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나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도 구제할 길이 없는 좆창난 인간들이 한심했다. 죽음을 바라마지 않으면서 죽지 못해 사는 망령이 진심반 자조반으로 떠드는 죽음이 하찮았다. 결국은 살고 있으면서 죽음을 바라마지 않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건지 괴로웠다. 어느 때의 나를 겨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난 (이제 더이상) 아니야, 가 바로 공격성으로 드러났다. 알기쉬운 공격성이었다.
그 때(라고 해봤자 불과 얼마 전이지만)를 떠올릴만한 건덕지만 보여도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잘 살고 싶었으니까.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노력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닌 삶은 내 주위에 산재해 있고 바로 가까이에도 있었다. 나는 아마도 무서웠던 것 같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불일치한 삶이, 나를 또 덮쳐올가봐. 내가 또 사는 게 버겁고 힘들어질까봐, 다 내려놓고 싶을까봐,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실까봐, 그러다 어느날 재미도 슬픔도 모두 메말라버릴까봐,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나보다.
나는 열심히 씩씩하게 살고 싶다. 노력으로 일군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손에 쥐고 기뻐하고 싶다. 그리고 주변과 그 시시한 것들을 나누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지만 어딘가에는 그렇지 않은 삶이 산재해있다는 거, 그리고 그 보잘 것 없는 삶 또한 그 보잘 것 없음으로 거기에 있다는 것. 그녀가 내게 남긴 건 그런 하찮고 시시하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 남자친구는 내게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도 있어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가엾다. 가엾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가엾지 않아지는 건 아니었다. 가엾은 채로 보잘 것없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지 보잘 것 없는 걸 포기할지, 포기당할지 일 뿐.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그녀의 실천이었고 이제는 그 실천을 내 애도의 방식으로 삼고자 한다. 물론 순전히 내 멋대로, 내 욕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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