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끄적2018. 4. 5. 10:50

어쨌든 미련을 만들어야 살아지는 거고 미련이 없으면 죽는 것이죠. 미련이 없이 병원에 갔고 의사는 내게 미련을 만들라고 했고 될 수 있으면 여기저기 이것저것 많이 만들라고 했죠. 저는 그 미련으로 살 겁니다. 역시 내 가장 큰 미련은 애인이겠죠. 그 없는 세상에 돈이 무슨 소용이고 맛있는 음식 온갖 좋은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요.

우리는 오늘 서로를 위해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살 것입니다. 너를 위해. 내 이기적인 욕심으로, 너를 위해.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5. 10:49

차라리 아픈 줄 모르고 성격만 버려갔던 기성세대가 정신건강에 예민한 젊은 세대 보다 낫다는 생각도 하긴 하죠. 증상이 있기 때문에 병이라는 개념이 생겼다기보다는 병이라는 개념이 발명되고 증상은 심화되고, 환자는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그들이 현대정신건강의학 기준으로 아프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심리적 현실은 끊임없이 정신병을 의심하거나 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근심에 시달리거나 그런것들을 통보받고 비통해하진 않겠죠.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좋은 건 플라시보 효과 뿐이라는 생각이에요. 없는 것보단 편하지만 딱 그 뿐이고(작고도 큰 효과죠) 약이 현실의 상황을 낫게 해주거나 그로 인해 빚어지는 내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하죠.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멀쩡하다고 믿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게 아닐까요.

나는 어쨌든 한계까지 믿었고 결국 신체화 증상이 너무 심해져서 병원에 갔지만 이 결과에 만족합니다. 나는 할만큼 했으니까요 정말로. 그래요. 어쩌면 나는 꿋꿋이 버텼다는 이 알량한 자긍심이 문제인지도 모르죠. 왜 버티지 못하느냐 하는 꼰대가 욱하고 치밀어 오를 여지를 주는 걸지도요. 아무도 나한테 한계까지 버티라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늘 말하지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만든다는 명제는 진린데 반해서 인간은 평생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일부의 나를 지움으로서 나를 유지하고, 누군가는 모두의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쳐버리고 그 미쳐버림이 삶의 방식일 수도 있겠죠.

모르겠네요. 나는 한심하다 인정해버리면 그걸로 와해 되어버린 스스로와 화해가 되는걸까요.

Posted by prajna_
일상 끄적끄적2018. 4. 5. 10:36

 

근래 나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도 구제할 길이 없는 좆창난 인간들이 한심했다. 죽음을 바라마지 않으면서 죽지 못해 사는 망령이 진심반 자조반으로 떠드는 죽음이 하찮았다. 결국은 살고 있으면서 죽음을 바라마지 않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건지 괴로웠다. 어느 때의 나를 겨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난 (이제 더이상) 아니야, 가 바로 공격성으로 드러났다. 알기쉬운 공격성이었다.

그 때(라고 해봤자 불과 얼마 전이지만)를 떠올릴만한 건덕지만 보여도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잘 살고 싶었으니까. 생각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노력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닌 삶은 내 주위에 산재해 있고 바로 가까이에도 있었다. 나는 아마도 무서웠던 것 같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불일치한 삶이, 나를 또 덮쳐올가봐. 내가 또 사는 게 버겁고 힘들어질까봐, 다 내려놓고 싶을까봐, 매일 눈물로 베개를 적실까봐, 그러다 어느날 재미도 슬픔도 모두 메말라버릴까봐,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웠나보다.

나는 열심히 씩씩하게 살고 싶다. 노력으로 일군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손에 쥐고 기뻐하고 싶다. 그리고 주변과 그 시시한 것들을 나누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지만 어딘가에는 그렇지 않은 삶이 산재해있다는 거, 그리고 그 보잘 것 없는 삶 또한 그 보잘 것 없음으로 거기에 있다는 것. 그녀가 내게 남긴 건 그런 하찮고 시시하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 남자친구는 내게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도 있어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가엾다. 가엾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가엾지 않아지는 건 아니었다. 가엾은 채로 보잘 것없는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지 보잘 것 없는 걸 포기할지, 포기당할지 일 뿐.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그녀의 실천이었고 이제는 그 실천을 내 애도의 방식으로 삼고자 한다. 물론 순전히 내 멋대로, 내 욕심으로.

 

 

 

Posted by prajna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