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끄적2017. 10. 22. 00:14
  1.  

관람 전 가장 주안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은 역시 뮤지컬이라는 폼에 전통국악을 어떻게 접목시켰느냐 하는 부분이었다. 배우가 뮤지컬 발성과 국악발성 둘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고……. 큰 틀은 뮤지컬이고 내용은 판소리하는 부녀지간 얘기라 적지 않은 비중의 판소리가 곁들어지는데 그 부분이 매우 신선하고 의외로 잘 어우러진다. 판소리가 생소하거나 멀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그냥 판소리를 무작정 찾아 듣기보다 <서편제>를 한편 보는 게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기에는 더 나을 것도 같다. 무대는 간단한 무대장치로만 효율적으로 운용돼서 나머지는 조명효과에 의지하는 부분이 컸지만, 그 부분도 나쁘지 않았다.

 

  1.  

오히려 자꾸 되짚어보게 되는 쪽은 내러티브 쪽이다. 원작소설인<남도사람들>이나 영화화된<서편제>와 다르게 뮤지컬에서 동호(남자주인공)의 서사를 이항대립적으로 확장시켜서 부각되는 60년대의 전후(戦後) 공간 이외에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다소 심심하다. 오누이의 정? 사실상 그게 전부라고 할 수 있다.1 어쩌면 내가 바로 전에 본 공연이 <레베카>여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 일수도 있겠다. <레베카>와 <서편제>는 어떻게 보면 서사의 동력 측면에서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대조점이 <서편제>가 ‘안 팔리는 이유’와 맞물려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1.  

일단 <서편제>가 안 팔리는 이유로 가장 짐작해보기 쉬운 이유는 대중의 편견일 것이다. 국내창작 뮤지컬인데다가, 소재가 익숙하지 않은 판소리라고 하는데 선뜻 티켓을 구매할 관객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조금 믿고 볼만한 구석이라고 한다면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과, 같은 제목으로 개봉한 꽤 흥행한 영화가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어디서 이름만 들어본 소설이거나, 잘해야 줄거리 정도 꾀고 있거나, 흥행했다고는 하지만 본 적 없는 옛날 영화일 뿐이다. 지극히 타당하고 일리 있는 분석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로 된 걸까? 여기서는 <서편제>가 비주류인 이유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론부터 말해두자면, 애초에 공연시장 자체가 <서편제>가 주류로 자리잡기에 불리한 조건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서사를 중심으로 검토해보자.

 

  1.  

<레베카>는 일인칭시점인 '나(Ich)'의 이야기로 시작한다.(물론 뮤지컬이라는 특성상, 시점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맨덜리에 도착한 이래로 초점인물인 ‘나’는 시종일관 레베카라는 강력한 대타자의 상징질서 안에서 점점 무력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윽고 댄버스부인(소타자)에 의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레베카>의 컨텍스트는 완전히 소외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점이다.2 덧붙여 <레베카>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부분은 바로 그 “주체”와 “타자”의 문제로, <레베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컨텍스트적인 맥락을 제하고 순수하게 캐릭터와 그들의 내적/외적 갈등에만 골몰하게 되는 구조에 가깝다.
한편, <서편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다. <서편제>에서는 컨텍스트적 맥락이 부각된다. 동호와 아버지 유봉의 갈등은 1960년대 전후(
戦後)로,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락(rock)과 판소리가 교차대비 되는 부분은 격동하는 전후 사회에 혼재하는 가치관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아직도" "세상 바뀐 걸 모르는군!"
동호와 유봉의 외적갈등이 신()/구(),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물과 전통, 더 좁히면 미국과 한국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레베카>의 서사와 결을 달리하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컨텍스트가 중요해지는 작품인지 아닌 지와 같은 단순 대조점이라기보다도, <서편제>의 서사를 추동하는 적지 않은 부분이 이 컨텍스트적 맥락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항대립에 대한 해명에 불성실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좀 더 노골적으로 이항대립적 요소를 삽입한 건 어떤 필요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반에 언급했던 ‘서양의 음악예술공연에 전통국악을 주로 다루는 서사를 어떻게 접목시킬까’라고 하는 문제다. 프로듀싱을 하는 입장에서는 뮤지컬을 뮤지컬로 있게 하는 요소가 침해 받지 않을 만큼의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남도사람들>이나 <서편제>(영화)는 둘 다 송화를 초점인물로 삼고 있어 득음하고자 유랑길에 오르는 부녀의 이야기가 주가 되고 있으므로,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올릴 경우 ‘뮤지컬의 형식을 빌린 전통공연’ 또는 ‘이도저도 아닌 뮤지컬’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다시 말해, 뮤지컬<서편제>는 바깥이야기의 화자가 되고 있는 동호의 비중을 늘리고 그러한 화자의 서사를 노골적으로 이항대립시켜 각색해 넣음으로써 공연 전체의 밸런스를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항대립이 전통적으로 서양에서 친숙한 문법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다시 <서편제> 전체의 밸런스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서사적 측면에서도 현대인이 한 층 매끄럽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따라서 상기한 <서편제>에 삽입된 동호의 서사 부분은 그대로 <서편제>의 득과 실로 볼 수 있다. <서편제>의 이항대립과 컨텍스트의 문제는 서사를 한층 관람객들에게 매끄럽고 익숙하게 전달하며 극 전체의 밸런스를 잡아 안정시키고 있는 그 지점에 그치고 만다. 공연예술의 오락적인 측면에서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극히 서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호와 유봉의 교차대비는 극 중에서 킬링타임용 컨텐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비중에 대해서는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사실 상기한 내용은 문제에 핵심에 닿아있다고 보기에는 다소 엄밀하지 못하다. 좀 더 문제가 심화되는 부분은 이 다음부터다.

 

  1.  

<서편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캐릭터는 송화지만 극중 화자는 바로 동호다. 액자식구성의 바깥이야기 부분은 동호의 회고로 시작하고 있고 <서편제>는 동호가 송화와 재회하기까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안이야기로써 유봉과 송화와 동호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형식이다. 극 초반만해도 동호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데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자인 동호에 초점을 맞춰 기승전결로 서사를 간결하게 압축해보면 다음과 같아진다.


   (1)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생기고(기), 커져가고(승), 계속 증오하고(전), 증오했었다(결)

–한의 서사-

(2)누나 송화를 만났고(기), 따르며 좋아했고(승), 그리워했고(전), 만났다(결)

–정의 서사-


  각각은 다시<어머니를 여의면서 유봉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고(기), 판소리와 친해질 수 없었고(승), 결국 가출해서 스프링보이즈로 활동했고(전), 시간이 흘러 송화를 찾았다(결)>-판소리에 대한 서사- 와 조응한다. 서사를 다소 심심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부분은 역시 (1)과 같은 구조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MSG가 아무데도 없달까. 유봉이 죽는 장면은 사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정말로 허망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데, 유봉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으면서 동호의 증오도 함께 허무하게 증발해버린다. 극 초반에 "저 뜨거운 햇덩이가" "우리 엄마를 삼켜버린 저 뜨거운 햇덩이" 같은 분노와 증오로 폭발하던 동호는 유봉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후반부로 접어들면 동호의 송화에 대한 그리움이 극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상기한 '오누이의 끈끈한 정' 같은 것이다. 김 빠지는 대목이지 않을 수 없다. 증오하던 아버지가 죽어버리자 말 없이 증발해버린 증오심을 비롯해서 비단 동호뿐 아니라, 세월이 흐르자 "양놈 소리" 라고 비하하던 (양키)음악을 어영부영 따라부르는 아버지나, 눈에 염산을 넣어 눈을 멀게 한 아버지를 "미워할 거예요" 하다가도 어느새 스리슬쩍 용서해버린 송화까지. 세 인물의 갈등은 부지불식간에 해소되어 버린다. 물론 이런 갈등의 해소를 서양 근대소설이 가지는 양상과 다를 바 없이 치부해버려서는 곤란하다. 부지불식간에 해소되어버리는 갈등. 바로 이 지점이 <서편제>의 서사를 현대의 관람객들이 <레베카>와 같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서사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느끼도록 만들어버리면서, 동시에 '오누이의 애틋한 정'과 같이 <서편제>의 주제를 축소시켜 바라보게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서 짧게 적었지만, <서편제>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바로 정한이다. 극은 크게 정과 한이라는 정서를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서편제>의 서사에서 일견 갈등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방식은 바로 그 '한의 정서'를 담아낸 것이다.

 

  1.  

그런데 과연 '한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는 젊은이는 얼마나 있을까? 공감이라는 것도 너무 사치스러운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한의 정서'이라는 걸 젊은 세대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는 걸까?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한의 정서'를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못할 것이다"라든가, 극단적으로는 “’한’이라는 단어는 번역이 불가하다.”같은 얘기를 접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당사자들은(물론 한국인이다) '한의 정서'에 얼마나 깊이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은 어느 정도 머리 속으로는 '한'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익숙한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와 같은 구절에서 가슴에 사무치는 극도로 억제된 감정을 진정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며, 공감할 수 있는 한국어 네이티브는 젊은 세대일수록 적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한의 정서'를 학제교육을 통해 교육받아 아는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일상에서 '한의 정서'를 빈번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어, 세대가 내려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서편제>의 서사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오누이의 애틋하고 끈끈한 정'과 같이 서사를 '정'쪽에 더 힘 실어 느끼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한국인은 젊은 세대 일수록 '한의 정서'를 잘 캐치하지 못한다. 가령 이별을 대하는 여성화자의 애티튜드만 봐도,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의 화자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라고 감정을 최대한 억제해서 억울함과 비통함, 슬픔의 정념을 마음 속 깊이 꾹꾹 눌러 담아 삭여낼 때, 2017년의 K-pop에서 선미는 "왜 예쁜 날 두고 가시나" 하면서 떠난 상대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보다 더 좋은 예시도 있다. 요 몇 년 사이 꾸준하게 인기 있는 ‘썰’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바로 소위 ‘사이다썰’이라는 것인데, 인터넷 좀 하는 네티즌이 아니더라도 ‘사이다’라는 말은 이미 예능을 비롯해 잡지, 신문 등 종횡무진으로 쓰이고 있어 이미 누구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이다썰’의 7할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사이다썰’의 ‘고구마’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썰의 기와 승 또는 기, 승, 전까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이다’부분이 아닌 ‘고구마’부분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은 고구마를 한 100개쯤 먹은 것 같은 구간을 지나면서 목이 메이고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다가, 맨 마지막에서(전 또는 전, 결에 해당) 사이다를 한 사발 쭉 들이키는 것 같이 시원하게 폐부를 찌르는 ‘한 방’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해소감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사이다썰’로 현대의 한국인을 중독시켜버린 서사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어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확실히 ‘사이다썰’은 현대 한국인이 열광하는 서사임에 틀림없지만, ‘답답함-해소’라는 서사를 선호하는 대중의 심층을 면밀히 하지 않은 채, <서편제>의 서사는 현대의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일축해버린다면 검토는 피상적인 현상관찰에 머무를 뿐이다. 대중의 심층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대단한 얘기는 아니고, <서편제>의 주축이 되고 있는 ‘정한’과 같은 한국식 정서의 효력이 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초반에 언급했던 동호의 서사 비중을 늘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로 “서사를 한층 관람객들에게 매끄럽고 익숙하게 전달”한다는 것 또한 일부 같은 맥락에 위치해 있는 이야기다.

 

  1.  

뮤지컬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태동해 6.25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부 주도로 뮤지컬 전문 악단이 <살짜기옵서예>나 <대춘향전>과 같은 전통음악과 미국식 대중음악을 어우르며 다양한 소재를 혼용하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장르에 비해 뮤지컬의 인기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을 그대로 초빙해 공연하는 일도 많아지고, 아예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한국어로 번안해 한국배우들이 상연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뮤지컬이라고 하면 흔히 라이선스 뮤지컬을 떠올리게 되었다. 일례로 ‘창작뮤지컬’이라는 조어는 있으나, 라이선스 계약한 뮤지컬에 대해서는 라이선스라든가 수입이라는 수식을 굳이 붙이지 않는다. 으레 번안 뮤지컬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번안 상연하고, 공연이 인기를 끎에 따라 대중이 빈번하게 접하고 익숙해져 가는 서사와 서사의 문법이 서양의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뮤지컬 내에서의 서양화(사실 서양화라는 워딩이 적절한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번안은 서양’화’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서양이기 때문이다)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물심양면으로 한국은 60년대를 거쳐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서양화) 되어갔다. 외부로부터 수입되는 문물과 사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이라든가 하는 주제는 이야기를 너무 멀리 돌아가게 하므로, 여기서 짧게 줄이자면 21세기의 한국은 이미 작은 서양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세계화’라는 것의 본질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 공시적인 ‘영향’과 ‘수용’의 문제를 논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는 것이다. 조영일이 <세계문학의 구조>(2011)에서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관여하는 보편적인 감각은 ‘세계화’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한국 학교에서 교육받는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과는 정면에서 배치되는 지점에 놓여있다. 한국 전통에 가까운 것일수록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낯선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3 그렇다면 다시 <서편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상기한 시점에서 볼 때, 현대의 한국 대중들에게(특히 젊은 세대 일수록) <서편제>의 ‘한의 정서’를 축으로 하는 서사는 시쳇말로 고구마만 100개고, 사이다는 1개도 없는 서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편제>의 관객 리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찾아보기 쉬운 감상평은 “유봉은 아동학대범” “부모 욕심이 앞서면 자식 앞길을 망친다” “유봉이형 삭히려면 홍어나 삭히지 왜 자꾸 한을 삭히라고 함”과 같은 관점으로 지극히 현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후기는 ‘정한’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와는 완벽하게 배치되는 시점의 감상평이다. 이러한 시점을 취하고 있는 관객에게 유봉-동호, 유봉-송화의 갈등과 갈등의 해소는 ‘어쩐지 찝찝한 것’이고, ‘똑 떨어지는’ 해명이 아닌 것이다.(찝찝하고 깔끔하지 못한 ‘한의 서사’의 결말에 비해 세월이 지나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끌어당기는 ‘오누이의 정’과 같은 서사는 오히려 알기 쉬운 편이다.) 원래 ‘한’이라는 정서는 깔끔하게 정리되는 감정이 아니다. 오세영은 김소월 연구에서 ‘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은 결코 통일된 혹은 해결된 감정일 수 없다. 그것은 복합된 갈등의 감정이며 동시에 미해결의 감정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야 될 상황인데도 속마음에서는 뒤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련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 도 없는 상태의 감정을 가리킨다. 달리 설명하여 한이란 앞으로도 뒤로도 돌아올 수 없는 자기모순의 감정이다.4


물론 유봉과 송화 동호의 한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서편제>가 그리고 있는 인과에 대해 “슬프다”라고 공감을 표하고 있는 감상평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런 후기를 적는 관람객은 대체로 이미 초연부터 재연 삼연 잇따라 관람한 바 있거나, 3캐스팅 모두를 주행하거나 하는 식으로 수회(數回)에 걸쳐 <서편제>를 감상하는 일군(一群)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수회에 걸쳐 거듭 <서편제>를 주행하고 있는 일군은 이미 <서편제>가 그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반복적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왜 <서편제>는 비주류일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분석과 검토에 완전히 적절한 기준점으로 삼기는 어렵다. 만일 <서편제>가 수출길에 올라 해외에서 국내 창작 뮤지컬로 선방하게 된다면, 아마 그 요인은 판소리와 상모돌리기, 북소리와 같은 이색적인(이국적인) 컨텐츠들이 삽입되어 있는 덕분일 것이고, 당연히 동호의 서사는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5 개인적으로는 국내에서는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 밸런스라고 생각하지만, <서편제>는 서사적인 면에서(좀 더 엄밀히 하자면 서사의 축이 되고 있는 ‘정한’이라는 정서적 측면에서)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 불리한 지형에 놓여있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편제>는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공연시장 안에서 핸디캡을 안고 <서편제>와 같은 국내 창작 뮤지컬이 사연까지 왔다는 점은 아무래도 고무적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과 같은 시점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와 전통 가락을 담고 있는 콘텐츠가 적지만 아직까지 꾸준히 살아남고 있다는 점에서가 아니다. 초연 재연 삼연 사연까지 거듭하며 각본을 고쳐 적고 밸런스를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내재화 된 타자(서양)’의 시점에 변수로서 작용할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


1 여기에 대해서는 더 길게 후술하겠지만 일단 먼저 간략하게 하자면, <서편제>를 이끄는 주된 정서는 '정한(情恨))'이다.
2
물론 굳이 1920년대의 유럽과 미국의 뭔가를 읽어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해석과는 결이 달라진다는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텍스트의 복수성과 그 무한한 의미의 연기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처음엔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하고 싶다.
3 이 ‘낯선 감각’의 양가성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적어볼 요량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프레이즈는 일제시대 항일운동 때부터 강조되어 온 조선의 단일민족 정신과 그에 따른 순혈주의, 외골수적 면모를 계승, 강화하는데 일조해 왔다. 이러한 폐쇄성은 표준 외의 모든 것들을 ‘아류’나 ‘규격외’로 낙인 찍는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게도 세계화의 발목을 잡는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근대화는 서양화)이나 그에 영향 받은 조영일과 같은 시점은(세계적인 감각은 전통과는 배치된다) 작금의 한국사회 전반에 수용되고 한층 활발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째서 세계화에 따른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은 유독 동양에만 두드러지는가. 고진은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파노프스키의 <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 게오르그 짐멜의 <풍경의 철학>을 빌어 “기하학적 원근법은 한 점에서 바라보는 투시도법”(30)이며, 또한 “<풍경>이란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되는>대상에 다름 아니다”(31)라고 지적한다. 즉, 기존의 문학사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시점을 통해 재배열, 재배치 되어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고진은 이러한 자연을 가장한 시점에 의한 배치를 해체시키고, 낱개의 독립적인 텍스트들을 비역사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을 단행한다. 그렇다면 유독 동양에 두드러진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이란 서양(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6.25이후부터 쭉 미국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물론 문화적인 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하에 놓여있으므로 미국이 되겠다)이라는 고정된 시점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의 자기인식에 다름아닌 건 아닐까. 즉 다시 말하자면, 동양의 ‘전통에 대한 낯선 감각’은 ‘내재화된 타자(서양)’인 것이다. 따라서 동양이 서양적인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서양이 동양적인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각각을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옥시덴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으로 즉, 대상화된 실체로서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동양이 서양을 바라보는 시점에는 ‘주체’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4 오세영,「한의 논리와 그 역설적 의미」,『문학사상』,1976.
5 서양인에게는 그것이 ‘낯선 감각’으로 신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한 소재와 문법으로 전개되는 록큰롤과 동호의 서사는 사족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일상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0414  (0) 2018.04.14
억압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 <빌리 엘리어트>후기 : '대상화'의 윤리에 대하여  (0) 2018.04.14
너를 위해  (0) 2018.04.05
화해  (0) 2018.04.05
그녀를 떠나 보내며  (0) 2018.04.05
Posted by prajna_
summary2015. 8. 15. 00:21

 

 

2장「언문일치」의 가장(仮装)

 

«1»

원래 언문일치라고 하는 것은「말()」을「글()」에 가깝게 만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글」을「말」에 가깝게 하기 위한 시도라고 한다. 규범성이 요구되는「글」과 시대의 부산물인「말」이 괴리하는 것은 숙명이라서 그 괴리가 임계점에 달했을 때「문」의 측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자기 개혁의 움직임을「언문일치」라고 칭해온 것이다. 설령「말하는 듯이 쓰는」것은 가능할지라도 구어 그 자체는 결코 문장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설에 있어서의「언문일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문체의 문제이고, 구어(言葉)인 것처럼 가장 된문어(言葉)의 문제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말」과「글」이 일치한 예가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거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근접의 정도라고 말해도 좋다. 근대국가의 요청 하에 무엇을「일치」라고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교환된 암묵적 합의(의제)야 말로 바로 그 본질이었던 셈이다.

이 운동[1]이 일본어의 역사에서 공적으로 가장「말」과「글」의 괴리가 컸던 메이지 초기에, 일상회화가 갖는 대화적인 호흡을 문장에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특히)소설문체에 관련하는 이상, 사태는 반드시 그러한 방향으로 흐르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언표주체의 생생한 감성을 연출할 방도보다는 오히려 그 소거를 가장하고<「일찍이—거기에—있었다(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얼마나 재현(再現)적으로 나타낼까>라는 객관적인 세밀성을 표방한 제도로서 형성되어가게 됐던 것이다.

소설에 있어서 언문일치가 급속히 일반화 되어간 것은 메이지 30년대 후반[2] 무렵부터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자연주의 문학의 발흥(勃興)과도 거의 병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시기 이후, 언문일치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사실(写実)」과「묘사(描写)」의 두 단어가 키워드로써 얼굴을 내비치게 된다. 당시의 논의(議論)를 살펴보면, 언문일치체는 우선 일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고 평이(平明)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본래 구어는 대화 속에서 즉흥적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서술자의 판단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내세우기 위해서구어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논의 자체는 비정상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재현=표상(表象)」이라고 하는 환상을 토대로 하여 결과적으로는 화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구어를 이상(理想)으로 하는 매우 도착(倒錯)된 형태의 픽션적 이념이 소설에 강제되게 된 것이다.

이하부터는 구체적으로 언문일치체 소설에 있어서의 문말사(文末)~」에 주목하여 언문일치가 어떻게 정착해 갔는가 라는 관점[3]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의 정착을 생각하기 전에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 메이지 20년에 간행된 문부성편집국편찬『보통소학독본(尋常小学読本)[4]이 달성한 역할이다. 7권 중, 특히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제1권은 평이함을 염두에 두고 전편에 걸쳐 구어체가 사용되고 있다.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であります」조(調)이지만 여기에 더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로 끝맺는 형태가 부분적인 것을 포함하여 전34과 중 18과에나 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솝이야기를 모방한 제9, 17과와 옛날이야기(「桃太郎」)를 소재로 한 제26~28과이다. 예를 들어「桃太郎」는 <むかし くさかり せんたく きました/ 川上 から き な つ、ながれて ました。> 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등장인물의 회화는「」로 구별된 현재시제, 다른 문()은 과거시제의「~」로 통일되어있다.

오늘날에 비추어봤을 때 표준적으로 보이는 이 문체는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문학작품에 문말사「~를「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의 지표로써 의식적으로 사용한 대단히 이른 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야기 내용의 시간과 그것을 기술하는 현재가 확실히 구별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흐름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메이지20년대 이와야 사자나미(厳谷小波)[5]는『일본 옛날이야기(日本昔噺)(24, 1894-1896, 博文館)을 통하여「むかしむかしあるところに~ました」라고 하는 이야기 형태(話形)를 문어로써 널리 정착 시켜 나갔던 것이다.

「첫머리에(はじめに)에서도 밝혔듯이, 노구치 다케히코(野口武彦)[6] <いづれの御時にか>(源氏物語)[7], <>(今昔物語)등과 같은 모양새로 일본의 산문예술이 스스로 <(虚構(フィクション))>임을 가리키는 <허구기호>를—마치 악보 첫머리의 높은음자리표처럼—겸비해 온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근대소설은 작품세계를 일상적인 현실처럼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요청 때문에 직접 이러한 표식이 표면화 하는 일이 없지만, 노구치에 의하면 그 대신에 스스로 소설언어임을 나타내는 변별기호로써 문말사인「~」를 기본시제로 내포(内蔵)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솝이야기나 옛날이야기처럼 전승성에 뒷받침 된 옛날이야기에 더 용이했을 허구성의 제시를 일상적 리얼리즘소설에 있어 얼마만큼 실현 가능할 것인지이후 전개된 근대소설은 실로 이런 점을 둘러싼 시행착오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소설에 있어서~」의 정착에 크게 관여한 것이 이반 트루게네프의『사냥꾼의 수기』(1852)[8]를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번역한『あひ(「国民之友」明21(1888) 7-8)[9]이다.

전편이 거의「~」로 통일된 이 문체는 당시로는 아주 청신(清新)[10] 것이었다. <일본어로 어떻게 저렇게 부드럽고 세심한 표현이 가능했을까>(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する「世界文学」大3-7(1914-1918)), <세심한 서술법은 외국 문장의 특장점으로 일본 문장도 앞으로는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타야마 가타이(田山花袋)東京三十年6(1917), 博文館), <이런 문장도 쓰려고 하면 쓸 수 있구나. 이렇게나 세심하고 면밀히! 정확하게!>(타야마 가타이,近代小説12(1923), 「近代文明社」)등등, 후일 자연주의의「묘사」를 이끌어간 사람들은 젊은 날「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재현적으로 제시해 간 이 문체에 너나 할 것 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과 병행하여 이 시기에는 언문일치체 소설의 시도가 차례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야마다 비묘(山田美妙) 의『風琴調一節(ふうきんしらべのひとふし)(いらつめ」明20(1887)),武蔵野(「読売新聞」明20(1887))을 비롯[11]하여 아직「~」는 극히 부분적인 형태로밖에 쓰여지지 않았다.

당시 청신한 언문일치체 소설로 정평이 났던 야마다 비묘의『蝴蝶(「国民之友」明22(1889))의 한 구절에 그려지는 풍경은 어느 한 지점—『あひ』의 경우에는 숲 속에 앉아 나뭇가지 끝을 보고 있는 지점—으로부터의 원근법이 아니라 파노라마식으로, 본 것을 순차적으로 실황중계 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나친(過剰) 비유를 채택하고 있는 그 서술은 언문일치의 묘사 방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공연하게 비묘가 가진 한계라고 취급되는 일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사태는 늘 방패의 양면으로부터 성립된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です」「~ます」라는 경어체는「~」「~である」보다도 회화체에 근접해 있고, <前回えた蝴蝶といふ少女です><~ひましやう>라는 문어를 통해 봤을 때도 분명한 것은 그곳에는 항상 수신자()에게 보내는 구체적인 응답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은 화자, 청자 모두가 서로의 얼굴이 보이는 구어체에 의해 소설을 구성해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그 후에 전개된 언문일치체 소설은 항상 이 양방(両方)의 요청, 즉「~」에 의해 완결된 세계를 구축해 가는 방향과 실황중계적인 현재형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가는 방향—그리는 것()과「말하는 것()」—과의 갈등 속에서 전개되게 된다. 문말사「~」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는 방금 전에 언급했던 노구치 타케히코 외에 야나부 아키라(柳父章)[12],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13]과 같은 이들에 의해서도 논의가 축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야나부는 서양어의 과거형에 해당하는 번역에 완료의 조동사「~」를 대응시킨 의미를 인정하는 한편, 기존(在来)의 의미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차이(ズレ)를 떠안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서술()은 화자()로부터 독립한 객관적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제상황(事柄)에 대한 화자의 확인판단>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화자의 판단 유무는 이후에도 논의된 바가 있으나, 아무래도 이러한 논점에는『あひ』가 일인칭 회상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 깊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자작나무 숲 속의 젊은 남녀가 밀회하는 모습을 목격한 체험담으로 서술되는(られる) 이 소설은 집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여자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감개(感慨)를 시점으로 끝맺어지고 있다. 즉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던 실황중계적인 시점—밀회를 목격하고 있던 당시의<자신>—과 또다시 그것을 외부 프레임(外枠)으로부터 회상하고 있는「~」의 세계—이야기(物語)를 통괄하는 시점—가 적어도『あひ』에서 만큼은 훌륭하게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얼굴이 보이는 일인칭회상형식을 취함으로써 비로소『あひ』는 스스로의 견문(見聞)을「~」의 시공간 속으로 가둘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의 발견은 동시에 연작 중이던(がれていた) 언문일치 소설의 시작(試作)인『浮雲』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전장에서 서술했듯이『浮雲』의 제3(「都花」明22(1889)7~8)에서는 제1(20(1887)6, 金捲堂)의 장면내재적인 시점, 또는 제2(21(1888)2, 金捲堂)[14]의 주인공 분조(文三)에 밀착한 시점으로부터 서서히 이탈하여 객관적, 전지적인 시점을 지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각 인물의 심리를 설명하며 <人事(ひとごと)かッたが文三もよろしくかッた>(16) 라는 내래이션(物言)이 상징하듯이 문말사「~」가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이행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제3편에 이르는 과정에서 확실히「~」의 사용빈도가 잦아졌으며 거기에는 분명히 동시에 번역되고 있던『あひ』의 영향이 있었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あひ』의 성과가 반드시『浮雲』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인칭회상체였던『あひ』와는 달리, 전지적 객관성을 지향한『浮雲』제3편의 경우는 공교롭게도「~」의 증가에 보조를 맞추듯, 장면내재적 감성이 그 정채(精彩)를 잃고 말았다.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재현적으로 제시하려고 한 지향과, 장면에서「함께 호흡하려는(ともにきる)」것을 지향한 당사자의 시선(まなざし). 아마도 이 양자는 항상 서로를 배반할 숙명인 탓에『浮雲』는 결국 시행착오를 거듭한 채 중절되고 만 것이다.

~」에 관해서는 미타니 구니아키(三谷邦明)[15]와 노구치 다케히코가 이 문말을 인칭적세계와의 관계에서 논하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예를 들면, 미타니는~した」라는 표현은 본래 추정 없이는 사용할 리가 없다고 하며 일인칭에서 사용되어야 할「~」를 삼인칭으로 사용한 점에서 근대소설의 성립요건을 평가하고 있다. 독자가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일인칭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를 삼인칭으로 사용했기 때문이고, 거기서는 삼인칭과 일인칭, 등장인물의 개념(노구치는 기존의 죠루리(浄瑠璃)에서의「초월적일인칭」등을 예시로 들었다)이 근대소설에 정착한「~」를 기점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한편 이것과 별개로「~」가 가지는 의의를 과거시제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후지이 사다카즈(藤井貞和)[16]. 후지이는『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시점(はじめ)으로 하는 서술문학은 원래 <비과거>의 문체로부터 발생하는 임장감을 본지(本旨)로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근대소설이 언문일치에 의해서 비로소 과거시제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경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게다가 야나부와 미타니가 모두 도키에다 모토키(時枝誠記)[17]의 설을 근거로「~」에는「문제상황에 대한 화자의 인식판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점을 비판하며「~」라는 과거 감각이 전국적으로 긴 시대에 걸쳐 자라났다는 경위를 검증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논의들로부터 부각되는 것은 언표주체의 감성이나 판단이 문말사「~」가 과연 어디까지 관계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약간의 예측을 말해두자면, 근대소설은 그「재현=표상」이라는 환상에 의해 화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구어를 선택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서「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제시하는 데에 힘쓰면 쓸수록 반대로 그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암묵적으로 유발되게 되는 역설을 떠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노구치 타케히코는 다니자키 쥰이치로(谷崎純一郎)의『近代口語文欠点について(改造4(1929) 11)을 예로~」는 <중립적인 언어공간을 존립시키기 위한「삼인칭」의 형태표시>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のである[18]를 붙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유는 <언어공간에 있어서의 삼인칭성과 발화행위가 소거된 일인칭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미묘한, 이른바 위험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상술로 소개한 많은 논의들이 객관성을 나타내는 표식「~」의 배후에 있는 모종의() 주관 표출을 감지하는 것은 역시 거기에 삼인칭적인 세계와 일인치적인 세계가 서로 상충(せめぎ)—한쪽 편이 다른 한쪽 편을 끌어내고, 불러내는 갈등—하며 내재하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과연 객관성을 명확히 주장하며 장면에 내재하는 관점으로 실황중계를 해가는 것이 얼마나 가능했던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정보의 송신자()와 수신자()사이의 관계를 어디까지 서술에 표출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언문일치를 시도함에 있어 가장 고심했던 것 중 하나가 서술자()와 독자()사이의 대우관계로 그가 경어 생략이 독자에 대한 결례는 아닐까라는 걱정을 안고 있었던 것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言文一致文章世界39(1906)·5). 일반적으로 소설의 문체에는 그곳에 상정된 청자(독자)의 존재—이인칭적인 세계—가 어디까지 서술에 현재화(顕在化)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수()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오히려 이것을 제로에 가깝게 하는 것에「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의 재현적인 제시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면, 반대로 그 지수를 높여 독자에게 말을 걸며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려고 하는(現場きようとする) 언문일치 형태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히려 그 편이 청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 대화에서 호흡을 살려가는 식의 보다「말」에 가까운 문체를 창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표주체의 감성이나 판단에 관해서는 스즈키 사다미(鈴木貞美)[19]의 논도 주목할만하다. 스즈키는 앞에 나온 후지이의 견해를 근거로 하면서 그 예로써 구니키타 돗포의『蔵野(国民之友31(1898)1~2)에 나오는「~」는 <눈 앞에 있는 광경의 변화를 신선한 것으로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을 나타내는 완료의「~」였던>것은 아니었을까 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그 지적의 배경은 ~」가 서양어의 과거시제에 반드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독자적 세계 개척에 말미암은 판단일 것이다.

돗포의『蔵野』의 작중에는 사실『あひ』가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길잡이(手引)로 새로운 풍경을 획득해가는 프로세스가 1편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문이「~」로 끝맺어지고 있는 곳은 극히 적다는 점에 주의하고자 한다.

돗포의 서술 속에는 화자로 상정된 <>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한 <>를 부르는 것을 통해 독자는 蔵野라는 인위와 자연이 융합한 새로운 공통체에 갇히게 된다. 그 점에 대해 지적하자면, 이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삼인칭적 세계보다도 오히려 이인칭적세계—「」에 대한 부름(びかけ)—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蔵野』와 본보기로 쓰였을『あひ』사이의 거리는 사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あひ』를 인용하는 것으로 인해 일인칭에서나 보여줄 수 있는 원근법적 세계를 덧그리며 결과적으로는 대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화세계가 성립되어 버려진 결과에 대하여, 이러한 언표주체와 작중에 내포된 독자 사이에 교환되는 살아있는 응답관계에 그 뒤에 출현한 자연주의 이후 소설이 잃어버린 응당 있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가능성이 숨어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3»

<단순히 작자의 주관을 더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객관의 사실 및 현상(事象)에 대해서도 전혀 그 내부에 개입하지 않으며, 또한 인물의 내부정신에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다야마 가타이의「평면묘사」[20]의 주장(「生」ける「早稲田文学」明41(1908) 9)은 작자자신의 대담한 고백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지만, 실제로는 화자의 주관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었던 데다가, 문말사 또한「~」를 중심으로 한 제삼자적 객관성으로 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억제하면 할수록 그 균열점() 또한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인용문 끝부분부터는 화자가 도키오(時雄)를 암묵적으로 변호하려는 뉘앙스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독자는 이러한 판단을 상대화 해가는 작업 또한 가능해지는 것이다(2부 제3장 참조). 이렇듯 어떤 식으로 객관적인 입장을 가장한다 하더라도 언표주체의 판단, 평가를 제로로 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연주의 진영의 묘사론에 있어서 몇 번씩이나 걸쳐「주관」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가타가미 덴겐(片上天弦)[21]이『자연주의의 주관적 요소』(稲田文学」明43(1910) 4)에서 <자연주의는 주관의 동요와 고민을 그 근저정신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주관의 동요와 고민에 대한 만족을 얻을 정도의 힘있는 인생관에 기반하지 않는 이상, 물질적 인생관에 기초한 객관본위(観本位)의 문학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조잡한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주관적 요소는 자연주의문학의 근본으로써 가장 중요한 요소다.>라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꽤 기이하게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과학적 실증정신에 뒷받침된 내추럴리즘 본래의 이념과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정확하게」라는 덕목으로 치환되어 고백=사소설이라는 길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문학사의 구조적 결함으로 공공연하게 지적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낭만주의문학이 발달하지 않은 채로 자연주의를 수용한 탓에 고백적인 요소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말았다고 하는 일본 근대의 미성숙”’이라는 비판의 패턴도 바로 여기서부터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서술했던 관점에 비추어보면, 장면에 내재적으로「말하는 것(ること)」과 외재적인 시점으로「그리는 것(くこと)」사이를 얼마만큼 절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사태의 본질이 숨겨져 있던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22]는『문예상의 자연주의』(「早稲田」明41(1908) 1)에서 다음과 같은 표를 제시하고 있다.

— 순()객관적 — 사실적 — 본래 자연주의 — 소극적 태도 —

묘사의 방법태                                                                     통일목적—진()

— 주관삽입적 — 설명적 — 인상파 자연주의 — 적극적 태도 —

<본래 자연주의>에 대해 <주관삽입적> <설명적>이라고 하는 개념이 설정된 사실은 상징적인 것으로서 방금 전까지의 문맥에 따르면 대화적, 실황중계적인 서술자의 판단을 서술로 얼마만큼 집어 넣을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역시 그 배후에 남아있는(揺曳) 처럼 생각된다. ~」세계를 기본으로 장면에 내재하는 시점에 어떻게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さりげなく)” 삽입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언문일치체 소설의「사실」의 성패가 달려있었던 것이다.

자연주의의 본격화에 앞서, 독자적인 언문일치체를 실천했던 계보로「사생문(生文)[23]이 있다.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사생」의 제창을 하이쿠(俳句), 단가로 실천하고, 후에 이것을 산문에 적용하며 메이지30년대 전반에 사생문운동을 일으켰다. 시키의 사후, 다카하마 교시(高浜)[24]가 하이쿠 잡지인「ホトトギス」를 무대로 언문일치체 소설을 실천해 나갔으나, 그 특징은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개척한 문말사「~」를 제거하여 현재진행형을 사용하고,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배열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현장의 시점만을 특화 하려 하면, 역으로 소설의 시간구성이 기술적으로 곤란하게 되기도 한다. 설령 줄거리에 환원할 수 있는 이야기내용이 동일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야기 하는 순서가 바뀌게 되면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고민이야말로 소설 플롯이 담당할 역할인 것이며, 적어도 사생문적 실황중계로 장편소설을 구성하기는 아주 어렵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세키는 교시가 추천 해준대로 사생문의 일환이 되는 소설 데뷔작『吾輩である』를「ホトトギス」에 게재했는데(38(1905) 1~39(1906) 8),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양이의 눈을 빌린 실황중계를 담은 이 작품에는「~」가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 고양이를 통해 보이는 세계가 보이는 그대로, 현재형 시제로 이야기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장편소설의 통괄적 시점을 명확히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연재도중 고양이에게 <독심술>을 할 수 있게 하여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등(9), 이러저러한 궁리를 더해가게 된다. 당초의 예정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요청에 응해서『吾輩である』가 장편화 된 프로세스는 언문일치체의 실황중계 시점과 통괄적 서술의 시점을 어떤 식으로 절충시켜 갈 것인지에 대한 시행착오의 실천이 되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아울러, 사생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소세키의 초기작품『草枕(「新小説」明39(1906) 9)의 서두 부근에 한 구절을 참조해보면 역시「~」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중에서 화가는 등장인물인데도 오히려 <비인정(非人情)>을 표방하며, 히로인인 나미(那美)에게 방관적인 행동을 관철하고 있다. <평범한 소설가들처럼 제멋대로 근본을 찾아 심리작용으로 들락날락하거나, 인간갈등을 새삼스럽게 자꾸 문제 삼는 행위를 하게 되면 속되어 진다>라는 언문은 어떤 의미로는 상술한 다야마 가타이의「평면묘사」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의 주인공이「소설가」로서의 자기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草枕』에서는 화가가 <비인정>을 표방하는 것을 담보로 해서 객관적 시점과 당사자 시점 사이의 굴절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술은 시종일관 사생문적 실황중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으며 문말사「~」역시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 화가가 결국「그림」을 작중에서 완성시키지 못한 채로 끝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황중계적인「사생문」그 자체는 결국「소설」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우의를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인정>을 관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중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괄하는 주체여야만 한다. 중편소설 이상의 구성으로는 아무래도 역시「~」로 표상되는 통괄적인 시점이 필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소세키가 장편소설에서「~」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三四(「東京朝日新聞」明41(1908))부터다. 주인공 산시로가 상경한 직후의 장면의 문말만을 주목해보면 과거의「~」로 끝나고 있는 경우와 현재형으로 끝나고 있는 경우가 거의 반반으로, ‘산시로의 눈에 도쿄가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장면에 입각한 시점과 산시로가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결과적 통괄이 혼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형과 과거형이 번갈아 등장하는, 생각해보면 몹시 기묘한 이 혼교기술(混交技術)”은 그 뒤에 나온 언문일치체 소설에 하나의 양식으로 제시되었으나, 소세키의 경우에는それから(「朝日新聞」明42(1909)),(東京朝日新聞」明43(1910))장편소설을 연재해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현재형은 줄고, 압도적인 비율로 문말에「~」가 늘어나게 되었다. 대신에 이것은 현장에 있는 당사자의 시점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소세키는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를 큰 폭으로 늘림으로써 임장감을 연출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세키의 경우,~」의 증가와「 」에 의한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증가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두 요소가 칼로 자른 듯 분리되어 가는 것이 과연 서술의 진화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보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분리가 진행되면 될수록 등장인물은 독자로부터도, 화자로부터도 독립해 멀어져 가는 숙명에 처하게 되는데, 이 사실은『行人(「朝日新聞」大元(1912)~2(1913)),草枕(「朝日新聞」大4(1915)),明暗(「朝日新聞」大5(1916))로 나아감에 따라 주인공들이「개()」의 폐쇄(閉塞)상황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내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4»

메이지40년대부터 다이쇼 초기에 걸쳐 언문일치문체는「~」가 우세한 형태로 전개되어 갔으나, 그 큰 추진력이 되는 것이 백화파 작가들이 즐겨 사용한 일인칭이었다. 그들은「自分」을 주어로 하여 문장의 종지를거의「~」로 통일하는 형태를 일반화하였고 이것이 이후에 언문일치체의 표준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의『目出たき(44(1911) 2)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한 구절의 경우를 놓고 봤을 때, 거의 초등학생의 작문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러한 문체를 이쿠다 죠코(生田長江)[25]가 자연주의가 악전고투 끝에 획득한「묘사」이전의 치졸한 문체라고 매도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묘사논의의 축적에 의해 모처럼 고심해서 만들었을 암묵적인 합의—삼인칭적인 세계 제시와 일인칭적 판단과의 절충—가 <自分>의 주관을 전면적으로 표출해버리는 것으로 아주 간단히 무너져버릴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의해서 유심히 읽어보면 백화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自分> 예를 들면, 예전의 돗포의『蔵野』의 <自分>과 비교했을 때 같은 일인칭이라도 크게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무샤노코지나 시가 나오야가 사용한 <自分>은 독자를 부르거나 스스로 서술내용의 해설을 시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서술자가 사정한 독자의 존재의 지수는 매우 낮다. 거기에서 그리는「현재」의 판단은 가능한 한 억제되어 있는데 그것이 <自分>을 내세우는 강한 주관과, ~」로 끝나는「かつてそこにあった」객관세계 제시와의 기묘한 동거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 나오야의 초기 일인칭소설인『網走まで(「白樺」明43(1910) 4)의 경우에도 草橋와 비교해보면 완성된 원고에서는 집필시의 현재 판단이 꼼꼼히 제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시도했던 것은 서술의 현재를 굳이 바깥으로 내지 않은 채「自分~した」라는 종지형을 사용함으로써「그 당시의 현재(其時現在)(大津順吉「中央公論」大元(1912) 9)에 밀착하여「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를 연출해가려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백화파는 서술자의 주관을 전면으로 표출하는 문체를 확립했다고 하는데, 독자를 직접 부르는 것을 삼가려는 억제가 일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종일관 자기가 자기에게만 보고하는「혼잣말」과 같은 구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이쇼기 후반에는 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의 대립이 의미를 잃고 문단은 곧 시가 나오야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는 구어에서 대화적 요소를 제거한 독백체형식이 정착하고,「묘사」에 관한 최대공약수적 합의가 형성되어가는 과정과도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굳이 반복해 말하자면 억제하면 할수록,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가라는 물음 역시 다시금 부상하게 된다. 방금 상술 한 듯이 소설 문체에는 거기 상정된 청자(독자)의 존재—이인칭적 세계—가 어디까지 서술에 혼재해 있는가 하는 지수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되며 오히려 이것을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데에 하나의 이념이 있다고 한다면 응당 그 역 또한 성립될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우노 고지(宇野浩二)[26]의『(「文学世界」大8(1919) 4)[27]에는 <이야기의 앞 뒤가 뒤바뀌어서 종종 기로(岐路)에 들어서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저의 끝 없는 이야기를 여러분 머리로 적당히 분별해 알아들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야기의 전후가 뒤바뀝니다, 기로에 들어섭니다, 라기보다는 당치도 않은 곳으로 튑니다. 부디 자유롭게 취사(取捨)하고 안배(按排)하여 들어주십시오>같은 형태로 실제로는 묵독(黙読)하고 있을 독자에게「이야기()—듣는다()」의 장()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끔 연출해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 내용에는「~ました」를 이용하여 독자를 부르는「~ます」를 꽤 명확히 가려 쓰고 있는데 이러한 부름에 의해 역으로 이야기내용으로써 봉인되었을 세계가 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결과를 남기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른바「~」로 표상되는 세계와의 분쟁()과정 그 자체가「말」의 호흡의 재생으로 이어지는 매우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백화파에 의해 하나의 극단적 정형이 완성되었기에 비로소 이러한 안티테제 또한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와야 사자나미의『日本昔噺』에는「~ました」와 거의 같은 횟수만큼「~ましたとさ」라는 구승문예적 문말표현이 사용되고 있었다. 역으로「かつてそこにあった」세계의 제시와 이러한 가장을 일깨우는 독자와의 응답관계—아마도 거기에는「묘사」와「서술」과의 영원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가역적 왕복운동에 시선을 집중해보는 것으로 각각의 소설이 어떤 시공간을 구축하려고 했는지가 부각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텍스트】

安藤宏,近代小表現機構, 岩波書店, 2012

【단행본】

스즈키 사다미, 김채수 역,『일본문학의 개념』, 보고사, 2001

김채수 편,韓國日本近代言文一致體 形成過程, 보고사, 2002

스즈키 토미, 한일문학연구회 역,『이야기된 자기』, 생각의 나무, 2004

【논문】

井上敏夫,国語教科書変遷,国語教育科学講座 教材研究論, 国大学国語教育学会編 , 1958



[1] 일본에서의 언문일치운동은 서양서적들을 번역해 가다가 언문일치화 된 서구어 문장들의 장점을 발견한 난학자(蘭学者)들에 의해, 이미 18세기 말부터 태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그것은 메이지 혁명 직전에 양학자에 의한「한자폐지」를 발단으로 하여, 근대 서구의 계몽사상과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해 속문운동으로 전개되어 나왔다. 계몽사상가들의 그러한 속문운동은 정치, 사회계에서의 1880년대 전반기의 민권운동, 1880년대 후반기의 서구화 운동의 물결을 타고 전개되어 나갔고 1890년대 말에 와서는 정치사회계에서의 사회주의 운동과 교육계에서의 국어운동, 1900년초 년대 후반에 와서는 문학계에서의 사생문운동과 자연주의 운동, 1910년대에 와서는 정치사회계에서의 자유, 개성주의에 입각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물결 등을 타고 전개되어 나갔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언문일치운동의 실상과 그 의미」, 김채수 편,韓國日本近代言文一致體 形成過程, 보고사, 2002, p.55참조)

[2] 메이지 30년은 서기 1897, 메이지 36~39년을 후반으로 본다면 1903~1906년을 가리킨다.

[3] 일본어에 있어서 근대 문체의 본질은「과거라는 시제를, 서술 상에 우세하게 취급하는 움직임」이고,「과거의 시제를 문말에 오게 하는 문체의 채용」이었다. 즉 문말어「~」의 사용여부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김채수, 위의 책, p.154 참조)

[4] 尋常小学読本(じんじょうしょうがくとくほん), , 1887(20) (尋常[/형동] (1)특별하지 않으며, 보통인 것. 또는 그런 모양. 당연한 것. (goo辞書, 검색일 : 2015. 07. 22))

이노우에 토시오(井上敏夫)「국어교과서의 변천(国語教科書変遷)(国語教育科学講座 教材研究論, 国大学国語教育学会編, 1958)에서 1872(메이지)「학제(学制)」반포로부터 태평양 전쟁 후까지의 소학교국어교과서를 모두 1~4*로 구분하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된『보통소학독본은 분류 중 2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종래는 학년마다 제 각각 편찬되었던 교과서를 소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아동의 능력에 맞추어 평이한 레벨에서부터 어려운 레벨로 교재의 배열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다종다양한 교재를 구어체(담화체)에 의해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한편, 교재의 대부분은 도덕(修身), 지리, 역사로 충효, 근면, 입신 등의 덕목을 설파했던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시기에 민간 발행된 국어교과서로서 보통과목 용으로 평가가 높았던 것은 다음과 같다.

(1)学海指針社編集国読本』8 集英堂 189225

(2))『国語読本』8 富山房 190033

(3)金港堂書籍編輯尋常国語読本』8 金港堂 190033

특히 츠보우지 쇼요(坪内逍遥)가 쓴『국어독본(国語読本)(고등소학교용, 8)은 구어문을 중시하여 문장표현에서도 뛰어났다.

 

* 이노우에 토시오에 따른 교과서 변천의 시대구분

<1기 : 자유편찬시대> 1872(5)의「学制반포로부터 1885(18)까지

<2기 : 검정제도시대> 1886(19)教科用図書検定条例」제정으로부터 1903(36)까지

<3 : 국정교과서시대> 1904(37)学校令개정에 의한 국정교과서제도 실시부 1948(23)의 교과서검정제도의 실시까지

<4기 : ()검정제도시대> 1949(24)부터 신()검정교과서사용의시대 중간에 3개의 국정교과서시대는 다음과 같은 6기로 다시 구분된다.

-1 : 국정교과서尋常小学読本』(「イエスシ読本)8 190437

-2 : 국정교과서尋常小学読本』(「ハタタコ読本12 191043

-3 : 국정교과서尋常小学読本尋常 学国語読本』(「ハナハト読本12 1918 7)

-4 : 국정교과서『学国語読本』(「サクラ読本12 19338)

-5 : 국정교과서『ヨミカタ』『コトバノオケイコ』初等科国語(「アサヒ」 16 1941쇼와16

-6 : 국정교과서『こくご』『国語』(「みんないいこ」読本15 194722

 

여기에는 배()언문일치회와 같은 반대도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일치냐, 아니냐 하는 논의에서 나아가 새로운 문체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라는 취지에서 구어법에 관한 전국적인 조사가 시행되어(1903), 국정최초의『보통소학독본』에는 구어문이 확실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1904). 문예 면에서도 점차 문어로 된 문장을 줄이고 특히 러일전쟁 후에는 자연주의문학이 성행하면서 그 경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世界大百科事典」내의『尋常小学読本』에 관한 언급, (kotobank, 검색일 : 2015. 07. 22))

[5] 메이지~다이쇼 시대에 걸쳐 작가, 아동문학자,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작품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편집하는 博文館에서 발행하는 잡지「소년세계(少年世界)」에 게재되었다. 이후 같은 잡지사의「유년세계(幼年世界)」「소녀세계(少女世界)」「유년화보(幼年画報)」등의 주필(主筆)로서 작품을 집필하며「일본 옛날이야기」(1894-96)「세계 동화(世界伽噺)(1899-1908)등 대부분의 시리즈를 간행하였다. 오늘날 유명한『모모타로』『꽃 피우는 할아버지(咲爺)*등의 민화와 영웅담 다수는 그의 손에서 다시 쓰여져 어린 독자에게 읽혔는데 이는 일본 근대 아동 문학의 개척자라고도 불릴 말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꽃 피우는 할아버지』: 일본의 전래동화. 착한 노부부와 욕심꾸러기 이웃집 부부가 신기한 힘을 가진 개를 매개로 하여 전자는 행복해지고 후자는 불행해진다는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줄거리 ) 노부부가 작은 개 한 마리를 주워서 자식같이 귀여워하며 길렀다. 어느 날 개가 밭의 땅을 파며 "여기 파라 멍멍" 하고 짖기 시작하고, 놀란 노인이 쟁기로 밭을 파 보니 금은보화가 나왔다. 이를 부러워한 이웃집 부부는 억지로 개를 데려가 보물을 파라고 학대한다. 하지만 개가 가리킨 곳에서 나온 건 오물(혹은 지네, 두꺼비 같은 것) 뿐이었고, 화가 난 이웃집 부부는 개를 쟁기로 때려 죽이고 만다.

자식 같은 개를 잃고 슬픔에 잠긴 부부는 마당에 죽은 개의 무덤을 만들어 묻는다. 그리고 비바람으로부터 개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옆에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는 금새 큰 나무로 자라났다. 어느 날 개가 꿈에 나타나 그 나무를 베어 절구를 만들라고 조언하고, 조언대로 절구를 만들어 떡을 치자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옆집 부부가 트집을 잡아 절구를 빼앗아 와 똑같이 떡을 치지만, 보물 대신에 오물만 쏟아져 나온다. 격노한 옆집 부부는 도끼로 절구를 부숴서 장작으로 써 버린다.

노부부는 절구가 타고 남은 재를 받아와서 소중히 공양하려고 하는데, 다시 개가 꿈에 나타나서 재를 마른 벚나무에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 말대로 했더니 마른 벚나무에 꽃이 피어났고 마침 지나가던 영주가 감동해 노인을 칭찬하며 상을 주었다. 이를 본 옆집 부부가 마찬가지로 이를 따라 하지만 꽃이 피기는커녕 영주의 눈에 재가 들어갔고, 욕심꾸러기 이웃집 부부는 무례를 범한 죄로 벌을 받게 된다.

[6] のぐち たけひこ(1937.6.28-). 도쿄출신의 문예평론가, 국문학자, 고베대학(神戸大学)명예교수.

[7] [いずれのおおんときにか]. 출전은 겐지모노가타리의 1권인 기리쓰보(). 현대어로 번역하면「どの(みかど)御代であったろうか」(어느 천황의 치세였던가)

[8] 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 제국주의 귀족이자 사실주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레프 톨스토이와 나란히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문호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하다.『사냥꾼의 수기』(1852)로 유명해졌다.

아버지는 기병 장교로서 방탕과 도박으로 신세를 망치고는, 재산이 탐나서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6세나 연상인 부유한 여지주(女地主)와 결혼하였다. 어머니는 추한 용모에다 포악한 전제군주적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투르게네프는 어머니 영지의 농노들에 대한 동정에서 농노제를 증오하게 되었다. 1841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수렵을 즐겼다. 후일《문학적 회상》(1869)에서 농노제라는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서유럽에 도피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847년《동시대인(同時代人)》지() 1호에 농노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연작《사냥꾼의 수기(手記) Zapiski okhotnika》의 제1작이 발표되었으며, 1852 8월에는《사냥꾼의 수기》가 출판되었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후타바테이 시메이에 의해 번역 및 소개되었으며, 특히 쿠니키타 돗포(国木田独歩)나 다야마 카타이(田山花袋)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9]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번역소설. 메이지21(1888)에 발표되었다. 트루게네프의『사냥꾼의 수기 1절을 직역(逐語)한 것(, 부분역)으로 러시아 문학소개의 선구작(先駆作)으로 일컫어진다.

[10] [형용사] 맑고 산뜻하다.

[11] やまだ びみょう(1868(게이오4)-1910(메이지43)). 일본의 소설가·시인·평론가. 언문일치 단체 및 신체시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와 겐유샤(硯友社)를 조직하고 언문일치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메이지39 11学世界」정기증간「作文叢話」호 중,明治文揺籃時代」와 메이지40 10월「文章世界」제2권 제11호 정기증간「文話詩話」호 중「言文一致犠牲」에 의하면, 야마다 비묘는 영문학사에서 본 チョ, 모즈메 타카미(物集高見, 국학자)言文一致」및「RŌMAJI ZASSHI」메이지20 5월호의 체임벌린(チェンバレン)의「GEM-BUN ITCHI」의 영향을 받아, 언문일치체를 지향하였다고 한다. 야마다 비묘는 제 1작인 메이지19 11~20 7월의嘲戒小天狗(ちょうかいしょうせつてんぐ)」이후,風琴調一節,ふくさづつみ,蔵野,,夏木立(なつこだち)」에서~」조(調)의 언문일치체 소설을 발표하여「蔵野」때 유명해졌다.風琴調一節」의 작중에는 언문일치체로 쓰인 시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을 선구로 하여 21 1월에는 언문일치체로 쓴 3편의 시「初春」「はるのあけぼの」「明治二十一年新年又俗語体」를 발표하였고, 시에 있어서의 언문일치에 선참하였다. 동년 2, 3월에「言文一致論概略」을 내며 언문일치 옹호를 주창하였다.

[12] やなぶ あきら(1928.6.12-). 번역어 연구자, 비교문화론 연구자.

[13] からたに こうじん(1941.8.6-). 일본의 철학자, 사상가, 문학자, 문예평론가. 가라타니는『日本近代文起源』(講談社1980 / 講談社文芸文庫1988 / 岩波現代文庫2008)에서 구니키타 돗포의 작품을 통해 메이지20년대에 일어난 언문일치 운동을風景発見」으로 논한 바 있다.

[14] 浮雲는 전부 세 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과 제2편은 제목을「新編 浮雲」저자명을「坪内雄蔵(つぼうちゆうぞう)」로 한 단행본의 형태로 金港에서 각각 1887 6월과 1888 2월에 발간되었다. 3편은 같은 金港에서 발행되는 문예잡지『』의 제18, 19, 20, 21호에, 1889 7월에서 8월 사이에 걸쳐 실렸다. 분량으로는 제2편이 가장 많고 다음이 제1편 그 다음이 제3편의 순이다. 각 편은 각각 여러 개의 회()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은 제1회에서 제6회까지의 6, 2편은 제7회에서 제12회까지의 6, 3편은 제13회에서 제19회까지의 7회로 되어 있다. 19회 중에 제12회까지는 각 회의 첫머리에 그 의 내용을 시사하는 소제목이 있지만, 13회부터는 단지 회수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15] みたに くにあき(1941-2007). 일본의 국문학자. 요코하마시립대학(横浜市立大学) 명예교수. 전공은 중고문학.

[16] ふじい さだかず(1942.4.27-). 일본의 시인. 일본문학자. 도쿄대학 명예교수. 문학박사(1992).

[17] ときえだ もとき(1900-1967). 일본의 국어학자. 문학박사. 메이지 이전의 국어학사의 검토와 서양언어학의 비판을 가하며 언어과정설이라고 불리는 독자적 학설을 건설하며 국어학 분야에 새로운 전개를 가져왔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형성한 국어학은 도키에다 국어학으로 유명하며, 여기에 근거한 문법이론은 도키에다 문법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학교육을 바탕으로 국어교육의 진흥 및 전후 국어학계의 재건에도 힘썼다는 것이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도키에다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의 보급에도 관여했으며, 황국신민화 정책 시기에는 한국 강제 병합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대사실의 완성을 명목으로 조선어 완전 폐기와 일본어 모국화를 요구하며, 그 구체적인 방책으로 조선 여성을 중점적으로 교육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8] 스기모토 쓰토무(杉本つとむ)에 의하면「である 16세기경에 교토인들의 구어였다. 그런데 18~19세기에 중국의 고전, 서구의 화란서적 등이 일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문장어로 정착되어 나왔다. 그런데 메이지의 언문일치주의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문장어로 가져다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메이지의 언문일치주의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문장어로 가져다 썼던 이유는 무엇인가. (중략) 그들이 목표로 설정했던 근대구어체 문장이란 전근대 문어체가 근대 구어 문장체로 전환해 나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담화체의 형식으로부터 탈피해 나옴으로써 모든 인격체들로부터 해방되어 필자로서 취할 수 있는 고유의 위치에서 쓰여진 문장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언문일치체문장으로서의「である」조 문장은 근대 구어체로서 완성된 문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이란 필자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경우 독자들은 왕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고, 서민들일 수도 있다. 노인들일 수도 있고, 어린이들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러한 자기의 모든 독자들에 대하여 평등하고, 동등한 입장을 취할 수가 있다. (김채수, 위의 책, p.40참조)

[19] すずき さだみ(1947.9.22-). 남성. 일본근대문학연구자.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통합연구대학원대학 명예교수. 무라사키시키부문학상 선고(選考)위원.

[20] 작자의 주관을 섞지 않고 대상이나 사건과정의 표면만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문예상의 기법. 메이지40년대 다야마 가타이가 주장.

[21] かたかみ てんげん(1884-1928). 일본의 문예평론가, 러시아 문학자. 1900년에 도쿄 전문 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당시의 자연주의문학의 발흥에 즈음하여 자연주의문학에 심취하였다. 졸업 후에는『稲田文学』에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평론을 많이 발표했다.

[22] しまむら ほうげつ(1871-1918). 일본의 문예평론가, 연출가, 극작가, 소설가, 시인. 신극(유럽식 근대적 연극을 목표로 했던 일본의 연극)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23] 사생문은 사생(스케치)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쓰려고 했던 글. 메이지 중기 서양 회화에서 유래한 "사생"의 개념을 응용해서 하이쿠, 단가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마사오카 시키가 같은 방법을 산문에도 적용하고 설파한 것으로,ホトトギス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근대 일본어에 의한 산문 창출에 큰 역할을 맡았다.

[24] たかはま きょし(1874-1959). 시인, 소설가.ホトトギス』의 이념이 되는「객관사생(観写生),「화조풍영(花鳥諷詠)」을 제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5] いくた ちょうこう(1882-1936). 평론가, 번역가, 극작가, 소설가.

[26] うの こうじ(1891-1961). 일본의 소설가, 작가.

[27] 지카마쓰 슈코(近松秋江, 1876-1944,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의 삽화(여자를 밝히고, 기모노를 좋아하여 새 기모노를 만들어 전당포로 들고 가는 이야기)를 힌트로 구성된 소설이다. 주인공은 전당포에 맡겨둔 기모노가 마음에 걸려 그것을 햇볕에 말리러 가는 길에, 함께 맡길 고급담요를 몸에 두르고 기모노에 얽힌 이야기—과거에 만났던 여성과 있었던 일—에 대해 회상한다는 전체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구성 외의 세부내용은 고지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면, 주인공이 이불에 돈을 걸고 이불 속에서 집필을 하는 일, 다른 사람의 첩이 된 여자(실제 모델은 카요코(加代子))와 여배우(실제 모델은 와타세 준코(瀬淳子))와의 협상, 히스테리로 이혼한 여자(실제 모델은 이자와 기미코(きみ))등이 있다.

Posted by prajna_
summary2015. 7. 20. 20:19

. 모더니즘에 대한 고찰

1. 모더니즘의 발생 여건

유럽의 문예사조는 이성 존중의 헬레니즘과 감성 존중의 헤브라이즘의 질서 정연한 교체와 반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 고전기에 형성된 헬레니즘의 미학은 헬레닉 에라에 계승되고, 다시 로마에 이어지다가,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에 가서 그 자리를 헤브라이즘에게 양보한다. 그 후 천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하던 헤브라이즘은 르네상스기에 헬레니즘과 제휴하여 찬연한 마니에리즘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이원론적 문화는 다시 분화된다. 이성 편중의 고전주의가 17, 18세기에 유럽을 석권하다가, 19세기 초가 되자 낭만주의에게 왕좌를 양보하며, 19세기 초가 되자 낭만주의에게 왕좌를 양보하며, 19세기 후반에는 다시 모사론(模寫論)을 중축으로 하는 리얼리즘-자연주의의 전성시대가 온다. 이성중심주의가 감성주의를 누르며 세기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기말이 가까워오자 그 질서정연한 교체의 역사에 혼란이 생긴다. 한꺼번에 많은 유파와 사조들이 범람하는 20세기가 열리기 때문이다.

객관적 현실의 모사를 지향하는 리얼리즘은 외면적 현실이 비교적 안정될 때에만 융성한다. 리얼리즘은 거울의 문학이기 때문에, 대상이 요동치는 시기에는 약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외면적 현실의 안정이 깨어진다. 산업혁명 이후에 급속도로 발달한 서구의 산업화 과정은 제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살상무기의 대량 생산으로까지 이어지자 엄청난 비극이 벌어진다. 세계 전체가 서로를 대량으로 학살하는, 전대미문의 살상극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제 1차 세계대전은 이긴 나라에서까지 인간의 내면을 철저하게 황폐화 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을 형성한다. 거기에 도시의 비대화와 개인주의의 팽배가 첨가되어, 기존의 사회의 틀을 모두 부숴버리려는 전대미문의 전통 파괴가 시작되는 것이다.

외부적 현실의 붕괴는 보편적 가치의 상실을 수반한다. 이미 신을 버린 지 오래된 현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보편적 가치까지 상실하게 되자, 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처럼 깊고 절망적인 고립감에 사로잡힌다. 혼자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고독과 절망에 휩싸인 채 세기말의 허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강화되는 것이 개인중심주의이고, 내면에 대한 관심과 모색이다. 외면적 현실이 붕괴하자 내면적 현실이 중시되는 세계가 열리면서 반()리얼리즘의 풍조가 팽배해지는 것이다. 리얼리즘의 보편성 존중 경향이 무너지자, 모든 예술가들은 자기가 겪은 고립적인 현실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각인각색의 문학운동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새 사조들은 제각기 성격이 다르지만, ()시대를 거부하는 점에서만은 공통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전 시대의 속성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나라마다 양상이 달라진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것이 ()리얼리즘, ()자연주의가 되고, 어떤 나라에서는 반()낭만주의, ()인상주의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반()프로문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리얼리즘 쪽이 주도권을 가진다. 전 시대를 주도하던 사조가 대체로 리얼리즘, 자연주의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가장 큰 흐름은 내면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내면과 심층의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내면은 서로 다르다는 데서 생겨난다. 이미 보편적 가치는 사라졌기 때문에 각인각색의 개별적인 가치가 탐색된다. 이런 여건이 주조 상실의 시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고, 태평양 횡단 비행이 실현된 20세기 초가 되면 유럽에는 많은 문예사조가 생겨난다. 20세기 초에서 시작하여 약 20여 년 동안에 구미의 여러 나라에서는 실험적인 사조들이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그 다양한 새 사조들을 통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나라마다 명칭이 다르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인상주의와 상징주의를 제외하더라도, 이태리에서는 미래주의(1909~), 독일에서는 표현주의(1910~)가 생겨났고, 프랑스에서는 다다이즘(1916~)과 쉬르레알리슴(1917~), 영미에서는 주지주의와 이미지즘(1900~1920)이 나타난다. 거기에 회화 쪽에서 영향을 받은 포비슴(1905~)과 큐비즘(1908~)까지 합하면, 여남은 개나 되는 새로운 사조들이 불과 10여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데, 정작 모더니즘이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다. 스페인에서 1888년에 일어난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운동을 제외하면, 미국에서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정도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20세기 초의 모든 실험적 사조의 통칭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풍조 전체를 스페인에서 모데르니스모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새 사조들은 반전통, 반리얼리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세부 조항은 서로 다르다.

2) 모더니즘의 시기

모더니즘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에는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모던(modern)’의 의미를 새로움(new)’ 혹은 현재, 혹은 가까운 시기(present and recent time)’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이미 16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고, 지적·문명적·관용적인 것을 존중하는 성향으로 간주한다면 매슈 아널드처럼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문학도 그 범주에 넣어야 한다.

좀 더 범위를 좁혀 보들레르의『악의 꽃』이 나온 1957년을 기점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스럽 프라이처럼 다윈의『종의 기원』이 나오고, 보불전쟁이 일어나며 영국의 의무교육제도가 실시되던 해인 1870년을 시발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상징주의기(1980~1985)와 위스망스의『거꾸로』등이 나와서 자연주의가 위기를 맞던 1885년경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에드먼드 윌슨처럼 1870년에서 1930년까지의 문학을 동질의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협의의 모더니즘은 마리네티의『미래파 선언』이 나온 1909년에서 기산(起算)하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모더니즘이 구체적인 문학운동으로 전개된 효시가 미래파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 뒤를 표현주의(1909)가 이으며, 1917년에는 쉬르레알리슴 운동이 시작된다. 영어권에서는 190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모더니즘이 무르익어서 1919년에«모던 아트와 문학»이라는 잡지가 나오고, 1924«퓨지티브»3호에서 랜섬이 뉴크리티시즘을 제창하며, 시에서는 이미지스트가 모더니스트 선언을 한다. 그 뒤를 이어 1927년 그레이브스가『모더니스트 포에트리』라는 책에서 모더니즘을 정의한다. 이 시기는 모더니즘이 확정된 때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20년간 그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은 미래파 선언에서 시작해서 핵폭탄이 나오고(1945) 부조리극이 시작되며(1949) 우주시대가 열리는(1957) 시기인 50년대 전후에 일단 끝이 나고, 이후부터는 포스트모던의 시기로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3) 모더니즘의 특성

다음에 살펴보아야 할 것은 구미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모더니즘의 특이성이다. 워낙 종류가 많아서 일일이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운동만 개괄적으로 요약해보기로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09년에 이태리에서 마리네티의 미래파 선언이 나온다. 미래파는 ①전통의 부정과 허무주의적 유토피아주의, ②힘과 역동성·동시성의 미학, ③기계문명과 미래 예찬 등을 그들의 특성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힘과 역동성을 예찬하는 일은 전쟁 찬미로 여겨지고, 파시즘과의 유착을 낳아 빈축을 사게 되며, 그들의 실험은 비이성적 언어의 사용’, ‘값싸고 지루한 현대 숭배등의 부정적 평가를 받아, 자기나라에서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 등의 새로운 예술 활동에는 많은 영향을 주었고, 특히 러시아에서는 러시아형식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기여한다.

1910년에 문학용어로 확립된 표현주의, 나치가 퇴폐 문학으로 낙인을 찍은 30년대까지 독일에서 지속된다. 표현주의는 혼의 표출을 지향하는 감정 표출의 예술, 환상적이고 격정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하며, 정열적인 자아의 성취를 시도하여, 짜라투스트라적 인간형을 모색했으며, 어둠을 예감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추상성 지향의 반모사의 자세를 견지한다. 개인적인 것 대신에 전형적인 것을 사용하면서 개별성 상실의 문화를 고발하고, 환희와 절망에 탐닉해 원시적, 추상적·격정적·순간적인 것을 예찬하며, 날카로운 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다다이즘은 다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선언에 나오는 말로 그 성격을 드러낸다. “다다는 논리를 폐기한다. 다다는 기억을 폐기한다. 다다는 고고학을 폐기한다. 다다는 예언을 폐기한다. 다다는 미래를 폐기한다는 식으로 이어지는 무조건적인 과거 유산의 폐기 운동이 다다의 특성이다. 무질서 예찬의 이 전대미문의 자유 선언이 쉬르레알리슴의 정신 해방으로 발전하며, 반예술의 자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다다이즘의 뒤를 이어 1917년에 시작된 쉬르레알리슴은 ①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미학을 채택하며, 다다이즘과 같은 무작위적 우연기법을 사용하고, 혁명적 방법을 선호하여 친공산주의적으로 된다. 그래서 ②부르주아적 삶에 대해 부정적 자세를 취하며, 삶과 예술의 재통합을 시도한다. ③천재성을 부정하여 뒤샹의 변기처럼 기성품을 그대로 작품에 투입하며, 사물들이 일상적 문맥을 벗어났을 경우에 특수한 심미적 효과를 획득할 수 있음을 제시하려 하는 것이다.

영어권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190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모더니즘이 무르익어 가면서, 주지주의적 색채가 짙어졌다. 영국에서는 자연주의 문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지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형식주의적이며 분석적인 비평문이 성행했던 것도 그런 문학적 풍토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에도 그레이브스가『모더니스트 포에트리』라는 책에서 모더니즘을 정의한다. 그녀는 ①전통에서부터의 적극적 일탈, ②평균독자를 넘어서는 난해성, ③실험성 때문에 아방가르드와 동일시되는 점 등을 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보고 있으며, 참된 모더니즘과 속된 모더니즘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런 분류법은 칼리니스쿠가『모더니티의 다섯얼굴』에서 부르주아 모더니즘으로 분류한 것을 상기 시킨다.

이상의 여러 모더니즘의 공통분모의 공통분모를 추출해보면 모더니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반전통주의임을 알 수 있다. 그레이브스의 말대로 전통에서의 극적 일탈이야말로 모더니즘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 되고 있다. 반전통주의는 마리네티에서 시작되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은 조건도 없이 모조리 때려 부수려 한 다다이즘에서 그 극에 다다른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반전통주의는 마리네티 이전에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보들레르에서 이미 시작되어, 랭보의 반규칙·의식 존중·직관 존중의 자세에서 자리 잡혀 모더니스트들에게 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반전통주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 시대의 자연주의와 비교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주의적 예술관은 우선 모사론에 입각해 있다. 그들은 과학주의자이기 때문에 미보다는 진을 존중한다. 그래서 현실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정확하게 재현하려 하는 모사론을 채택하는 것이다. 리얼리스트들에게 있어 현실은 시계 시간이 지배하는 외면적 현실이다. 그래서 묘사의 기법으로도 외면화 수법이 채택된다. 또한 그들은 과학자처럼 자료에 의존하며 개연성을 존중한다. 개연성 존중은 자연주의소설의 모든 측면에 편재한다. 배경 묘사나 인물 묘사, 플롯의 전개 등에서 모두 개연성의 원리를 불문율로 삼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우선 모사론에 반기를 든다. 경험한 것이 아니면 자료에 의존하는 리얼리스트들과는 달리 모더니스트들은 반경험·반사실·반인간적인 것을 지향한다. 그들은 현실을 의도적으로 파편화하는 데서 활동을 시작했고, 그 조각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하여 예술을 완성한다.

상대성 원리가 나온 후에 출현한 새로운 작가들은 미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미는 이미 균형과 조화의 미가 아니다. 푸줏간에 걸린 고기 덩어리들을 그린 그림을 강의실에 걸어놓고, 추도 미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영화 <모나리자의 미소>속의 여교수처럼, 그들은 보편적·절대적 미 대신에 개별적·상대적·가변적인 미를 탐색한다. 가치중립성 같은 것은 발 디딜 틈도 없는 주아주의적 예술관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변기에 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는 뒤샹처럼 보편성을 몰각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나는 특징이 불연속성의 원리. 리얼리즘의 금과옥조인 연속성과 유기적 연결성을 무시하는 모더니스트들은, 자연주의자들이 애호한 비극적 종결법 역시 폐기하고 열린 플롯을 선호하며, 사건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플롯을 창안한다.

그들은 언어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며, 언어 행위를 놀이의 차원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형식을 분해하고 논리적 언어 대신에 자기 가치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 일군의 예술가들은 자연주의의 외부의 실제 생활의 크로노토포스를 완전히 무시한다.

모더니스트들이 가장 폭넓게 공감대를 가지는 점이 바로 외부적 현실을 재현하는 일의 거부. 그들은 주관주의와 내면성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생활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무의식의 심층까지 탐색하느라고 바빠서, 외부적 현실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더니즘기에 출현한 새로운 용어 중에는 무의식과 관계되는 것이 많다. 자동기술법, 의식의 흐름 수법, 내적 독백 등은 모두 무의식과 관계되는 것들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루스트, 조이스 같은 소설가들은 모두 심층심리의 탐색가다. 그들의 영감의 원천은 무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통용되는 시간은 그들과는 무관하다. 베르그송의 영향권 안에서 발생한 모더니즘에서는 시간의 주관화, 내면화 경향이 두드러진다. 회화가 원근법에서 이탈하듯이 역사적, 연대기적 시간과의 절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초현실의 세계다. 프루스트의 자장에 들어가면, 시계는 달리의 그것처럼 데포르메된다.

자연주의자들은 물질주의와 결정론의 신봉자여서 인간의 심리 대신에 생리를 그렸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생리인간이 차지했던 자리에 프루스트와 조이스가 들어선 심층심리의 문학이 개화되는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꿈의 세계처럼 논리가 없다. 모더니즘이 개연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반역은 형식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아폴리네르와 장 콕토 등은 모든 것을 파편으로 만들어 재배열하는 것으로 전통과의 싸움을 시작했고, 상형시를 쓴다고 시행을 회화적으로 배치하는 예술가들도 나타났다. 인간의 감각, 판단, 추억 등을 원근법적 질서 없이 뒤섞은 그들은 그림으로 그린 시, 상충되는 영상, 구두점의 생략, 줄거리가 없는 플롯, 말장난 같은 것으로 자연주의의 명석하고 논리적인 문학에 반항한 것이다.

()모사의 기치를 내세우고 등장한 모더니즘은 미의 절대성 부정, 반모사의 자세, 불연속성 부각, 언어의 유희화, 무의식의 탐색, 동시성의 원리 등을 통하여 전통과는 단절된 20세기적인 독특한 미의 세계를 창출해냈고 그 모든 것의 통칭이 모더니즘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prajna_