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일단 빌리 엘리어트가 억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므로 길게 적지 않으려 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내러티브 곳곳에는 억압과 저항이 대비되며 나타나고 있다. 가령 작중 초반에 나타나는 대처주의에 의한 경찰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은 국가에 의한 억압과 노동자계층의 저항에 대한 이야기이며, 남자는 복싱을 배워야하고 여자는 발레를 배워야한다는 성 역할 구분 또한 대립되는 것이고, 마이클이 여자 옷을 입는 것에 대해 처음에 빌리가 '진짜 졸라 이상해, 너 게이야?'라고 묻는 행위 또한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복싱과 발레 같은 경우는 한층 내밀하게 파고 들면 복싱은 노동자계급의, 발레는 중산층 이상 계급의 전유물로 노동자계층의 자녀인 빌리가 발레의 세계로 편입되는 과정 자체는 사회의 구조적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복싱이 '뭐가 미안해! 복싱은 원래 그런거야!(때리는 거야!)'라는 대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의 대처주의로 대표되는 영국의 신자유주의의 고단함, 피로함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아버지가 두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장면 또한 억압과 저항으로 카테고라이즈 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억압이란 무엇에 대한 억압이고, 저항이란 무엇에 대한 저항이며, 자유란 무엇에 대한 자유를 말하는 것일까?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1.
빌리 엘리어트의 주제는 쉽고 간결하다. '춤이 태초의 본성을 끌어내는' 행위라면 작중에서 춤이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의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빌리가 춤을 추며 와이어를 달고 하늘을 나는 퍼포먼스는 '자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빌리 엘리어트>에서의 자유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을>자유를 뜻한다. 반대로 억압이란 <내가 나로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빌리의 세계관 안에서 태초의 인간은 자유롭다. 그런데 그들은 사회 구조에 편입되며 사회화 되는 과정 등으로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자유>를 억압당한다. 이미 선술한 문장에 답이 나와 있는 듯하지만 사람은 '기투된 존재'고 사회는 '구조화' 되어 있기에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 환상에 가깝다.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는 대략 이런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리 엘리어트>에서 말하는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는 환상으로서의 자유인가?
2.
나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선 그렇다, 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구조화'라고 하는 메타적인 차원에서의 자유란 원래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오롯하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안에 자리지워져 있다고 하는 구조화 이론에서 인간의 자유란 한정적인 것이고 개인이란 그 구조 안에서 조건지워진 존재에 불과하다. 빌리의 주제를 좀 더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시 바꿔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나로 보아주세요. 나를 '대상화'하지 말아주세요>가 될 것이다. 그런데 대상화 되지 않는 삶이란 가능한가. 인간이 보는 타인이란 대체로 그 인간에 대한 환상이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나는 타인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고, 타인 <그 자체>라기 보다 그러한 타인이 가진 속성과 이미지를 타인으로 오인한다. 물론 '대상화'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견이 어떠한 지점에서 발생하게 되는지를 충분히 인지한 후에 쓰는 글이라는 점을 양해바란다.
3.
어쨌든 그런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는 그 조건지워진 안에서 분투하는 일종의 시지프스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빌리와 친구들이 세간에 존재하는 모럴과 대립하는 동안에는 그는 자유로운 인간일 것이다. 즉,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세요>라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빌리와 친구들은 자유로운 인간인 것이다. 이것이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에 대한 답이다. 시지프스가 산 정상으로 그 커다란 돌덩이를 굴리고, 또 굴리면 정상에 올라간 돌덩이는 다시 시지프스 위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다시 그 돌덩이를 산 정상으로 굴린다. 인간의 삶이 구조지워져 있다는 건 이러한 시지프스의 삶처럼 계속해서 돌을 굴릴 수 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굴러떨어지는 돌덩이를 반복해서 굴리는 시지프스의 삶을 우리는 부자유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4.
다시 작중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이클이나 마이클의 아버지처럼 남자가 여자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는 동성이 동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것, 발레는 중산층 이상의 여자만의 전유물이라는 것, 발레복 아래에 토슈즈가 아닌 탭댄스 신발을 신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대상화'이며 사회화란 말하자면 이러한 사회적 모랄의 부역자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주인공 빌리와 빌리를 승인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어린이>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어린이>라는 위치가 이러한 사회적 모랄이 아직 그들의 중심에 자리하기 이전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 공연의 내러티브가 빌리의 형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이다.
5.
초반 작중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상화'의 부역자이고, 누구보다 세상에 거칠게 <저항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걸고 지킨 가치는 곧 몰락하고 광산은 국유화되고 만다. <빌리 엘리어트>의 무엇보다 훌륭한 점이 있다면 주인공 빌리를 그저 억압에 저항하는 존재로만 그려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저항하는 부역자'라는 형의 지위는 저항에 갇혀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물의 한계상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빌리의 저항은 형에 저항과 달리 <저항함>에 함몰되지 않고 억압을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서 자유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 바로 발레라는 소재다. 복싱과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발레 라는 소재는 인간이 인간되지 않음을 수행함으로서 '미'라는 가치를 획득하는 예술 장르다. 저항이라는 것도 결국은 억압의 극단에 있는 삶에 골몰한 형태의 하나일 뿐, 저항 그 자체는 자유가 되지 못함을 빌리는 발레로 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빌리의 발레는 더욱 빛나고 아름다우며 가치있는 것은 아닐까.
6. 마지막으로 <나를 대상화 하지 말아주세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아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빌리의 치명적인 윤리적 오류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렇다.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그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애 한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로 열고 '엄마에게 쓰는 답장'으로 닫는 빌리의 코 끝 시큰시큰한 내러티브는 과연 빌리를 <있는 그대로>보고 있는가? 빌리가 대단히 훌륭한 웰메이드 뮤지컬이라는 점에는 한 점의 의심이 없지만 극의 내러티브며, 관객들이 그 내러티브를 소비하는 애티튜드까지를 아울러서 <빌리 엘리어트>는 아동혐오적이다. 이 뮤지컬은 어린이는 순수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하며, 어머니가 없으면 선생님과 같은 유사 어머니의 손길이 없어서는 안된다, 라는 메시지를 내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상술한 열거를 전면에서 모두 부정할 생각은 없다. 어린이는 순수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있고, 누군가가 그의 자립을 도와주지 않으면 생활이 곤란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린이가 갖는 <이미지>가 전술한 사회적 모랄(어떠한 정상성이라고 보아도 무관하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한 언어도단일 것이다. 흔히들 어른들은 말한다. <애는 애다워야 한다>고. <빌리 엘리어트>의 주연들은 '귀엽다'고. 아동의 어리숙함이나 미숙함을 귀여움으로 소비하는 것 자체가 '대상화'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곧 <빌리 엘리어트> 안에서 은폐되고 만다. '어린데 대단하다'. 어리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만큼이나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7. 딱히 관객들이 <빌레 엘리어트>를 소위 '착즙'하는 행태에 대해 꼬집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왕 착즙할거면 착즙인 줄은 알고 하자는 두서없는 리뷰였다. 억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적지 않으려고 했던 것에 비해서는 굉장히 길어져버렸다. 두서없는 리뷰에 양해를 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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