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2015. 7. 20. 09:03

. 한일문학 비교연구의 필요성과 과제

불행하게도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맞물려 있었다. 우리가 근대를 향하여 발돋움을 하던 바로 그 시기에 나라가 국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근대화 과정 전체가 일본의 영향권 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런 달갑지 않은 여건은 한국의 현대문학 연구에 장애가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1. 한국의 현대문학 연구에 장애가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

1) 근대화 자체를 화근으로 보는 시각의 발생

그 좋은 본보기가 기차에 대한 관점의 복합성이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으로 한국에 신작로를 만들고 철도를 부설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철도는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부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유민 사태를 위시한 많은 식민지적 비극과 유착되어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근대화의 상징물인 기차가 경탄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돌팔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철도뿐이 아니다. 근대 문명을 예찬하는 일이 일본을 예찬하는 일도 되기 쉬운 상황이어서 한국 사람들은 근대 문명 그 자체를 갈등 없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2) 정치적 상황에 의해 훼손 된 일본문학을 비롯한 문학전반에 대한 객관적인 안목

(1)민족적 자의식

일본에 저항하고 일본을 비난하는 사람만이 애국자가 되고 의인이 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실체를 알기 위해 진솔한 어프로치를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좋은 점이 발견되면 얼른 외면을 하거나 몰래 가슴 속에 파묻어 숨겨야 하는, 민족적 자의식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복합적인 심리가 한국의 근대문학 발전에 큰 장애가 되었다.

(2)1910~20년대 문인들에 의한 일본문학의 과소평가나 과대평가

1910년대까지의 초창기의 문인들 대부분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으나 그들 중에 일본에서 문학을 제대로 전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광수는 철학을, 염상섭은 역사를, 김동인은 미술을, 전영택은 신학을 선택했고, 그나마도 경제적 어려움과 3.1운동, 동경의 지진 같은 사건들에 휘말려, 학업을 중단하거나 시작 단계에서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구의 근대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이 잘못 받아들인 것을 식별할 안목도 갖추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일본문학 자체도 체계적으로 연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여건은 한편에서는 일본문학을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대정(大正)문학 전체를 답보로 상태라는 한 마디로 폄하한 김동인 같은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1920년대의 2기 유학생 중에서는 교토의 부립(府立)중학을 다닌 염상섭만이 일본의 근대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가『삼대같은 대작을 창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잇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또 자기 나라의 문학을 무조건 평가절하하는 엄청난 민족적 열등감이 나타난다.

이런 류의 과대평가나 과소평가는 모두 객관적일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3) 서구문학의 간접수입에 따른 변질된 외래사조의 수용

국권을 상실한 우리는 근대를 받아들일 다른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과 근대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서구문학의 실상을 판가름할 안목을 마련하기 이전에 일본을 통해서 그것을 수용한 관계로 우리 문단에서는 일본에서 잘못 받아들여진 부분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폐단이 생겨났다. 그런 여건은 비단 일제시대에 문학을 시작한 문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해방을 맞이한 50년대 문인들까지도 세계문학전집뿐 아니라 일본 소설들 그리고 서구의 문학 이론서 같은 것들을 모두 일본말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한글로 된 문학 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간접 수입에서 오는 왜곡 현상은 문예사조 면에서 큰 부작용을 낳았다. 근대문학의 실질적인 모델은 서구문학이었는데,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 의해 굴절된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변질된 외래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혼란이 생겨나는 것이다.

4) 발신국의 급변에 따른 문화적 충격 ((2)간접수입→(3)직접수입에 따른 문제)

(1)”중국→<유럽>”→한국 (아시아 전체의 문제)

오랫동안 중국문학의 영향권 안에 있다가 시야가 갑자기 유럽으로 확대되자, 그 넓이와 이질성 속에서 아시아의 나라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이런 혼란은 일본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혼란의 폭이 컸다.

(2)(유럽→)”<일본>”→한국 (간접 수입)

그들은 직접 수입인데 반해 우리는 간접 수입이기 때문에 문제의 크기가 배가 된 것이다. 일본은 근대문학의 발신국이 아니라 매개국에 불과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원형과 구별하지 못한 채 수용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근대문학은 유럽의 그것과는 격차가 엄청났다. 문화적·사회적 여건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형과 매개형의 차이를 구별할 안목을 마련할 겨를도 없이 그 앞에 던져졌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뒤섞어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의 근대문학은 말하자면 발신국이 두 개인 셈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3)”<유럽>”→한국 (직접 수입)

해방이 되어 갑자기 구미의 근대문학과 직접 대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한국의 학생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용어의 개념에 혼선이 생긴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연주의(naturalism)’이다.

(4)’자연주의개념의 혼선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서는 지금도 염상섭은 자연주의 작가이며「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불문과의 문예사조 강의를 들어 보면 학생들은 혼란에 빠진다. 에밀 졸라가 주창한 프랑스의 자연주의 개념으로 보면「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자연주의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①졸라의 자연주의

졸라의 자연주의에서 자연자연과학을 의미한다. 그의「실험소설론」은 클로드 베르나르의『실험의학서설』을 그대로 문학에 적용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의「루공 마카르 시리즈」는 루카스의『자연유전론』에 의거하고 있다. 졸라의 자연주의는 과학주의이다. 그래서 진실존중의 예술관에 입각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 하는 거울의 미학에 의거한다. 객관주의, 가치중립성, 선택권의 배제 등이 거기에 수반된다. 결정론을 신봉한 졸라는 유전과 환경의 결정권을 절대화하면서 인간에 대한 실험에 착수한 것이다. 졸라의 자연주의는 물질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성과 돈 같은 주제에 집착하게 되며 비극적인 종결법을 채택한다.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졸라이즘은 객관적 시점을 채택했다. 그것은 현실의 외면을 모사하는 거울의 문학이어서, 외면화 수법을 지지하는 것이다.

②일본식 자연주의

졸라이즘은 일본에 들어가서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사회적 배경의 격차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는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와 제휴하여 만들어낸 사회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 명치시대의 일본에는 합리주의의 전통이 없었다. 명치 초기부터 일본에도 과학만능주의적 사고가 존재했고, 산업화 과정도 급격히 진행되어 일로전쟁 이후에는 중공업시대로 접어들지만 그것은 비합리적인 공리의 질서로 움직이는 것이어서 합리주의와는 무관했다. “공리의 강제를 벗어나서 그 내용을 논리적, 혹은 심미적인 질서로 통일을 해야만 방법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데일본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 이토 세이의 의견이다.

그 뿐 아니라 일본에는 개인주의의 전통도 없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국가지상주의의 파괴였다. 국가지상주의는 흔들릴 수 없는 절대적 명제였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간의 가치는 여전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국가 주도형 자본주의여서 개인주의와는 유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근대소설이 주정적인 자기폭로의 문학이 되는 이유를 이토는 개인주의적 전통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개인의 불확립이 문단을 사회에서 고립시켰다.자유로운 개인은 일반사회에는 없는 개념이니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작가들은 현실에서 도망쳐서 문단이라는 소그룹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이토 세이는 그런 작가들을 도망 노예라고 불렀다. 현실에서 도망친 도망 노예들은 문단 안에서 자기들끼리 돌려가며 읽는 내면폭로의 사소설을 쓰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내면을 고백하는 사소설이 자연주의와 유착하게 된다.

그러한 여건 때문에 일본에서는 졸라의 진실 존중사상이 사실 존중사상으로 변질되어, 직접 체험한 사실을 고백하는 사소설이라는 비자연주의적인 장르가 자연주의를 대표하게 된다. 배허구’ ‘무각색’ ‘무해결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던 일본의 자연주의는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리얼리스틱한 사소설을 소설의 본령으로 생각하게 되어, 자기 폭로의 주정적 자연주의가 생겨나는 것이다.

객관주의 대신에 주객합일주의를 채택한 일본의 자연주의가치의 중립성, 인물의 계층, 본능 면의 노출, 비극적 종결법, 결정론에 대한 믿음 등 모든 면에서 졸라이즘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현실 재현의 리얼리스틱한 수법의 채택과 성에 대한 가벼운 관심, 시점의 객관화 등만 빼면 일본의 자연주의는 졸라이즘과는 유사성이 희박한 것이 되어버리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재패니즈 내추럴리즘(Japanese naturalism)’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졸라이즘의 매개자로서가 아니라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재패니즈 내추럴리즘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한국의 자연주의는 원천이 둘이나 되어 혼란이 가중됐다. 자연주의파가 가진, 낭만파인 백화파와의 차이가 3인칭으로 사소설을 쓴 데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의 자연주의는 친낭만적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prajna_
summary2015. 7. 17. 00:05

 

1960년대에 구조주의가 문학 비평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화 비평은 문학 연구 방법론 가운데에서 가장 야심만만하고 도전적인 방법론이었다. 어느 특정한 한 가지 방법론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점에서 신화 비평은 가히 백과사전적인 성격을 지닌다. 가령 문화인류학·심리학·비교종교학·역사·철학·예술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서 이룩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삼아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화 비평은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른 영역에서 갖가지 방법론을 끌어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특유의 방법론을 세우려는 신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흔히 신화 비평을 두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원적이지만 확신에 있어서는 일원론적이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화 비평과 타 비평과의 상관성>

신화 비평은 작가의 전기적 사실, 지성사, 문학 전통, 영향 관계 따위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역사 비평과 닮은 데가 많다. 신화 비평은 형식주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구성 및 개별적인 작품의 구성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상징과 이미지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텍스트 분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한편 공동 사회의 집단적 경험을 다루는 신화 비평 방법은 사회학적 비평 방법처럼 사회적 인습과 전통, 제도, 가치 그리고 신념 따위를 파헤치는 데에 주력한다. 그런가 하면 적어도 문학 작품을 공시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기본적인 모티프나 패턴을 분석하여 작품의 구조를 밝혀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구조주의 비평 방법과도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다.

<’신화 비평 방법심리주의 비평 방법과의 유사성>

어떤 의미에서 신화 비평 방법은 심리주의 비평에서 갈라져 나온 방법론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몇몇 이론가들은 신화 비평을 심리주의 비평이나 정신분석 비평의 한 갈래로 간주하여 이 방법론에 넣기도 한다. 민속 신앙의 기원을 다루는 저서『토템과 터부』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친족 살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행위는 사회 조직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신화 비평에 처음으로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해주었다. 신화 비평을 굳건한 위치에 올려놓은 칼 구스타프 융은 다름아닌 프로이트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크다.

무엇보다도 문학을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고 독자들에게 그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켜주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신화 비평 방법과 심리주의 비평 방법은 큰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신화 비평 방법은 심리주의 비평 방법처럼 문학 작품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꿈이나 환상과 같은 인간의 비이성적 요소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이 두 비평 이론에 따르면 신화와 꿈 그리고 문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신화 비평 방법은 흔히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나 정신분석 비평 방법에서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신화 비평 방법심리주의 비평 방법과의 상이점>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 인간의 행동 근저에 있는 동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신화 비평 방법은 그러한 동기가 투사되는 상징적 형태나 구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다. 또한 실험적이고 진단적인 성격을 지니는 심리주의 비평 방법이 생물학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반면, 좀 더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지니는 신화 비평 방법은 종교나 인류학 또는 문화사 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개인의 내면적 세계나 인성을 밝혀내는 데에 치중하는 심리주의 비평과는 달리, 신화 비평은 한 민족이나 인류 전체의 집단적 성격이나 정신을 밝혀내는 데에 비중을 둔다. 심리학 이론에 기대면서도 심리주의 비평이 주로 심층심리학에 기초를 두는 반면, 신화 비평은 오히려 분석심리학에 기초를 둔다. 그리고 신화 비평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신경 질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질병을 치료하는 샤먼이나 신화를 창조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신화 비평 방법의 역사>

이렇듯 단일하거나 통일된 접근 방법이 아니라 가장 잡종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지니는 신화 비평은 다른 연구 방법론과 비교하여볼 때에 그 역사가 그렇게 오래지 않다. 역사 비평이나 형식주의 비평 또는 심리 비평과 같은 다른 접근 방법처럼 신화 비평 방법 또한 까마득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들에게서 이렇다 할 만한 경향이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방금 앞에서 말하였듯이 본격적인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신화 비평 방법은 심리학을 비롯한 문화인류학이나 비교종교학, 특히 신화학과 같은 현대 학문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시기를 아무리 일찍 잡는다고 하더라도 신화 비평은 기껏해야 19세기 중엽 이전으로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

1. 신화 비평 방법의 밑거름이 된 문화인류학

20세기 초엽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제인 해리슨들과 같은 흔히 헬레니스트들또는 케임브리지 제의 학파로 일컫는 학자들이 나타나 문화인류학 분야에 그야말로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였다. 한편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길버트 머레이와 같은 학자들이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문화를 연구하여 1)제의(祭儀)가 신화나 종교에 앞선다, 2)신화는 제의를 언어로 표현한다, 3)신화는 그 자체로써 정체성과 기원을 갖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결론은 후일 신화 비평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이론적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중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 유명한 저서『황금의 가지』에서 그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민속·마술·종교애 대한 비교학적 연구를 통하여 이교도의 원시 문화와 기독교 문화 사이에는 얼핏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유사점이나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이 분야에서 기념비적 업적이라고 할 만한 이 저서는 20세기 문학은 물론이고 20세기 지성사 전반에 걸쳐 크나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2.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의 영향

문화인류학자들과 함께 스위스 태생의 심리학자 융 또한 신화비평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융은 한편으로는 그의 스승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였다. 이미 신화 비평 방법과 관련하여 앞장에서 말하였듯이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 영역을 크게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이 인간 행위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보려는 입장에 대하여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융은 인간 정신을 1)의식, 2)개인 무의식, 그리고 3)집단 무의식의 세 갈래로 구분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이 융의 이론에서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의 두 유형으로 다시 나누어진 셈이다.

 

1)개인 무의식

사회 인습이나 터부 때문에 억압되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지 못한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충동·욕망·공포·열정·비이성적인 생각 따위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흔히 꿈이나 말 실수, 농담, 비이성적인 행위, 또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 등을 통하여서 표현되기 일쑤이다. 의식 표면의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 무의식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서만 그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개인 무의식은 실제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집단 무의식

의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개인적 무의식 바로 밑에 자리잡고 있는 집단 무의식은 모든 인류의 집적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이미지를 저장하는 곳을 가리킨다. 융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이 무의식을 지니고 있듯이 한 민족, 더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 또한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 인간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심리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인간 정신은 백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육체처럼 정신은 미리 설정된 행동 양식이라는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양식은 영원히 반복하는 심리적 기능의 패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융의 이러한 태도는 인간이 백지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주장한 존 로크의 그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3)’원형의 개념

융의 이론 가운데에서도 원형의 개념이 심리 비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놀랍게도 세계 전역에 걸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신화나 이야기에 대하여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그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동일한 신화나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 인류의 과거 기억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는 집단 무의식 속에 과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탓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잇는 서로 다른 신화이면서도 비슷한 모티프나 패턴 또는 주제를 지닌다. 융은 이러한 패턴이나 모티프 또는 주제를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원형은 상속받은 관념의 패턴이나 철학적 사고보다는 오히려 자극이 주어질 때에 비슷한 식으로 반응하는 성향, 그러니까 상속받은 심리적 행동 양식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의 활동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원형은 문학에서 흔히 되풀이되는 플롯 패턴이나 이미지 또는 유형의 형태로 나타난다. 융에 따르면 이 원형은 집단 무의식에 저장되어 잇는 이미지를 일깨워줌으로써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들한테서 심오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신화 비평가들에 따르면 문학 작품의 위대성은 역사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에 있지도 않고, 형식주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듯이 복잡한 언어 구성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오로지 어떻게 원형과 경험을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위대한 문학 작품이 주는 감흥과 호소력은 꿈과 같은 차원에서 비롯된다고 융은 말한다.

4)’개별화 이론

융의 개별화 이론또한 신화 비평 방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별화란 심리적 성장, 곧 한 개인이 다른 사회 구성원과 구별되는 자아의 양상을 발견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기 인식에 이르는 이 과정은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균형 잡힌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에서 실패할 때에 그 개인은 불안 초조나 우울증과 같은 신경질환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1)인간의 개별화 과정과 관련한 세 가지 정신 요소

그림자 : 무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면을 가리킨다. 성의 열등하고 위험한 모습으로서 억압하고 싶은 측면이다. 융은 이 그림자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이 아직도 뒤에 달고 다니는 원숭이 꼬리에 견준 적이 있다.

) 서양 문학에서 그림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 펠레스, 존 밀턴의『실락원』에 나오는 사탄, 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와 같은 인물을 통하여 나타난다.

아니마’ (여성의 경우에는 아니무스’) : 영혼-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아니마는 생명력을 가리킨다. 남성의 몸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여성적인 원리. 한편 아니마는 에고(의식적 의지나 사고하는 자아)와 무의식이나 내면 세계 사이의 중재자 구실을 한다.

)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헬렌이나, 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 밀턴의『실락원』에 등장하는 이브 등을 통하여 나타난다.

퍼소나 : 아니마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는 퍼소나는 에고와 외부 세계를 중재한다는 점에서 아니마와는 대립된다. 어원에서 볼 때에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갈라져 나온 퍼소나는 외부 세계에 보여주는 배우의 가면과 같은 구실을 한다. 사회적 인성으로서 그것은 때로는 진정한 자아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문화인류학자들과 칼 융이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해준 신화 비평은 20세기 중엽에 들어와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캐나다의 문학 이론가 노스롭 프라이는『비평의 해부』를 출간하면서 신화 비평을 확고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지금은 고전이 되다시피 한 이 책에서 그는 신화를 문학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룬다. 그에 따르면 신화는 곧 문학 형식의 구조적 조직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화비평 방법의 목적>

신화 비평은 문학 작품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신화적 패턴, 즉 원형을 구현한다는 전제에 뿌리를 둔다. 가장 실험적인 작가들조차도 옛날 이야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경험의 연속성에 눈을 돌리다. 신화 비평은 문학에 나타나는 원형적인 패턴을 찾아내고 이러한 패턴이 어떻게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 그리고 효과에 이바지하는가를 밝혀내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한마디로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인간성을 탐구하려고 한다. 신화 비평을 흔히 원형 비평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일 신화또는 ()신화의 개념>

그들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는 오직 한 가지 원형을 다루게 마련이다. 나머지 신화들은 모두 이 단일 신화나 원 신화에서 갈라져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프레이저와 조셉 캠벨한테서 영향을 받은 많은 신화 비평가들은 통과 의례와 계절의 변화를 비롯하여 영웅이나 신에 관한 이야기에서 단일 신화를 찾는다. 어떤 비평가들은 처형과 부활, 특히 신성한 왕의 처형을 기술하는 신화, 속죄양과 관련한 희생 의례에서 찾으려고 한다. 프라이를 비롯한 또 다른 비평가들은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에서 찾는다. 그런가 하면 로버트 그레이브스와 같은 이론가는 달과 연관된 여성 원리에서 찾기도 한다.

<지리적 여정을 통한 추적이나 추구’>

영웅이나 신을 둘러싼 신화나 정체성의 회복과 같은 원형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결국 이 원형에 포섭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추적이나 추구의 원형은 여러 형태를 통하여 다양하게 나타난다.

) 그리스 신화에서 제이슨이 아르고스호를 타고 황금의 양털을 찾아 헤매는 것, 구약성서에 기록된 모세가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것, 중세기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서 왕 전설에서 녹색 기사가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서 여행하는 것, 파르시팔이 성배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 신비스런 환상의 섬을 찾아 헤매는 전설 등.

이 신화적 원형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여행 과정에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고 마침내 그들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음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속하여 있는 사회에 안녕과 질서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 준다.

<’추적이나 추구의 모티프에 나타나는 공통점>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나 전설 또는 민담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되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1. 아들(때로는 딸)은 부모가 기르지 않거나 오직 어머니 혼자서 기를 뿐이다.

2.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나 태어난 직후에 집을 나간다.

3. 아들은 비록 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지만 아버지에게 자식임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징표를 가지고 있다.

4. 갖은 역경 끝에 아들은 아버지를 찾게 되지만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행복하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때로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때가 더 많다. 싸움을 시작할 때에 그들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일쑤이고, 아버지의 정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탓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신화의 주인공들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유>

신화적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곧 기원이 없다는 것을 뜻하고, 기원이 없다는 것은 곧 공동 사회의 구성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동질성을 중시하는 공동 사회에서 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구성원들과 다르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없는 주인공은 공동 사회로부터 조롱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국외자로 취급되어 궁극적으로는 버림받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신화의 주인공들이 아버지를 찾아 험난한 길을 떠나는 것은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의에 의한 것이다.

<시대에 따른 추적이나 추구모티프의 변모>

이 모티프는 고대에는 그 자체로서 아주 중요한 신화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그 의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에 이르러서는 모험담으로 바뀌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교훈적인 작품으로 바뀌었다. 최근에 이르러 이 모티프는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문학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청춘』이나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현대 작가들은 주인공이 자기 실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모티프를 즐겨 쓴다. 많은 비평가들이 흔히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르는『율리시스』는 젊은 예술가 지망생 스티븐 디덜러스가 정신적 아버지를 찾아 하루종일 더블린 시내를 헤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마침내 레오폴드 블룸이라는 상징적인 아버지를 만나는 주인공은 자기 인식에 이른다.

<희생양 신화>

서구의 신화에서 희생양은 아주 중요한 모티프 가운데 하나이고 그것은 문학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희생양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까마득히 먼 구약성서와 만나게 된다.「레위기」16 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론에게 염소를 잡아 그 짐승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죄를 담아 황야로 내쫓아버릴 것을 명령한다. 그러니까 염소는 인간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희생물에 해당하는 셈이다. 몇몇 신화학자들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희생양이란 한 종족이나 인류의 죄를 성스러운 동물이나 인간에게 뒤집어 씌운 다음 그 동물이나 그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회 질서를 새롭게 하는 정화 의식이요, 인간의 죄를 씻는 속죄 의식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풍요와 인간의 다산을 비는 제의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렇듯 희생양 신화에서는 개인의 운명은 사회의 운명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몇몇 이론가들은 신화 비평을 제의 비평또는 토템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신화 비평에 있어서의 ’>

신화적 관점에서 보면 물은 삶의 근원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원형적 상징인 물은 곧 창조의 신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바닷물은 흔히 생명의 어머니로 일컬어질 만큼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한자어로 바다해()’자에 어미모()’자가 들어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렇듯 우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바다는 곧 여성 원리를 상징한다. 실제로 많은 생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다름아닌 바닷물에서 찾는다. 사람의 몸에 생명체가 잉태되면 양수(羊水)라고 하는 물 속에서 자라난다. 인간이 물에 대하여 강한 유혹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고향인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신화학자도 있다.

<신화 비평에 있어서의 동굴이나 지옥과 같은 지하세계’>

1. 동굴의 경우

호메로스나 플라톤을 일찍이 동굴을 환상, 무지, 원시성, 단순성, 동물적 차원의 삶, 영혼의 어둠 따위 지극히 부정적인 차원에서만 보았다. 특히 플라톤은 동굴 안의 어둠이 무지를 상징하는 반면 동굴 밖의 빛은 지식과 진선미를 상징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한편 동굴은 성적(性的)함축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흔히 이 동굴 안에서 동물적 차원의 열정에 사로잡히는가 하면,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완벽한 사랑의 극치를 맛본다. 그런가 하면 동굴은 여성의 자궁처럼 새로운 생명체가 잉태되어 자라나는 장소 구실을 하기도 한다. 고대 신화에서 많은 신들이 동굴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양육된다. 이렇듯 동굴은 부정적 측면에 못지않게 긍정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2. 지하세계의 경우

지하세계로의 하강은 신화적 영웅이 성장하는 데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지하 세계로의 상징적 여행을 통하여 그는 비로소 정신적으로 자랄 수 있다. 가령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도,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의 주인공 아이네이아스도 운명을 개척하기 위하여 지하 세계에 내려간 다음 다시 지상 세계로 올라온다. 단테가『신곡』을 지상편이나 천상편에서 시작하지 않고 굳이 지옥편에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처형된 다음 천국에 올라가기에 앞서 먼저 지옥에 내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탓에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구약성서의 선지자들과 가부장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라고 흔히 일컬어진다. 예수의 이 행적은 흔히 신앙 고백으로 일컫는「사도신경」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장사한 지라는 표현과 사흘 만에라는 표현 사이에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표현이 더 나온다. 아마 예수가 지옥에 내려간다는 내용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하였는지 몰라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러 이 구절을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Posted by prajna_
summary2015. 4. 22. 10:05

 

인간의 내면 세계에 주로 눈을 돌리는 심리주의 비평 방법과는 달리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주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세계에 눈을 돌린다. 문학은 의미 있는 인간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고 그 경험의 주체인 작가는 독자적이고 자족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공동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다.

 

<문학과 사회의 관계>

문학가를 비롯한 예술가에게 있어 사회는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는 범주의 개념과 비슷한 사고의 틀을 제공해준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을 따르는 이론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와 예술가는 오직 사회라고 하는 관념의 틀을 통하여서만 세계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예술 작품으로 표상할 수 있다. 해리 레빈의 말대로 문학과 사회는 서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문학은 사회적 원인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결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회학자 위트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1)사회적 인습과 터부 2)일반적인 윤리 기준 3)종교적·철학적 신념 4)경제조직 그리고 5)주어진 사회의 정치 구조라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살핀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과 역사 비평 방법>

이렇게 사회적 맥락에서 문학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얼핏 역사 비평 방법과 동일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문학을 목적보다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두 비평 방법은 서로 큰 공통점을 지닌다. 실제로 몇몇 이론가들은 사회학적 비평방법과 역사 비평 방법을 서로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같은 개념으로 사용해왔다. 가령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은「문학의 역사적 해석에서 사회·경제·정치적 측면에서 문학을 해석하는 행위를 두고 역사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적 해석은 실제로는 역사 비평 방법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 훨씬 더 가깝다. 물론 한차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만큼 윌슨은 이 글에서 역사적이라는 용어를 주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쓰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과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연구 방법론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역사 비평 방법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역사 비평과는 달리 사회학적 비평은 언어의 문제, 그러니까 텍스트가 전달되는 과정에는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비록 언어는 사회적 상호 작용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사회 비평가들은 언어 문제를 역사 비평가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또한 사회 비평가들은 작가의 삶에 대하여서도 간접적으로만 주의를 기울인다. 역사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를 연구하되 뤼시엥 골드만과 같은 발생학적 비평가들처럼 사회적 존재로의 작가에 더 많이 초점을 맞춘다. 문학 장르나 인습 그리고 전통 문제에 있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역사 비평 방법이 통시적 측면을 중시한다면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오히려 공시적 측면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사회학적 비평 방법의 역사와 범위>

사회학적 비평 방법의 역사적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플라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일찍이 문학이 사회적 의미와 효과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자신의 이상적인 공화국에서 시인들을 쫓아내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플라톤이 처음 씨앗을 뿌린 사회학적 비평은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써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다. 특정한 문학 형식은 특정한 시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게 이 비평 방법이 취하고 있는 기본 스탠스이다. 한편 문학이 사회를 표현하고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을 반영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헤겔의 태도 또한 사회학적 비평 방법과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그 기원을 이폴리트-아돌프 텐을 비롯하여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매슈 아놀드 등에게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 비코와 헤르더 그리고 헤겔의 이론을 논리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나간 그들은 이 문학 연구방법을 굳건한 이론적 반열에 올려놓았다. 20세기의 이론가들은 바로 그들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사회학적 비평 방법을 정립한다. 문학에서 역사적·사회적 환경을 중시하는 이론가들은 텐에게서, 사회적·경제적 차원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 그리고 문화적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론가들은 아놀드에게서 각각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

1. 이폴리트-아돌프 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텐은 그 유명한『영국 문학사』에서 문학을 인종, 시대, 환경의 세 요소가 만들어낸 결과로 본다. 여기에서 인종이란 한 민족의 종족적 특성을 말하고 시대란 역사적 시기를 말하며 환경이란 사회적 환경을 말한다. 이 이론은 귀스타브 랑송한테서 큰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서 아주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2. 마르크스와 엥겔스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텐의 이론에 생산 양식이라는 네번째 요소를 덧붙였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좁게는 생산 양식, 넓게는 물질 조건이라는 잣대로 가늠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와 제도는 인간의 물질 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들이 사회의 상부 구조라고 부르는 문학·예술·종교·철학·정치·법률 따 따위 물질 기반 위에 세워진 이층집과 같다. 예술은 사회의 물질 조건을 정확하게 반영할 필요가 없다는 점, 예술은 사회 조건에 뒤늦게 나타나거나 미리 앞당겨 나타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 심지어 예술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점들을 그들은 지적하였다. 더구나 엥겔스는 예술 작품이 물질 기반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가장 효과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와 단서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술이 궁극적으로 구체적인 물질 기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의 한 물음에 대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해왔지만 영원한 심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학적 태도는『독일의 이데올로기』에 이르러 한결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개념이나 관념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라 생산력과 그것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구체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당에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분명히 밝힌다.

여기에서 독일 철학이란 다름아닌 형식주의 비평 방법의 이론적 모태가 된 임마누엘 칸트와 헤겔의 관념 철학을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은 바로 독일 관념 철학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3. 매슈 아놀드

한편 영국의 시인이며 문학 비평가인 매슈 아놀드는 문학과 문학 비평에서 무엇보다도 도덕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였다.「현대 비평의 기능」에서 그는 비평을 아예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된 최상의 것을 배우고 전파하려는 사심 없는 노력이라고 못박는다. 그에 따르면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삶의 비평이다. 문학가는 반드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위대성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 질문에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교육적 기능이라는 차원에서 문학을 보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지만 이러한 태도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아놀드의 이론과 만나게 된다.

아놀드가 현대 비평 이론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문학을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윤리적 차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문화적 차원에서 보려는 사회-문화 비평가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이론은 어떤 작품이 문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문학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지만 문학의 위대성은 단순히 문학적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엘리엇에게서도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정치처럼 사회 제도의 일부로써 파악하려는 라이오널 트릴링한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비록 심미적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어빙 하우의 견해도 본질적으로 아놀드의 그것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활기를 띤다. 문학사회학과 예술사회학을 포함하는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그리고 문학 작품을 통하여 사회의 성격을 캐려는 뤼시엥 골드만의 발생학적 구조주의 이론도 기본 전제와 방법론에 있어서는 이 비평 방법에 속한다. 좀더 최근에 들어와서는 흔히 역사주의의 사생아라고 부르는 신역사주의의 이론, ‘문화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의 문화 비평 연구, 문학 작품의 사회화 과정을 연구하려는 사회학적 시학그리고 문학을 문화를 구성하는 기호 체계의 일부로 파악하려는 문화 시학도 모두 이 비평 방법에 포섭된다. 이 밖에도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페미니즘 비평 이론이나, 1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이 비평 방법과 결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학적 비평은 한마디로 삶과 문학 작품의 상호 작용을 밝히려는 연구 방법이다. 사실 이 비평 방법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두루 포함하는 아주 폭넓은 영역이다. 이 비평 방법이 때로는 역사 비평 방법이나 심리주의 비평 방법 또는 신화 비평 방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비평 방법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니트 울프가 정의하는 문학사회학자의 역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학적 비평 방법은 사회 환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작가가 사회 환경에 반응하는 방법과 정도에 관심을 가진다. 영국의 문학사회학자 재니트 울프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문학사회학자의 역할을 지적한다. 첫째, 이 비평 방법은 사회학의 개념을 도구로 삼아 문학 작품을 분석한다. 둘째, 이 비평 방법은 문학을 일종의 사회학으로 간주하여 문학 작품을 자료로 삼아 사회 현상을 연구한다. 셋째, 이 비평 방법은 문학의 사회적 기원과 문학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소를 연구한다. 넷째, 이 비평 방법은 문학을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 발전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사회적 힘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을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수단으로 파악한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

사회학적 비평 방법 가운데에서 특히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크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이 방법은 아직도 문학 이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간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물질 기반의 영향을 받는 사회적 동물인 이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언제나 큰 설득력을 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리주의 비평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듯이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류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제도의 역동성과 모순을 분석하여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문학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한다. 둘째, 지금까지 헤겔을 비롯한 관념 철학자들은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일에만 주력해왔지만 이제 문제는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도 실천성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문학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을 비롯한 문화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아주 적절하고도 타당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을 문학 연구 방법론으로써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은 바로 헝가리 태생의 문학 이론가 게오르그 루카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그는 문학이 사회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문학이 사회 변혁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 하는 점을 오직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가 프란츠 카프카나 제임스 조이스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을 그토록 신랄하게 매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마르크스주의 문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주관성과 내면 세계에 탐닉하는 모더니즘 문학은 정신병적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토마스 만이나 레오 톨스토이처럼 구체적인 삶의 실재에 굳건한 뿌리를 둔 리얼리즘 문학가만이 진정한 문학가라고 그는 주장한다.

루카치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미국의 비평가 아이러 쇼어는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라면 으레 문학에 대하여 던져 할 물음을 모두 여섯 가지 관점에서 지적한다. 1)주어진 작품이 사회주의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2)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삶의 공허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는가? 3)작가가 고뇌와 혼돈을 극복하는가? 4)사회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작가는 총체성을 얼마나 획득하는가? 5)어떻게 삶의 의미가 회복되는가? 그리고 6)개인의 운명과 사회적 힘이 얼마나 잘 유기적으로 결합 되어 있는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물을 던져야 할 분만 아니라 이 물음 대부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방법과 정도를 묻는 마지막 두 물음에 대하여서도 그들은 사회 변혁에 긍정적인 쪽으로 답할 것을 요구 받는다.

『광장』의 출판과 판매를 둘러싼 작품 외적 문제에 못지않게 작품의 주제나 내용에 관한 내적 문제 또한 사회학적 비평 방법에서 아주 중요하다. 사실 작품의 외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문학 비평가의 몫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사회학자의 몫에 더 가깝다. 서구의 경우를 보더라도 문학 외적 문제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주로 문학사회학자들의 업적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가령 문학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과정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경험론적으로 다룬 프랑스의 문학사회학자 로베르 에스카르피의『문학의 사회학』은 흔히 이 분야에서 고전적인 책으로 평가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이러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듯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뿌리고 박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폭로함으로써 삶을 개선시키고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문학가들도 예술 일꾼으로서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하도록 요구 받는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노동자 계급에 동조하지 않거나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작가들을 신랄히 비판해왔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 방법은 역사적 진보나 발전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르주아비평 방법과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 비평을 제외한 다른 비평 방법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새로운 비평 방법들은 한결같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배적인 부르주아의 사회의 이익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신비평 이후에 생겨난 그 많은 새로운 비평 방법들은 어디까지나 형식주의 안에서의 집안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학 이론 가운데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처럼 이렇듯 드러내놓고 그리고 문학의 예술성을 무릅쓰고라도 문학과 삶의 관계를 주장하는 이론도 아마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문화유물론자들의 비평>

또한 1980년대에 들어와 문학 비평 분야에서 부쩍 눈길을 끌고 있는 문화 유물론자들의 비평 이론도 넓은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포섭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산자와 무산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을 주로 문제 삼지만 문화 유물론자들은 계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종과 성차(性差)까지도 함께 문제 삼는다. 조너선 돌리모어와 앨런 신필드의 말대로 문화 유물론은 한마디로 인종과 성 그리고 계급을 근거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 질서를 변혁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문학 비평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최근의 네오-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도 성과 인종을 중요한 의제로 삼지만 이 문제는 특히 문화 유물론에서 심도 있게 다룬다. 문화 유물론자들은 오직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만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페미니즘 비평

성차와 관련한 이 문제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페미니즘 문학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기도 한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생물학적인 과 사회적인 을 구별하여 전자를 섹스, 후자를 젠더라고 부른다. 페미니즘에 이론적 틀을 마련해준 시몬 드 보부아르가『제 2의 성』에서 지적하듯이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만들어질따름이다.

2. 사회학적 의미의 자살뒤르켐의 자살이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죽음의 의미와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죽음의 의미는 자못 다르다. 심리학에서는 자살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동으로 간주하지만 사회학에서는 사회라는 맥락에서 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자살이 가지는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따라 작품의 의미나 주제도 조금씩 달라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생겨나기 훨씬 앞서 고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지금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무렵 사람들은 자살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조차 하였다. 가령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삶을 질적으로 살아야 하지 결코 양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값어치 없는 삶을 계속 유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와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나 신약성서에서나 자살을 직접 금지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자살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한 다음의 일이다. 초대 교인들이 순교를 자주 하게 되자 이 행위를 크게 염려한 교부들이 마침내 자살을 개인적 죄악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4세기에 성()아우구스투스는 자살이란 살인을 금지하는 여섯 번째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7세기에 스페인의 톨레도 회의에서도 자살하려는 개인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였고 13세기에 성()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자살을 도덕적 되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자살 행위가 새롭게 평가 받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18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렇게 자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 데에는 이 무렵 서구에 불어 닥친 계몽주의의 영향이 무척 컸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자살이 범죄 행위가 아니라고 처음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자살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죄도 아니요 동료 인간에 대한 죄도 아니요 자신에 대한 죄도 아니다. 삶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에 인간은 얼마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좋다는 것이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주장한 장 자크 루소는 자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이 아닌 사회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살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살을 처음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이론가는 바로 독일 태생의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다. 이 분야에 관한 고전적인 저서라고 할 만한『자살론』에서 그는 자살 행위를 개인화 과정의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살은 개인의 심리나 물리적 환경에 달려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적 연구라는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는 사회적 결합성이나 긴밀성, 사회적 연대나 유대, 또는 사회적 규범 따위에서 자살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자살 행위를 개인과 사회의 긴장이나 갈등의 결과로 본다는 점에서 뒤르켐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살에서 이렇게 사회적 요인을 중시하는 뒤르켐은 자살을 크게 네 갈래로 나눈다. 1)타아적 자살 2)자아적 자살 3)운명적 자살 그리고 4)아노미적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타아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와 지나치게 긴밀하게 맺어져 있을 때에 일어난다. 이 경우 사회가 개인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부추기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바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국가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하라키리(腹切)나 인도에서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는 순장(殉葬)등이 이 갈래에 속한다. 자아적 자살은 타아적 자살과는 정반대로 개인이 사회와 유대 관계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 일어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개인은 극심한 고립과 소외 속에서 사는 나머지 자살을 막는 어떤 집단적 압력한테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편 운명적 자살은 노예가 자살하는 경우처럼 사회가 지나치게 개인의 행위를 규제할 때에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어떠한 전망이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에서는 개인의 욕망과 야망을 억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무너져버릴 때에 나타난다. 한 사회에서 아노미가 늘어나면 개인의 정열이나 야망도 충족시킬 수 없는 수준까지 늘어난다.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큰 충격을 받거나 직장이나 재산을 잃었을 때처럼 개인과 사회의 관례적인 관계가 갑자기 무너질 때에도 아노미적 자살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회학에서는 물론이고 일상 대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쓰는 아노미라는 용어는 뒤르켐이 아노미적 자살을 말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