쳐 <서편제>를 감상하는 일군(一群)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수회에 걸쳐 거듭 <서편제>를 주행하고 있는 일군은 이미 <서편제>가 그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반복적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왜 <서편제>는 비주류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분석과 검토에 완전히 적절한 기준점으로 삼기는 어렵다. 만일 <서편제>가 수출길에 올라 해외에서 국내 창작 뮤지컬로 선방하게 된다면, 아마 그 요인은 판소리와 상모돌리기, 북소리와 같은 이색적인(이국적인) 컨텐츠들이 삽입되어 있는 덕분일 것이고, 당연히 동호의 서사는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5 개인적으로는 국내에서는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 밸런스라고 생각하지만, <서편제>는 서사적인 면에서(좀 더 엄밀히 하자면 서사의 축이 되고 있는 ‘정한’이라는 정서적 측면에서)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 불리한 지형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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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편제>는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공연시장 안에서 핸디캡을 안고 <서편제>와 같은 국내 창작 뮤지컬이 사연까지 왔다는 점은 아무래도 고무적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과 같은 시점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와 전통 가락을 담고 있는 콘텐츠가 적지만 아직까지 꾸준히 살아남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다. 초연 재연 삼연 사연까지 거듭하며 각본을 고쳐 적고 밸런스를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내재화 된 타자(서양)’의 시점에 변수로서 작용할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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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 대해서는 더 길게 후술하겠지만 일단 먼저 간략하게 하자면, <서편제>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정한(情恨))'이다.
2 물론 굳이 1920년대의 유럽과 미국의 뭔가를 읽어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해석과는 결이 달라진다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텍스트의 복수성과 그 무한한 의미의 연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처음엔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하고 싶다.
3 이 ‘낯선 감각’의 양가성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적어볼 요량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프레이즈는 일제시대 항일운동 때부터 강조되어 온 조선의 단일민족 정신과 그에 따른 순혈주의, 외골수적 면모를 계승, 강화하는데 일조해 왔다. 이러한 폐쇄성은 표준 외의 모든 것들을 ‘아류’나 ‘규격외’로 낙인 찍는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게도 세계화의 발목을 잡는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근대화는 서양화)이나 그에 영향 받은 조영일과 같은 시점은(세계적인 감각은 전통과는 배치된다) 작금의 한국사회 전반에 수용되고 한층 활발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째서 세계화에 따른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은 유독 동양에만 두드러지는가. 고진은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파노프스키의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 게오르그 짐멜의 <풍경의 철학>을 빌어 “기하학적 원근법은 한 점에서 바라보는 투시도법”(30)이며, 또한 “<풍경>이란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되는>대상에 다름 아니다”(31)라고 지적한다. 즉, 기존의 문학사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시점을 통해 재배열, 재배치 되어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고진은 이러한 자연을 가장한 시점에 의한 배치를 해체시키고, 낱개의 독립적인 텍스트들을 비역사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을 단행한다. 그렇다면 유독 동양에 두드러진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이란 서양(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6.25이후부터 쭉 미국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물론 문화적인 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하에 놓여있으므로 미국이 되겠다)이라는 고정된 시점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의 자기인식에 다름아닌 건 아닐까. 즉 다시 말하자면, 동양의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은 ‘내재화된 타자(서양)’인 것이다. 따라서 동양이 서양적인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서양이 동양적인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각각을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으로 즉, 대상화된 실체로서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동양이 서양을 바라보는 시점에는 ‘주체’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4 오세영,「한의 논리와 그 역설적 의미」,『문학사상』,1976.
5 서양인에게는 그것이 ‘낯선 감각’으로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한 소재와 문법으로 전개되는 록큰롤과 동호의 서사는 사족이 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