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구조주의가 문학 비평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화 비평은 문학 연구 방법론 가운데에서 가장 야심만만하고 도전적인 방법론이었다. 어느 특정한 한 가지 방법론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점에서 신화 비평은 가히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지닌다. 가령 문화인류학·심리학·비교종교학·역사·철학·예술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서 이룩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삼아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화 비평은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른 영역에서 갖가지 방법론을 끌어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특유의 방법론을 세우려는 신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흔히 신화 비평을 두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원적이지만 확신에 있어서는 일원론적이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화 비평과 타 비평과의 상관성>
신화 비평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 지성사, 문학 전통, 영향 관계 따위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역사 비평과 닮은 데가 많다. 신화 비평은 형식주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구성 및 개별적인 작품의 구성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상징과 이미지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텍스트 분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한편 공동 사회의 집단적 경험을 다루는 신화 비평 방법은 사회학적 비평 방법처럼 사회적 인습과 전통, 제도, 가치 그리고 신념 따위를 파헤치는 데에 주력한다. 그런가 하면 적어도 문학 작품을 공시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기본적인 모티프나 패턴을 분석하여 작품의 구조를 밝혀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구조주의 비평 방법과도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다.
<’신화 비평 방법’과 ‘심리주의 비평 방법’과의 유사성>
어떤 의미에서 신화 비평 방법은 심리주의 비평에서 갈라져 나온 방법론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몇몇 이론가들은 신화 비평을 심리주의 비평이나 정신분석 비평의 한 갈래로 간주하여 이 방법론에 넣기도 한다. 민속 신앙의 기원을 다루는 저서『토템과 터부』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친족 살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는 사회 조직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신화 비평에 처음으로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해주었다. 신화 비평을 굳건한 위치에 올려놓은 칼 구스타프 융은 다름아닌 프로이트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크다.
무엇보다도 문학을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고 독자들에게 그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켜주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신화 비평 방법과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큰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신화 비평 방법은 심리주의 비평 방법처럼 문학 작품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인간의 비이성적 요소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이 두 비평 이론에 따르면 신화와 꿈 그리고 문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신화 비평 방법은 흔히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나 정신분석 비평 방법에서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신화 비평 방법’과 ‘심리주의 비평 방법’과의 상이점>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 인간의 행동 근저에 있는 동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신화 비평 방법은 그러한 동기가 투사되는 상징적 형태나 구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다. 또한 실험적이고 진단적인 성격을 지니는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 생물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반면, 좀 더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지니는 신화 비평 방법은 종교나 인류학 또는 문화사 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개인의 내면적 세계나 인성을 밝혀내는 데에 치중하는 심리주의 비평과는 달리, 신화 비평은 한 민족이나 인류 전체의 집단적 성격이나 정신을 밝혀내는 데에 비중을 둔다. 심리학 이론에 기대면서도 심리주의 비평이 주로 심층심리학에 기초를 두는 반면, 신화 비평은 오히려 분석심리학에 기초를 둔다. 그리고 신화 비평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신경 질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질병을 치료하는 샤먼이나 신화를 창조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신화 비평 방법의 역사>
이렇듯 단일하거나 통일된 접근 방법이 아니라 가장 잡종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지니는 신화 비평은 다른 연구 방법론과 비교하여볼 때에 그 역사가 그렇게 오래지 않다. 역사 비평이나 형식주의 비평 또는 심리 비평과 같은 다른 접근 방법처럼 신화 비평 방법 또한 까마득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들에게서 이렇다 할 만한 경향이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방금 앞에서 말하였듯이 본격적인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신화 비평 방법은 심리학을 비롯한 문화인류학이나 비교종교학, 특히 신화학과 같은 현대 학문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시기를 아무리 일찍 잡는다고 하더라도 신화 비평은 기껏해야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
1. 신화 비평 방법의 밑거름이 된 문화인류학
20세기 초엽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제인 해리슨들과 같은 흔히 ‘헬레니스트들’ 또는 ‘케임브리지 제의 학파’로 일컫는 학자들이 나타나 문화인류학 분야에 그야말로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였다. 한편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길버트 머레이와 같은 학자들이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문화를 연구하여 1)제의(祭儀)가 신화나 종교에 앞선다, 2)신화는 제의를 언어로 표현한다, 3)신화는 그 자체로써 정체성과 기원을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론은 후일 신화 비평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이론적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중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유명한 저서『황금의 가지』에서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민속·마술·종교애 대한 비교학적 연구를 통하여 이교도의 원시 문화와 기독교 문화 사이에는 얼핏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유사점이나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이 분야에서 기념비적 업적이라고 할 만한 이 저서는 20세기 문학은 물론이고 20세기 지성사 전반에 걸쳐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2.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의 영향
문화인류학자들과 함께 스위스 태생의 심리학자 융 또한 신화비평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융은 한편으로는 그의 스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였다. 이미 신화 비평 방법과 관련하여 앞장에서 말하였듯이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 영역을 크게 의식과 전(前)의식 그리고 무의식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이 인간 행위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보려는 입장에 대하여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융은 인간 정신을 1)의식, 2)개인 무의식, 그리고 3)집단 무의식의 세 갈래로 구분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이 융의 이론에서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의 두 유형으로 다시 나누어진 셈이다.
1)개인 무의식
사회 인습이나 터부 때문에 억압되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지 못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충동·욕망·공포·열정·비이성적인 생각 따위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흔히 꿈이나 말 실수, 농담, 비이성적인 행위, 또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 등을 통하여서 표현되기 일쑤이다. 의식 표면의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 무의식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서만 그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개인 무의식은 실제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집단 무의식
의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개인적 무의식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는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인류의 집적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이미지를 저장하는 곳을 가리킨다. 융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이 무의식을 지니고 있듯이 한 민족, 더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 또한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 인간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심리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인간 정신은 ‘백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육체처럼 정신은 미리 설정된 행동 양식이라는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양식은 영원히 반복하는 심리적 기능의 패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융의 이러한 태도는 인간이 백지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주장한 존 로크의 그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3)’원형’의 개념
융의 이론 가운데에서도 ‘원형’의 개념이 심리 비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놀랍게도 세계 전역에 걸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신화나 이야기에 대하여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동일한 신화나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 인류의 과거 기억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는 집단 무의식 속에 과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탓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잇는 서로 다른 신화이면서도 비슷한 모티프나 패턴 또는 주제를 지닌다. 융은 이러한 패턴이나 모티프 또는 주제를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원형은 상속받은 관념의 패턴이나 철학적 사고보다는 오히려 자극이 주어질 때에 비슷한 식으로 반응하는 성향, 그러니까 ‘상속받은 심리적 행동 양식’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의 활동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원형은 문학에서 흔히 되풀이되는 플롯 패턴이나 이미지 또는 유형의 형태로 나타난다. 융에 따르면 이 원형은 집단 무의식에 저장되어 잇는 이미지를 일깨워줌으로써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들한테서 심오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신화 비평가들에 따르면 문학 작품의 위대성은 역사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에 있지도 않고, 형식주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복잡한 언어 구성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오로지 어떻게 원형과 경험을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문학 작품이 주는 감흥과 호소력은 꿈과 같은 차원에서 비롯된다고 융은 말한다.
4)’개별화 이론’
융의 ‘개별화 이론’ 또한 신화 비평 방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별화란 심리적 성장, 곧 한 개인이 다른 사회 구성원과 구별되는 자아의 양상을 발견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기 인식에 이르는 이 과정은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균형 잡힌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에서 실패할 때에 그 개인은 불안 초조나 우울증과 같은 신경질환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1)인간의 개별화 과정과 관련한 세 가지 정신 요소
①‘그림자’ : 무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면을 가리킨다. 인성의 열등하고 위험한 모습으로서 억압하고 싶은 측면이다. 융은 이 그림자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아직도 뒤에 달고 다니는 원숭이 꼬리에 견준 적이 있다.
예) 서양 문학에서 그림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 펠레스, 존 밀턴의『실락원』에 나오는 사탄, 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와 같은 인물을 통하여 나타난다.
②‘아니마’ (여성의 경우에는 ‘아니무스’) : ‘영혼-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아니마는 생명력을 가리킨다. 남성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여성적인 원리다. 한편 아니마는 에고(의식적 의지나 사고하는 자아)와 무의식이나 내면 세계 사이의 중재자 구실을 한다.
예)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헬렌이나, 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 밀턴의『실락원』에 등장하는 이브 등을 통하여 나타난다.
③‘퍼소나’ : 아니마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는 퍼소나는 에고와 외부 세계를 중재한다는 점에서 아니마와는 대립된다. 어원에서 볼 때에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갈라져 나온 퍼소나는 외부 세계에 보여주는 배우의 가면과 같은 구실을 한다. 사회적 인성으로서 그것은 때로는 진정한 자아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문화인류학자들과 칼 융이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해준 신화 비평은 20세기 중엽에 들어와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캐나다의 문학 이론가 노스롭 프라이는『비평의 해부』를 출간하면서 신화 비평을 확고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지금은 고전이 되다시피 한 이 책에서 그는 신화를 문학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룬다. 그에 따르면 신화는 곧 문학 형식의 구조적 조직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화비평 방법의 목적>
신화 비평은 문학 작품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신화적 패턴, 즉 원형을 구현한다는 전제에 뿌리를 둔다. 가장 실험적인 작가들조차도 옛날 이야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경험의 연속성에 눈을 돌리다. 신화 비평은 문학에 나타나는 원형적인 패턴을 찾아내고 이러한 패턴이 어떻게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 그리고 효과에 이바지하는가를 밝혀내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한마디로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인간성을 탐구하려고 한다. 신화 비평을 흔히 ‘원형 비평’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일 신화’ 또는 ‘원(源)신화’의 개념>
그들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는 오직 한 가지 원형을 다루게 마련이다. 나머지 신화들은 모두 이 단일 신화나 원 신화에서 갈라져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프레이저와 조셉 캠벨한테서 영향을 받은 많은 신화 비평가들은 통과 의례와 계절의 변화를 비롯하여 영웅이나 신에 관한 이야기에서 단일 신화를 찾는다. 어떤 비평가들은 처형과 부활, 특히 ‘신성한 왕의 처형’을 기술하는 신화나, 속죄양과 관련한 희생 의례에서 찾으려고 한다. 프라이를 비롯한 또 다른 비평가들은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에서 찾는다. 그런가 하면 로버트 그레이브스와 같은 이론가는 달과 연관된 여성 원리에서 찾기도 한다.
<지리적 여정을 통한 ‘추적이나 추구’>
영웅이나 신을 둘러싼 신화나 정체성의 회복과 같은 원형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결국 이 원형에 포섭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추적이나 추구의 원형은 여러 형태를 통하여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 그리스 신화에서 제이슨이 아르고스호를 타고 황금의 양털을 찾아 헤매는 것, 구약성서에 기록된 모세가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것, 중세기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서 왕 전설에서 녹색 기사가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서 여행하는 것, 파르시팔이 성배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 신비스런 환상의 섬을 찾아 헤매는 전설 등.
이 신화적 원형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여행 과정에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고 마침내 그들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음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속하여 있는 사회에 안녕과 질서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 준다.
<’추적이나 추구’의 모티프에 나타나는 공통점>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나 전설 또는 민담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되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1. 아들(때로는 딸)은 부모가 기르지 않거나 오직 어머니 혼자서 기를 뿐이다.
2.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나 태어난 직후에 집을 나간다.
3. 아들은 비록 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지만 아버지에게 자식임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징표를 가지고 있다.
4. 갖은 역경 끝에 아들은 아버지를 찾게 되지만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행복하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때로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때가 더 많다. 싸움을 시작할 때에 그들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일쑤이고, 아버지의 정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탓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신화의 주인공들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유>
신화적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곧 기원이 없다는 것을 뜻하고, 기원이 없다는 것은 곧 공동 사회의 구성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동질성을 중시하는 공동 사회에서 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구성원들과 다르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없는 주인공은 공동 사회로부터 조롱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국외자로 취급되어 궁극적으로는 버림받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신화의 주인공들이 아버지를 찾아 험난한 길을 떠나는 것은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의에 의한 것이다.
<시대에 따른 ‘추적이나 추구’ 모티프의 변모>
이 모티프는 고대에는 그 자체로서 아주 중요한 신화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그 의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에 이르러서는 모험담으로 바뀌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교훈적인 작품으로 바뀌었다. 최근에 이르러 이 모티프는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문학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청춘』이나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현대 작가들은 주인공이 자기 실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모티프를 즐겨 쓴다. 많은 비평가들이 흔히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르는『율리시스』는 젊은 예술가 지망생 스티븐 디덜러스가 정신적 아버지를 찾아 하루종일 더블린 시내를 헤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마침내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상징적인 아버지를 만나는 주인공은 자기 인식에 이른다.
<희생양 신화>
서구의 신화에서 희생양은 아주 중요한 모티프 가운데 하나이고 그것은 문학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희생양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까마득히 먼 구약성서와 만나게 된다.「레위기」16장 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론에게 염소를 잡아 그 짐승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담아 황야로 내쫓아버릴 것을 명령한다. 그러니까 염소는 인간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희생물에 해당하는 셈이다. 몇몇 신화학자들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희생양이란 한 종족이나 인류의 죄를 성스러운 동물이나 인간에게 뒤집어 씌운 다음 그 동물이나 그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회 질서를 새롭게 하는 정화 의식이요, 인간의 죄를 씻는 속죄 의식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풍요와 인간의 다산을 비는 제의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렇듯 희생양 신화에서는 개인의 운명은 사회의 운명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몇몇 이론가들은 신화 비평을 ‘제의 비평’ 또는 ‘토템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신화 비평에 있어서의 ‘물’>
신화적 관점에서 보면 물은 삶의 근원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원형적 상징인 물은 곧 창조의 신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바닷물은 흔히 ‘생명의 어머니’로 일컬어질 만큼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한자어로 ‘바다해(海)’자에 ‘어미모(母)’자가 들어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렇듯 우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바다는 곧 여성 원리를 상징한다. 실제로 많은 생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다름아닌 바닷물에서 찾는다. 사람의 몸에 생명체가 잉태되면 양수(羊水)라고 하는 물 속에서 자라난다. 인간이 물에 대하여 강한 유혹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고향인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신화학자도 있다.
<신화 비평에 있어서의 ‘동굴이나 지옥과 같은 지하세계’>
1. 동굴의 경우
호메로스나 플라톤을 일찍이 동굴을 환상, 무지, 원시성, 단순성, 동물적 차원의 삶, 영혼의 어둠 따위 지극히 부정적인 차원에서만 보았다. 특히 플라톤은 동굴 안의 어둠이 무지를 상징하는 반면 동굴 밖의 빛은 지식과 진선미를 상징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한편 동굴은 성적(性的)함축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흔히 이 동굴 안에서 동물적 차원의 열정에 사로잡히는가 하면,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완벽한 사랑의 극치를 맛본다. 그런가 하면 동굴은 여성의 자궁처럼 새로운 생명체가 잉태되어 자라나는 장소 구실을 하기도 한다. 고대 신화에서 많은 신들이 동굴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양육된다. 이렇듯 동굴은 부정적 측면에 못지않게 긍정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2. 지하세계의 경우
지하세계로의 하강은 신화적 영웅이 성장하는 데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지하 세계로의 상징적 여행을 통하여 그는 비로소 정신적으로 자랄 수 있다. 가령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도,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의 주인공 아이네이아스도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지하 세계에 내려간 다음 다시 지상 세계로 올라온다. 단테가『신곡』을 지상편이나 천상편에서 시작하지 않고 굳이 지옥편에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처형된 다음 천국에 올라가기에 앞서 먼저 지옥에 내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탓에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구약성서의 선지자들과 가부장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라고 흔히 일컬어진다. 예수의 이 행적은 흔히 ‘신앙 고백’으로 일컫는「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장사한 지’라는 표현과 ‘사흘 만에’라는 표현 사이에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표현이 더 나온다. 아마 예수가 지옥에 내려간다는 내용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였는지 몰라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러 이 구절을 삭제해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